10
며칠 동안 발을 끊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무슨 힘이 나를 끎을 어찌 할수 없었다.그 힘은 어데 얼마나 달아나나 보자고 그가 나를 매놓은 실과 같았다.달아나면 달아나는 대로 그 실은 풀리었다 하되 잠깐만 걸음을 멈추면 그 실은 차츰차츰 감기어 뒤로 이끌었다.어느 때는 머리 올같이 가늘고 가늘게 되어 이것이 터진다, 고만 이리 와요, 이리 와요,살근살근 달래며 마음이 간질간질하게 잡아다리기도 하였다.어느 때는 쇠사슬 모양으로 굵고 튼튼하게 되어 이리 안 올 테야, 이리 안 올 테야,위협하는 듯이 쭉쭉 집어채기도 하였다. 이편에서 버티는 힘이 부족하면 휙 따라가는 수도 있다.하로는 그 집 골목까지 따라간 일이 있다. 그 집 대문을 보자 '에, 뜨거라.’하고 나의 넋은 달음박질하였다. 바른길로 일없이 진고개를 올라갔다.늘 하는 모양으로 책사(冊肆)에서 책사로 돌아다니다가 저물게야 수표교( 水標橋) 로 빠져 돌아오는 길이었다.대관원(大觀園)에서 어떤 젊은 신사가 기생 하나를 다리고 나온 것을 보았다.나의 마음은 다시금 동요하였나니 그 기생의 걸음걸음이며 뒷 모양이 하릴없는 춘심이었음이라.나는 걸음을 재게 하였다 느리게 하였다 하며 요모조모 살피기를 마지않았다.그 나붓이 늘어진 귀밑 머리조차 천연 춘 심이었다. 그럴 즈음에 그 기생은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마치 내가 뒤 따라옴을아는 것처럼.얼골이 같을 뿐만 아니라 사죄하는 듯한 웃음조차 건네는 듯도 하였다.나는 그 자리에 사라지는가 의심하였다.그러나 내가 쏜살같 이그의 곁을 스치며 모든 것을 꿰뚫어 보려는 일별(一瞥)로 그가 춘심이 아님을 간파하였다.온전히 나의 착각임을 깨달았다. 나는 이런 일을 금방(金房) 은방(銀房) 앞에서,전차 정류장에서 한두 번 겪지 않았다.마치 나의 눈에 춘심이란 색안경이 끼여 도처에 춘심을 발견 하는 것 같았다.홀로 시각(視覺)뿐만 아니다. 나의 관능이란 관능은 모다 그러하였다.그 고소한 머릿기름 냄새를 안해의 머리에서 맡기도 하였다.그 야릇한 향기를 나의 소매에서 느끼기도 하였다. 그의 소리, 살,냄새는 벌써 그의 전유물이 아니고 낱낱이 나의 속 깊이 잠겨 있는 듯하였다.이 모든 것들이 환원작용으로 본임자와 어우러지라고 발버둥을 하고 있거늘 그래도 끈을 떼었거니 하고 있었다. 정말 떼어졌을까?보라!어느 연회에서 다시금 만난 우리는 어찌 되었는가!처음은 서로 눈인사만 교환하였다. 그리고 피차 모르는 사람 모양으로 시침을 따고 있었다.하건만 연회가 끝나고 요리점 문 밖을 나왔을 제 그의 손은 나의 손을 힘 있게 쥐었다. "어쩌면 그렇게 매정하십니까?" 그는 말을 꺼내었다. 얼마든지 비난을 하라는 것처럼 나는 빙글빙글 웃고만 있었다."돌아서신 줄은 나도 알았지만, 그렇게 아니 오실 줄을 몰랐어요…….그 이튿날 만토 속에 돈 20 원 든 것을 보고 남자란 다 마찬가지이다, 이 걸로 정을 끊는구나 하였지요…….""아니 무엇, 그런 것은 아니야. 저어…….""남의 말을 좀 들어요……. 이것이 들어 남의 좋은 사이를 갈랐구나 하고 그 지폐 두 장을 쪽쪽 찢어버리고 싶었어요.이다지도 남의 마음 쓰는 것을 모르는가 하니 야속해 견딜 수 없었어요. 어쩌면 내 마음을 알아 줄까……, 편지 로나 세세 사정(細細私情) 그려 볼까……, 별별 생각을 다하다가 에라 치워라,매몰스러운 사나이에게 내 속을 왜 빼앗기리 하고 한 발이나 되게 쓰던 편지를 갈가리 찢어 버렸지요." 하고는 그 때의 괴로운 한숨을 모아 두었다가 인제 쉰다는 듯이 길이 길이 숨을 내어쉬었다. "요사이 조금 바빠서……." 라고, 일종 프라이드를 느끼면서 나는 중얼거렸다."그런 말 말아요." 춘심은 성난 듯이 잡았던 손을 뿌리치며,"마음에 있으면 꿈에라도 보인다고,아모리 바쁘기로서니 잠시 잠깐 다녀갈 틈이야 없단 말입니까?내가 미친년이지, 내가 미친년이야. 나 같은것이 정이니 무엇이니 하는 게 개밥에 도토리지…….""가고야 싶지마는 어데 가겠던. 영업에 방해만 될 뿐이니…….""내가 장사를 합니까?영업이 무슨 영업이란 말씀이오?그런 이면 치레를 하는 것부터 마음에 없어서 그러는 것이지요, 짜장 보고 싶어 보시오.그런 생각이 나기나 하는가. 참 사나이라 다릅니다그려. 나는 암만 잊으려 해도어데 잊혀집디까?왜 만났던고, 왜 친했던고, 하로도 몇 번을 후회를 하였는지 몰랐어요.정이란 사람이 맨든 것이지만 인력으로 못할 것은 정 입디 다." 그의 손은 다시금 나의 손을 쥐었다. 문득 깨달으니 나는 벌써 그의 집 마당에 서 있었다.
11
마음의 방축(防築)은 고만 터지고 말았다. 유혹의 흐름은 거리낌없이 밀리었다.이 물결 가운데는 싸늘한 이지(理智)와 뜨거운 감정이 서로 부딪고서로 쳤건만 이지는 흔히 쩔쩔 끓는 열수(熱水)에 넣은 얼음 조각 모양으로 사라졌다. 모든 것을 잊고 나는 종종 춘심을 방문하였다. 그 역시 언제든지 나를 환영하는 것 같았다."왜 그처럼 아니 오셔요?" 그는 중문간에서 마당으로 삐죽이 나타나는 나를 보자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부르짖는 것이 항례(恒例)이었다. "아까 왜 만나지 않았어?" 어느 때는 내가 이렇게 대답할 경우도 있었다."참 그랬지요. 나는 또 깜빡 잊었지.금방 보고도 금방 아니 본 것 같 애요." 하고 둘이 웃는 수도 있었다.그리고는 밖이야 햇발이 따뜻하든 달빛이 밝든 밀장은 합문(合門)이 되었다.사랑은 낙원을 지을 수 있다. 진세의 아모 런 경치와 아모런 풍정도 이에 미칠 것이 무엇이랴!거울같이 마주만 앉으면 그뿐이다!말은 말 끝을 좇고 웃음은 웃음 뒤를 이었다. 피차의 처지를 설명 하자 오뇌도 하고 번민도 한다.그러나 사랑으로 하여 하는 오뇌요 번민이라. 딴 일로 말미암은 그것보담 달랐다.그것은 하고 싶어하는 때문이다."그런 생각을 다 하면 무엇합니까?한시라도 재미있게 놀면 그뿐이지." 찰나주의자인 그는 이렇게 끝을 맺고 가야금을 뜯기도 하였다.이러다 돌아오는 날은 만족과 행복을 느꼈다. 물린 것은 아니지만 며칠 아니 보아 도참을 수 있었다.하지만 어째 갔다가 못 만나면 하로도 두세 번을 가고 싶었다.저나 내나 무슨 고장이 생겨서 곧 아니 헤어질 수 없게 된 때도 그러하였다.어머님이 밤 열 점 반 차로 동래(東萊)에서 돌아오시던 날이었다.정거장 나가는 길에 나는 춘심의 집에 들렀다. 금심이가 있기 때문에 키스 한 번,포옹 한 번 못하고는 나는 몸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었다."왜 벌써 가셔요?" 금심은 나에게 매어달리며 모자 집으려는 팔을 막았다."아니, 집에 가 보아야 될 일이 있다."라고 대답하였다. 웬일인지 말소리가 내 귀에도 허전허전하는 것 같았다.어째 춘심에게는 가야만 될 사정을 말할 수 없는 것 같았다."이애, 고만두어라.오긴 어려워도 가긴 잘 가지. 만 날 천 날 간다, 간다." 라고,춘심은 새모록하게 긁어 잡아당기었다.모자는 썼건만 그 음향이 전기 같이 나에게 끼치어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다.잠깐 답답한 침묵에 왼 방안 공기가 응결되는 듯싶었다. 금심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만 있다.춘심은 차마 가는 뒤 꼴을 못 보겠다고 하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시키시마(敷島[부도])’의 권연을 빼어 입으로 그 담배를 불어 빼고 흰 종이를 볼록볼록하게 맨들고 있다.차라리 가지 말라고 나의 소매를 잡아 당겼던들 이렇게 가기 어렵지 않으련만!"아이고, 좀 붙잡으셔요." 민망하였던지 금심이가 마츰내 침묵을 깨뜨렸다."고만두어라.양류(楊柳)가 천만사(千萬絲)인들 가는 님 어이하리." 라고 춘심은 노래 부르는 어조로 한숨을 내쉬었다.하건만 나를 쳐다본 애 끊는 정이 서린 추파는 무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을 주었다.다만 한 시간이라도 반 시간이라도 더 놀았으면 하였다. 그러나 기차 대일 정각은 이미 임박하였다.뒷마루까지 나오는 수밖에 없었건만 그와 작별치 않고는 차마 나려설 수가 없다.나는 닫혔던 미닫이를 다시금 열었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오직 한 번이라도 나를 보아나 주었으면!"그냥 가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는걸." 나는 진정을 농담으로 엄벙하였다. 그는 얼골을 들었다.하염없이 웃으며,"아모리 무정한 님인들 작별이야 안 할 수 없지." 하고 일어서 나온다.사람 눈 없는 어슴푸레한 마루에서 둘의 그림자는 하나가 되었다."밖에 볼일이 무슨 볼일이오?" 그는 물었다. 그 소리는 성난 듯도 하고 우는 듯도 하였다."어머님이 오늘밤에 오신대.시방 정거장에 나가는 길이야.""진작 그런 말씀을 하실 게지. 그러면 어서 나가셔야 되겠구려." 하면서도 나를 놓지는 않았다. 더욱더욱 그의 몸이 달라붙음을 느끼었다.나의 다리가 마루 끝을 나려서렬 적마다 무릎으로 막았다.입으로 가지 말라는 것보담 그 몸짓의 말이 더욱 웅변이었다. 이윽고 나는 구두를 신었다.그도 나를 따랐다. 중문과 대문 어름에서 우리의 그림자는 또 한번 합하였다."어서 가셔요.""응. ""나는 어찌할꼬?""일찍이 좀 자려무나." 나는 그가 녹주홍등(綠酒紅燈)에 시달리며 밤마다 밤마다 잘 잠을 못 자는 것을 생각하고 이런 말을 하였다. "어데 잠이나 오나요?어슴푸레하게 달은 비치고……." 그 날은 봄의 기운이 벌써 뚜렷한 밤이었다. 담회색 구름은 연기같이 흐르고 있다.그 속으로 윤곽조차 확실치 않은 달 그림자가 희미(稀微)한 광선을 흩고 있다.무에라고 말할 수 없는 봄 향기에 채운 이 공기, 이 정적, 이 박명(薄明),,더구나 베일에 감긴 처녀의 나체 같은 어스름 달 ─ 이 모든 것들에게는 비밀의 정열의 발효(醱酵)를 느낄 수 있었다.봄 마음( 春心)으로는 잠도 아니 올 밤이다. 나도 한참 황홀하였다."참 가셔야지,차 시간 늦을라."하고 그는 문득 감았던 팔을 풀었다."자아, 가십시다." 하면서 그는 양인(洋人)이 하듯 내 팔을 얼싸끼고 게을한 발자욱을 옮겼다. 그러면서,"이러고 멀리멀리 갔으면." 이라고 꿈꾸는 듯이 말을 하였다. 문간 전등 밑에서 우리는 떨어졌다."어서 들어가." 나는 한 마디를 던지고 돌아섰다.두어 걸음 가다가 뒤를 돌아오니 그는 그대로 서 있다. 두 눈이 이상하게 빛나는 것 같다.내 마음 탓인지 모르되 분명히 눈물이 도는 듯하였다. 몇 걸음 가다가 또 돌아보았다.반만 대 문안 어둠 속으로 사라진 그의 초연(悄然)히 돌아선 꼴이 눈에 띄었다.그것 이아주 사라지자 청승궂게 부르는 노래 한 가락이 나의 뒤를 따라왔다."욕망이난망(欲忘而難忘)이요, 불사이자사(不思而自思)로다. 갈 거 ( 去) 자 설워 마라,보낼 송(送) 자 나도 있다." 이런 뒤로는 정이 더욱 깊어진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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