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칠단의 비밀
1. 곡마단의 오뉘 꽃
여러 가지 꽃들이 만발해서, 온 장안 사람이 꽃에 취할 때였습니다. 서울 명동 진고개 어귀에는 며칠 전에 새로 온 곡마단의 재주가 서울 왔다 간 곡 마단 중에 제일 재미있고 제일 신기하다 하여,동물원 구경 보다 더 많은 사람이 낮과 밤으로 그칠 새 없이 들이밀려서 들어가지 못하고 도록 돌아가 는 이가 더 많을 지경이었습니다. 이 곡마단의 주인은 일본 사람 내외이고,재주 부리는 사람도 모두 일본 사람인데, 그 중에는 중국사람 내외가 한패 끼어 있을 뿐이고……, 이 곡마 단이 일본과 중국으로 돌아다니면서 돈벌이를 하다가, 조선에 와서 재주를 부리기는 이번이 처음이므로,서울 있는 사람들에게는 참말로 신기하고 재 미있는 재주가 더 많이 있었습니다. 어여쁜 여자가 해골로 변하여 춤을 추는 것도 재미있었고,조그만 원숭이 와 커다란 사자가 재주를 부리는 것들도 모두 처음 보는 재미있는 것이고, 중국 여자가 접시 돌리는 것이며,그 남편이 웃통을 벗고 누워서 가슴 위에 큰 돌을 올려놓고, 그 위에 큰 사람 일곱 사람을 올려 세우고도, 그리고도 발끝으로 재주를 부리는 것도 참말로 신통한 구경이었습니다.그러나 그 사자보다도 중국 사람보다도 더 구경꾼의 마음을 끄는것은, 말 등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열대여섯 살의 소년 한 사람과 가느다란 철줄 위 에서 무도[無蹈]를 하는 열서너 살의 어여쁜 소녀였습니다.얼굴 곱고 몸 가벼운 소년이 시뻘건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말 등 위에 서 가지가지의 아슬아슬한 재주를 피우는 것이며,어여쁘고 귀여운 소녀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높다란 철줄에서 우산을 펴 들고 여러 가지 서양 춤을 추는 것은 참말로 구경꾼의 가슴을 졸이는 재주여서,보는 사람마다 손에 땀을 흘리면서 아슬아슬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맨 나중에 그 한 남매라고 하여도 좋음직한 소년과 소녀가 함께 나 와서 까마득하게 높이 매달린 두 개의 그네 위에 올라가서 원숭이 같이 재 주를 부리다가 공중을 후루룩 날아서,이 그네 저 그네로 옮겨 뛰는 재주그거야말로 수천 명 구경꾼의 가슴을 떨게 하는 귀신같은 재주였습니다. 까 딱 잘못하면 그 높은 그네에서 내리 떨어져 즉사하고야 말 터인데,그 높은 곳에서 그네를 놓고 공중으로 후루룩 날 때. 부인네와 어린 사람은 차마 보 지 못하여, “악!악!” 부르짖으며, 얼굴을 숙이고 손으로 눈을 가리었습니다. 그러나 실수 없이 약삭빠르게 저편 그네에 옮겨 매달려서 새로운 재주를 피울 때, 구경꾼들은 미친 사람들 같이 기뻐 날뛰면서, “으아!” 소리와 손뼉 소리를 퍼부었습니다. 어여쁜 오뉘 같은 소년과 소녀의 재주!소문은 가는 곳마다 퍼져서 아침부 터 저녁때까지 구경꾼들은 밀물같이 몰려오는 것이었습니다.
2. 슬픈 신세
하루에도 몇 천 명 손님에게 칭찬을 받고, 모든 사람에게 귀여움을 받고 떠받들리는 나이 어린 소년과 소녀. 손뼉 소리 속에서만 춤추는 소년과 소 녀.가는 곳마다 몇 만 명 시민이 자기네의 재주를 바라보고 모여들건만 은……. 그들의 마음은 더할 수 없이 슬펐습니다. 소년은 열여섯 살이었습니다. 소녀는 열네 살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에게는 부모도 없고, 친척도 없고, 고향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누구였고 어머니는 누구였었는지……, 자기의 고향은 어디였었는 지, 그런 것은 도무지 알지 못하고 어릴 때부터 곡마단의 단장 내외를 아저 씨 아주머니하고 부르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피가 흐르게 두들겨 맞으면서 여러 가지 재주를 배워 온 신세였습니다. 남들이 하는 말같이 소년과 소녀는 친남매 친동생인지……, 어디서 뿔뿔이 얻어다가 남매같이 길리우는 몸인지…… 그것도 분명히 알지 못하는 가여운 신세였습니다. 친오뉘가 아니라도 좋다!이 넓은 세상에 부모도 형제도 없는 몸이니, 우 리 두 사람끼리나 친오빠같이 친누이같이 믿고 지내자고 밤마다 울면서 밤 마다 맹세하면서 지낼 뿐이었습니다.부모도 없고 고향조차 없으니 두 아이는 아무 데를 가도 반가운 곳이 없었 습니다.조선에 오거나 중국에를 가거나 아무 데 가서 아무런 사람을 보아 도 두 아이는 혼자서 마음이 슬플 뿐이었습니다.재주가 끝나고 옷을 갈아입고 음악대 뒤에 숨어 앉아서 흩어져 나가는 구 경꾼을 볼 때 자기 같은 어린 소년 소녀가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의 손목 을 잡고 재미있게 이야기하며 돌아가는 것을 볼 때마다 그들은 돌아서서 울 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3. 이상한 노인 조선의 봄, 더구나 서울의 봄은 아름다웠습니다. 밖남산[外南山] 망원리의 복사꽃, 장충단의 개나리, 서강(西江) 건너와 청량리의 수양버들.보는 곳 마다 좋다고 곡마단 사람들은 틈마다 떼를 지어 돌아다니건마는,이 곡마단 의 왕이라 하여도 좋을 두 아이는 오늘도 아침밥을 먹고 곡마단 빈 자리에 심심히 앉아 있었습니다. 단장 내외는 여관에 있고, 다른 사람들은 꽃구경 나가고,중국사람 내외와 심부름꾼 조선 사람 두 사람이 거적 위에 누워서 낮잠을 자고 있을 뿐, 오 정 때가 되어야 모든 사람이 돌아오고 구경꾼도 몰려오기 시작할 판이었습 니다.빈 집 마당에 낮잠 자는 강아지같이 쓸쓸하게 심심하게 나른하게 너댓 사 람이 있을 때, 이상한 조선 노인 한 분이 곡마단 포막 안으로 찾아들어 왔 습니다.머리는 반이나 희끗희끗하고 옷은 맵시 추레하고, 신발이라고는 다 찢어진 고무신을 이리 꿰매고 저리 꿰매서 간신히 발에 걸려 있었습니다.그가 어슬어슬 들어오는 것을 보고 심부름하는 조선 사람이 “아직 구경 없어요. 이따가 점심 잡숫고 오시오, 이따가 와요.” 하고, 일렀습니다.그러나 노인은 그 말은 들은 체도 안 하고 물끄러미 보 고 있는 두 의남매에게로 왔습니다. “이 애야. 너희가 조선 아이 아니냐?” “너희를 보고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 “내 말을 못 알아듣겠니?” 하고, 여러 가지로 물었으나 소년과 소녀는 처음 온 나라이라 조선말을 한 마디도 알 까닭이 없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깜박깜박하다가,소년이 언뜻 심부름꾼을 불러서 노인의 말을 일본말을 통역하여 달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노인과 소년은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네가 혹시 조선 사람이 아니냐?” “모르겠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도 모르고 고향도 모르고 곡마단에서만 자랐으니까요. 나라도 모릅니다.” 어쩐지 슬픔을 머금은 대답을 듣고 노인의 눈은 이상스럽게 빛났습니다.“오오, 그럼 분명하다, 분명히 너희가 조선 사람이다. 네 나이가 금년에 몇 살이냐?열여섯 살이냐, 열일곱 살이냐?” “저는 열여섯 살입니다.” 노인은 펄쩍 뛸 듯이 신통해 하면서, “옳지. 열여섯 살, 그럼 정말 분명하다!네가 분명히 상호다. 상호야.” 노인은 어찌할 줄을 몰라 하면서 다시, “그럼 저 애는 금년에 열네 살 아니냐?” “네. 열네 살이올시다.” “오오, 옳다,옳다. 순자다, 순자야. 너희 남매를 한꺼번에 만날 줄을 몰 랐다!” 하면서, 노인의 눈에는 벌써 눈물이 고였습니다. “예, 오뉘예요?저희 둘이 친오뉘입니까?노인께서는 누구십니까?” 소년과 소녀의 피는 일시에 끓어올랐습니다. 평생의 소원이 지금 이루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불길이 내쏟는 듯한 눈으로 노인의 얼굴을 쏘아보았습 니다. “오냐. 이야기하마.너희는 내 누이의 아들이요, 딸이다. 나는 너희 외삼 촌이다. 그런데 네가 네 살 되고 저 애가 두 살 될 적에 너희 부모가 서울 서 너희 남매를 잃어버렸단다.그때 나는 시골 살았었으므로 편지로 그 소 식을 듣고 곧 서울로 올라와서, 너희 부모와 같이 너희를 찾느라고 애를 썼 으나 어디 찾을 수가 있디……, 영영 찾지 못하고 그만 너희 어머니는 심화 병이 나서 이내 돌아가시고, 너희 아버지는 홧김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때마침 단장 내외가 말채찍을 들고 들어오다가 이 꼴을 보더니, 무슨 큰 변이나 난 것처럼 내외가 다 얼굴빛이 변하였습니다. “누구야, 나가. 나가.” 소리를 지르면서 노인의 등을 밀어 포막 밖으로 내어 쫓고는, 다시 들어 오자마자 채찍으로 말 갈기듯 소년을 후려갈겼습니다. “요놈의 자식아!왜 여기 와 있어?” 가늘고 길다란 채찍은 독사뱀같이 소년의 몸을 휘휘 감았다 놓았습니다. 그러고 채찍이 닿았던 곳마다 다리고 손끝이고 모두 피가 맺히고 퉁퉁하게 부어올랐습니다.소녀는 단장 마누라의 손에 머리채를 휘어 잡혀서, 그가 휘젓는 대로 이리 쓰러지고 저리 구르고 하면서 아픔을 못 참아 소리쳐 울었습니다.그 날로 단장의 명령이 내려 곡마단은 문을 닫아 버리고, 포막 집을 헐어 헤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경성에서도 앞으로 열흘이나 더 할 예정이건만,웬 일인지 불시에 문을 닫고 부랴부랴 짐을 만들어서 한시라도 속히 경성을 떠 나 중국으로 간다는 명령이었습니다. —《어린이》4권 4호 (1926년 4월호,북극성(北極星)). 4.새로운 걱정과 설움 자기 몸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그것도 모르고 자란 신세 불쌍한 곡마단의 소년과 소녀!열여섯 살 되고 열네 살 되는 이 봄에 조선에 왔다가 이상한 조선 노인을 만나, “너희가 조선 사람이라.” 는 것과 “너희 두 사람이 친오라비 친누이라.” 는 말과 부모의 소식을 듣게 되자, 원수의 곡마단 임자 내외에게 들키어 다 시는 만날 수도 없게 헤어지게 된 것을 생각하면 우리 두 사람의 팔자는 왜 이다지도 불행한가 하여 생각할수록 가슴을 얼음으로 저리는 것 같았습니 다.어떻게도 몹시 얻어맞았는지 소년의 몸에는 뱀이나 구렁이가 칭칭 감긴 것 같이 채찍 자국이 빨갛게 부어올랐고,소녀는 휘어잡혀 휘둘린 머리가 칼로 저며 놓은 것 같이 아프고 온몸에 꼬집혀 뜯긴 자리가 시퍼렇게 멍이 들었 습니다.그러나 아무리 아무리 아파도 관계치 않으니 다시 한 번 떠나기 전 에 그 외삼촌이라는 노인을 잠깐만이라도 만났으면!하는 것이 그들의 소원 이었습니다. ‘아아, 자기의 근본을 알고 본국을 찾고 부모를 찾고……, 그것이 우리들 평생의 소원이 아니었는가!오늘 죽는다 하여도 한탄이 없으니 내 부모 내 본국을 알게 된 것이 꿈에도 잊지 못하는 소원이 아니었는가!그런데 이제 조선에 와서 뜻밖에 외삼촌을 만나 부모의 소식을 듣다가 못 듣다니……. 아아, 이렇게까지 악착한 팔자이면 차리라 죽여나 주소서, 죽 여나 주소서…….’ 입 속으로 부르짖으며 원망스러이 허공을 쳐다볼 때에, 그들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샘물같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 노인의 말이 정말이라 하면 분명히 자기들은 조선 사람이오,친오라비 요 친누이요, 이름은 상호와 순자요, 그리고 어머니는 자기네 남매를 찾지 못하여 화병으로 돌아가신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아버지는 어찌 되셨을까?돌아가셨을까?살아 계 실까?’ 노인의 말씀은 마침, “너희 아버지는…….” 하다가 그치고 말았으니, 노인을 다시 만나기 전에는 아무래도 아는 수가 없었습니다. ‘노인을 만나야 되겠다!노인을 만나야 되겠다!’ 마음속으로 부르짖으나, 그러나 당장은 내일 아침으로라도 이곳을 떠난다 고 부랴부랴 포막 집을 허물어서 짐을 싸는 중이니,무슨 수로 이 넓은 경 성 천지에서 그 외삼촌이라는 노인을 밤사이에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해는 벌써 어두워 가는데, 이 밤만 지내면 내일 아침에는 처음 보는 본 고 향을 또 떠나서 정처 없이 끌려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바위에 눌리는 것같 이 점점 무거워질 뿐이었습니다.“대체, 조선 노인과 이야기 좀 하기로서니, 단장이 무슨 일로 그다지 싫 어할까…….” “글쎄 말이요. 무슨 큰 변이나 난 것처럼 야단이니 이상한 일이예요.” 소년과 소녀는 가늘고 힘없는 소리로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그래요.그까짓 일로 열흘이나 더 할 돈벌이도 중지하고, 오늘로 포막을 헐어서 짐을 싸는 것을 보면 반드시 무슨 큰 까닭이 있는 것이 분명해 …….” 소녀는 근심스런 소리로, “무슨 까닭일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글쎄, 무슨 까닭인지 그건 몰라도 어쨌든지 우리 두 사람과 조선 사람과 만나기만 하면 큰일이 생길 일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 않으냐?그러니까 우 리들의 몸이 이 곡마단에 끼어 있는 것이 위험한 일일 것 같이 생각되는구 나…….” “글쎄요. 점점 마음이 무시무시해져요.” 어쩐지 자기들 어린 몸이 무서운 무서운 비밀을 가진 흉악한 놈들의 손에 쥐여 끌려 다니는 것 같아서,새로운 불안스런 마음이 아버지 그리는 설움 과 함께 그들의 가슴에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지옥 속에 빠진 것같이 무서운 어두운 밤이 차츰차츰 그 집과 그 마음을 덮어 갔습니다.
5. 어두운 밤에
자기가 조선 사람이라니 자기 고향이 경성이라니 어두운 밤에라도 경성 시 가를 나가 보고도 싶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몰래 나가서,아무 집에나 조선집이면 뛰어 들어가서 살려 달라 하고 실컷 울어보고도 싶었습니다. 아 아 그러나, 그러나 이 밤만 자면 경성도 영 이별인데 원수의 밤은 점점 깊 어만 갔습니다. 조선말도 모르는 어린 두 몸이 조선에 떨어져서 죽든지 살든지……. 이 밤 에 도망이라도 해나갈까 하였으나. 순자는 단장의 마누라 방에 갇혀 자고 여관 대문 옆방에서는 단장의 부하가 독수리 같은 눈으로 지키고 있으니 아 무렇게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하는 수 없이 전등을 가리고 상호는 자리에 누웠습니다. 눈을 감고 바른 팔목으로 눈 위를 덮었습니다. 그러나 잠은 오 지 않고 가슴 속은 방망이질을 치듯 펄떡펄떡 뛰었습니다.날만 밝으면 경성도 마지막이요, 부모의 소식도 영영 모르게 되는 판이니, 어쩐들 편안한 잠이 들 수 있었겠습니까.시계 소리가 들릴수록 밤이 깊어 갈수록 눈은 점점 더 샛별 같아지고, 가슴은 더욱 더욱 뛰었습니다. 밤!깊은 밤!개도 자고 한길도 자고 전등까지 지붕까지 잠자는 깊디 깊은 밤!세상은 무덤 속같이 고요한데, 여관 집 뒤꼍 변소 옆 오동나무 밑에 무 언지 가끔 가끔 꾸물꾸물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날이 흐렸는지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 우중충한 어둠 속에서 이 따금 꾸물거리는 이상한 그림자!그것은 이 밤에 담을 뛰어 도망하려고 몸 을 빠져 나온 용 소년(勇少年) 상호였습니다. 지금에라도 누군가 쫓아 나오는 듯 나오는 듯하여서 상호의 몸은 바르르 떨리건마는,웬일인지 담을 얼른 넘어가지도 않고 꾸물꾸물하고만 섰습니 다. “이 애가 왜 입때 안 나오나?잠이 들었을 리가 없는데…….” 상호는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들키기 전에 얼른 나와야 할 터인데…….” 하도 무섭고 갑갑하여 상호는 또 중얼거렸습니다. 그때 부지직부지직 여관 마루에 사람의 발소리가 들렀습니다. 상호는 음칫하여 변소 벽에 바싹 붙어 섰습니다. ‘누구일까?순자인가?딴 놈인가?’ 눈치를 채이려 고개를 내어 밀고는 싶고 내어 밀면 들킬까 겁도 나고 상호 의 가슴은 폭포물처럼 용솟음쳤습니다. 발소리는 순자인지 누구인지 변소 쪽으로 자꾸 가까이 왔습니다.누굴까 누굴까 상호의 가슴은 점점 더 뛰었습니다. 어둠 속이라 자세히 보이지는 않으나 변소로 오는 사람은 변소에는 들어가 지 않고 변소 옆을 쑥 내다보았습니다. 옳다, 순자다!하고 상호는 얼굴을 쑥 내어 밀었습니다. ‘여기다!여기 있다!’ 소리가 목구멍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나 언뜻!상호는 꿀꺽 참았습니다. 순자인지?누구인지?그는 다시 태 연히 변소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아니구나!딴 사람이구나!” 상호는 잠깐 마음을 놓았으나, 그러나 여기 있다가 그 사람에게 들키면 어 쩌나 싶어서 가슴이 다시 두근두근 하였습니다.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널빤지 하나 격해 있는 변소 안에 들리면 어쩌나 싶어서 상호는 발 발 떨었습니다.그러나 그는 소변을 보았는지 대변을 보았는지 변소에서 나 왔습니다. ‘이놈아!’ 하고, 와락 달려들 것 같아서 상호는 전신을 움찔하였으나, 그 사람은 거기 상호가 있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태연히 걸어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휴우!” 상호는 새로 살아난 듯이 숨을 들여 쉬었습니다. 다시 한동안 고요하였습 니다. 변소에 나왔다가 들어간 사람도 지금쯤은 다시 고단한 꿈이 깊이 들 었을 때였습니다. ‘이 애가 어째 안 나오나?’ 상호의 가슴은 조 비비듯 하였습니다. 다시 한동안 고요한 어둠 속에서 가 늘게 가늘게 사뿐사뿐 몰래 기어 나오는 듯싶은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인제 나오는구나!’ 하고, 상호는 미리 옷가슴을 여미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옷소매를 걷고 가뜬 히 차리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가슴은 여전히 두방망이질을 쳤습니다. 숨 이 저절로 헐떡거렸습니다. ‘무사히 무사히 저 담을 넘어가야 할 터인데…….’ 사뿐사뿐 발소리가 가까워왔습니다. 그는 자리옷을 입은 채로 기어나오는 모양이었습니다. 변소 옆까지 나왔습니다. “여기다!여기다!이리 오너라.” 상호가 속살거렸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그는 마루에서 사뿐 내려서, 상호 에게로 다가왔습니다. 상호의 가슴은 어찌 뛰는지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 다. “자, 어서 가자!” 상호는 와락 달려들어 그 손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상호는 그 손을 잡자마 자 깜짝 놀라, “악!” 미친 사람처럼 소리쳤습니다. ─《어린이》 4권 5호 (1926년 5월호)
6.도망!도망!깊은 밤 도망을 해 나가려고, 뒷간 뒤에 숨어 서서 순자의 나오기를 기다 리던 상호가 그때 몰래 기어 나온 것이 그인 줄 알고 달려들어 보니 큰일 났습니다.천만 천만 뜻밖에 그는 순자가 아니고 단장의 마누라였습니다. 깜짝 놀란 상호 소년이 저절로, “악!” 하고, 소리칠 때 벌써 그 계집은 놓치지 아니하려고 독사같이 상호의 팔과 몸에 휘감았습니다. 그리고 안쪽을 향하여 잡았다는 소리를 지르려 하였습 니다. “큰일 났다!” 생각한 상호는 앞뒷일을 헤아려 볼 사이도 없이 급히 바른손으로 계집의 입을 틀어막으면서 목을 졸라 껴안았습니다. 나이는 어려도 몸 굴린 몸이라 여자 한 사람쯤은 우스웠습니다.그 무서운 독사 같은 계집도 상호의 손에 걸리어 숨이 막히고 목이 졸리어 죽을 둥 살 둥 끼룩끼룩하면서 두 다리를 버둥버둥할 때,그때에 안마루가 쿵쾅거리면서 시커먼 큰 사람이 또 뛰어 나왔습니다. “이러다간 안 되겠다!!” 생각한 상호는 “엥!” 하고, 소리치면서 계집의 몸을 와락 밀어서 쫓아 나오는 놈에게로 던지니, 나오던 놈은 별안간에 계집의 몸을 받아 안고 쓰러지고,그 틈에 번뜻 상호 는 그네에서 건너뛰는 곡마단 솜씨로 제비같이 날려서 휘딱 뒷담을 뛰어넘 었습니다.쫓아 나오다가 쓰러진 단장이 마누라의 몸을 잡아 일으켜 놓고 뒷담을 넘 어서 한길로 나가 휘휘 찾을 때는 벌써 상호는 어디로 갔는지 그림자도 없 었습니다.여관 안은 벌컥 뒤집혔습니다. 단장의 명령으로 부하들은 졸린 눈을 비비 면서 옷들을 입고 나섰습니다. 단장 내외는 순자를 두들기면서, “어디로 도망갈 약속이었느냐.” 고,그것을 대라고 조련질을 하고, 여러 명의 부하는 이 골목 저 골목을 분 담해 맡아 가지고, 일제히 상호를 잡으러 나섰습니다.
7. 거리에서 울면서 한길도 잠자고 순포막 순사도 코를 고는 깊은 밤, 캄캄한 밤 새로 두시-.홀로 도망해 나왔으나 어디라고 향할 곳이 없는 상호는 어디로 가서 어떻게 숨어야 할지 가슴만 울렁거리고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뒤에서는 지금 곧 잡으려고 쫓아오는 듯 오는 듯하고 갈 곳은 없고, 발 빠 른 걸음으로 뒤를 돌아다보고 돌아다보고 하면서,명동으로 빠져서 구리개 를 건너고 종로 큰길을 지나 북쪽으로 뚫린 길까지 오니까,마음이 조금 놓 이고 울렁거리는 가슴이 진정되는 대신에 서러워서 울고 싶은 생각이 자꾸 났습니다.잡히지 아니하려고 남쪽에서 북쪽을 향하여 길도 모르는 조선 사람 동네를 찾아 건너오기는 왔으나 내 몸이 조선 사람이라고 알아줄 사람이 누구며,오늘 밤 한 밤이라도 내 몸을 재워줄 사람이 누구랴 싶어서, 골목 모퉁이에 서마다 망설거릴 때 하염없는 눈물만 비 오듯이 흘렀습니다.길이야 많지만 갈 곳이 없고 집이야 많지만 잘 곳이 없어서 상호는 눈물을 씻으면서 오던 길을 도록 돌아설 밖에 수가 없었습니다. 밤은 세시나 되었을까,이제는 술주정꾼 하나도 보이지 않는 죽은 길을 걸 어서 상호는 종로 큰길로 나왔습니다.하는 수 없으니 탑골공원에라도 가서 돌멩이 위에서라도 이 밤을 지내려는 불쌍하고도 가여운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밤이 몹시도 깊은지라 공원의 창살문도 꼭꼭 잠겨 있었습니다. 여기 서나 잘까 하고 믿고 온 몸이, ‘여기도 잠겼구나…….’ 하고, 돌아설 때 신세 불쌍한 상호는 그냥 소리쳐 울고 싶었습니다. 음흉한 단장 놈이 벌써 수색 청원을 하여 놓았겠으니 경찰서로 갈 수도 없고, 아무 데나 여관으로 가자하니 문 열린 곳이 한 곳도 없고, 에잇!할 수 없다. 길거리에서 그냥 밤을 새울 수밖에 없다고 결심을 하니, 이제는 잘 걱정은 없어졌으나 순자의 고생될 염려가 생각이 나서 또 가슴을 괴롭게 하였습니 다.같이 도망하려고 새벽 두 시에 변소 옆으로 나오마고 약속한 순자가 그 때 나오지 못하고 단장의 마누라가 나온 것을 보면,순자가 나오려다가 들 켜서 붙잡힌 것이 분명하였고 내가 이렇게 혼자 도망해 나와 놓았으니, 그 놈의 마귀 같은 연놈이 온갖 분풀이를 어린 순자에게만 하겠구나……. 더군 다나 나를 잡으려고 내가 도망간 곳을 알아내려고, 무지스럽게 두들기겠구 나 싶어서 자기가 맞은 것처럼 소름이 쪽쪽 끼쳤습니다.가뜩이나 꼬집혀서 전신에 퍼렇게 멍이 들은 순자가 못 견디어 소리쳐 면 서 매 맞는 모양이 눈물 고인 눈에 자꾸 보였습니다. “오오, 오늘 밤만 참아라, 어떻게든지 내일은 구해 내마!” 상호는 혼자 중얼거리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8. 뜻밖에 뜻밖에
거리에서 헤매인 눈물의 하룻밤이 어느덧 밝아서 새벽이 되었습니다. 설움 과 불안에 떨면서 거리에서 밤을 새인 상호는 그때야 탑골공원 뒤 조선여관 을 찾아 들어갔습니다.여관이라고 들어는 갔으나, 별루 쉬지도 못하고 세 수를 속히 마치고 조반상을 받으니 혀도 깔깔하거니와 마음이 조용치 못하 여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세 술도 못 뜨고 밥상을 도로 내보내고 방문을 꼭꼭 닫고 상호는 거울 앞 에 앉더니 얼굴을 변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눈 가장자리에는 푸른 칠을 하고,코 밑에 조그만 수염을 붙이고(이러한 일은 곡마단에서 날마다 하는 짓이서, 아주 졸업생이었습니다) 모자를 눌러 쓰고, 다시 여관문을 나설 때는,여관 하인이 보고도 아까 처음 들어오던 손님인 줄 알지 못하였습니다. 상호는 여관에서 나오는 길로 곧 상점을 찾아가서 뿔테 안경을 아무 것이 나 손에 집히는 대로 사서 쓰고 또 지팡이 하나를 사서 짚었습니다.이제는 아무가 보아도 얼른 보고는 상호인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는 대담스럽게도 구리개 네거리 명치정의 포막집 터 근처로 갔습니다.포막 집은 물론 다 헐어서 짐짝으로 묶어 놓았으니, 저놈들이 오늘 아침에 서울 을 떠나고 안 떠나는 것은 여기서 짐짝을 가져가고 안 가져가는 것을 보면 알리라 생각한 까닭이요,또 한 가지는 혹시 저들이 떠날 때에 순자를 데리 고 이곳을 들러 가기도 쉽거니, 하는 까닭이었습니다. 아직 8시도 전이건마는 포막집 헐은 터에는 곡마단 밑의 측,여러 사람이 꾸물꾸물 묶다가 남은 짐을 묶고 있는 모양이 오늘 곧 떠나는 것 같기도 하 고 어떻게 보면 그리 바쁘지 않은 것도 같았습니다. 상호는 그것들이 모두 아는 사람들이라,저것은 누구, 저것은 누구, 속으 로 부르면서, ‘저 사람들도 나를 보고 알지 못할 것이다.’ 하고 그 근처로 어슬어슬 돌아다니면서 순자가 그곳에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서성거린 지 한 시간쯤이나 지났을까?너무 지리하여 입맛만 쩝쩝 다시면서 왔다 갔다 하고 있을 때, 그때 언뜻 상호는 발을 멈추고 허리를 굽히고 눈을 노려 포막집 터 저편 골목 구석을 쏘아보았습니다. ‘오오!그 노인이다. 그 노인이다!’ 입 속으로 부르짖으면서 상호는 급히 골목을 돌아 그리로 갔습니다. 옷은 깨끗지 못하여도 인자하고 다정해 보이는 조선 노인!오오, 분명히 꿈에라 도 만나고저 하던 외삼촌 그 노인이었습니다. 반가운 김에 와락 달려들어 노인의 팔을 붙잡고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하였 으나 조선말을 하지 못하는 갑갑한 설움!아무 말 없이 얼굴만 쳐다볼 때에 눈물만 두 눈에 핑 고였습니다. 노인은 상호와 순자를 다시 한 번 잠깐이라도 만나려고 여기까지 오기는 왔으나,그놈의 주인 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이 구석에 숨어 서서 기다리 는 판에 누구인지 팔을 붙잡으므로 깜짝 놀라 가슴이 성큼하였습니다.그러 나 그가 상호인 줄은 모르고 누구인지를 몰라 겁만 내었으나,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고 겁나던 것만은 안심이 되었습니다.그래 노인은 함께 데리고 온 열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학생 한 사람을 불 러서 사이에 세웠습니다. 그 학생은 노인이 통역시키려고 데리고 온 노인의 동네집의 학생이었습니다. “당신이 누구요?” “제가 상호올시다. 수염은 일부러 붙인 것입니다. 저놈들을 속이려고 요.” “오오, 그럼 여기 섰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서 이야기하자!순자는 어디 있니?” “아녀요. 멀리 가면 안 됩니다. 순자가 혹시 이 근처에 올런지 모르니 까 요. 여기서 이렇게 숨어 서서 이야기를 하지요.” 하고,상호는 어저께 들켜서 매 맞은 이야기와 여관방에 갇히게 된 것과 주 인 단장이 열흘이나 더 할 돈벌이를 중지하고 오늘 중국으로 가려고 저렇게 짐을 싼 이야기와 어젯밤에 둘이 도망하려다가 들켜서,저 혼자만 간신히 도망해 나온 이야기를 모조리 하였습니다. 노인은 눈물이 글썽글썽하여, “아, 그럼 순자를 구할 일이 급하구나!인제 순자만 구해 내 오면 그만 아니냐?여기서 기다리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여관으로라도 가서 속히 구 해 내올 도리를 생각하자.” “글쎄요, 아무리 생각해도 별 꾀가 없습니다. 하도 엄중히 지키고 있으니 까요.” 암만 이야기해도 좋은 의견은 나오지 않고 가슴만 무엇에 쫓기는 것 같이 두근거렸습니다.“그럴 것 없이 다른 사람이 손님처럼 꾸미고 우선 그 여관에 들어가서 방 을 하나 잡고 있으면서 순자의 동정을 살펴보게 하면 어떻겠느냐?그러다가 여차하면 얼른 업고 도망해 나오게.” 이런 말씀을 할 때, 상호는 별안간에 노인의 팔을 꽉 붙잡고, “쉬!” 하고, 말을 막았습니다. 그리고는 큰일이나 난 듯이, “저기, 저기!” 하고, 가는 소리로 속살거리면서 포막 터 건너 한길을 가리켰습니다. 노인 과 학생도 그곳을 바라보고 눈이 둥그레졌습니다. -《어린이》4권 6호 (1926년 6월호).
9. 힘으로보다 꾀로 명동 어귀 곡마단 포막집 헌 터의 뒷모퉁이에서 변복한 상호와 외삼촌과 통역 학생 세 사람이 순자를 구하러 가려는 의논을 하고 섰다가 상호의, “쉿!” 하는 소리에 말을 그치고, “저기, 저기!” 하는 곳을 바라본즉, 과연 거기에 순자가 지옥에 갔었던 듯싶은 순자가 걸 어오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혼자서 걸어오는 것이 아니고,그 무서운 마귀 같은 단장과 독사 같은 마누라와 그리고 그 부하들과 함께 가운데 서서 걸어오는 것 이었습니 다. 아아, 그 파리하고 생기 없는 얼굴,물에 젖은 솜같이 축 늘어진 두 어깨, 죽지 못해 끌려오는 걸음걸이, 얼마나 두들겨 맞았으면 저렇게 되었을까 싶 어서 벌써 상호의 가슴은 뻐개지는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저놈들의 손에서 순자를 구해 내 올까?’ 아픈 가슴이 새삼스레 뛰놀기 시작하는데, 그들 일행은 어느덧 곡마단 터 까지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짐을 묶고 있던 놈들이 일일이 단장에게 인사를 하고는,다시 부지런히 묶고 있고, 단장은 묶어놓은 짐의 수효를 헤이고 있 었습니다. “이놈들아, 얼른 묶어야 오늘 밤차에 늦지 않지…….” 다 헤이고 나서, 단장은 호령했습니다. “염려 마셔요. 짐은 시간 안에 넉넉히 다 묶어 놓을 테니요. 달아난 놈을 찾기나 했나요?” “고놈의 새끼 어디를 갔는지 영영 알 수 없는걸. 그래도 경찰의 손에는 저녁 안으로 잡히겠지…….” “찾지 못하면 그냥 내버려두고 가나요?” “어떻게든지 찾아 가지고 가야지. 고놈이 없으면 당장에 못하게 될 것이 많으니까.” 그놈 그놈 하고 찾지 못해 하는 말은,지금 여기 변복하고 섰는 상호를 가 리켜 하는 말이었습니다. 이야기 눈치로 보면, 분명히 오늘 밤차로 중국으로 갈 모양인데, 상호를 찾지 못해서 안타깝게 구는 모양이었습니다.“아저씨, 저놈들이 오늘 밤차로 중국으로 갈 모양입니다.” “으응, 오늘 밤차로?그럼 어서 순자를 놓치지 말고 구해 내야지.” “글쎄올시다. 어떻게든지 오늘 저녁 안으로 빼앗아 와야 할 텐데요.” 몸이 달 듯하여 손에 땀을 흘리면서,상호와 외삼촌은 안타까워하나, 그러 나 순자가 지금 자기들 눈앞에 섰건마는 구하기는커녕 인사도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아아, 저편은 수십 명이나 되는 떼를 가졌는데, 이 편이라고는 말도 못 통 하는 육십 노인 한 분과 십육 세의 상호 한 사람뿐이니, 너무도 나무도 야 속한 대적이었습니다.“암만해도 힘으로는 당할 수 없으니까 꾀로 구해야 한다. 꾀로 해야지 별 수가 없다.” 상호는 급히 수첩을 꺼내서 종이 한 장을 떼어 연필로 무언지 급급히 써서 꼭꼭 조그맣게 접더니 외삼촌이 데리고 온 통역 학생 기호의 귀에 대고 소 근소근 하였습니다.
10. 자전거로 충돌 점심때가 가까워서 곡마단 터의 짐 묶기가 대강 끝나는 것을 보고, 단장 내외의 일행은 순자를 데린 채로 산보하듯 진고개로 걸어갔습니다.몹시 번 화하나 좁다랗기 짝이 없는 길로 가면서 일행들은 서울 구경도 오늘이 마지 막인 것을 섭섭해 하는 듯이 이쪽 가게 저쪽 상점을 번갈아 보며 지껄이면 서 걷기 싫은 걸음을 걷듯 하였습니다.그러나 그 중에도 순자만은 고개를 숙인 채로 땅만 내려다보면서 힘없는 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놓을 뿐이었습니다.오빠는 지금 어디로 가서 어떻게 있는지 다시 만나지도 못하고 나 혼자 이 밤에 중국으로 끌려가면 어떻게 하나 생각할 때에는 그만 길가에서라도 소 리쳐 울고 싶도록 마음이 서러워서 울음을 억지로 참아도 걸음마다 눈물이 쏟아져 흘렀습니다.그때였습니다. 일행이 명동 네거리를 지날 때, 돌연히 뒤에서 자전거 한 대가 따르릉 따르릉 방울을 울리면서 오므로 일행은 이리저리 비켜섰습니 다.얼른 좌우 옆으로 비켜 가운데 길을 틔어 주었건마는, 자전거 탄 어린 학 생은 자전거를 처음 타는 사람처럼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더니,일행 중 한 사람과 맞부딪치고 쓰러졌습니다. 자전거에 부딪혀 쓰러진 사람은 순자였습니다. 자전거 탄 채 쓰러졌던 학 생은 냉큼 일어나서 일본말로 ‘스미마셍 도모 스미마셍’하면서,쓰러진 순자를 붙들어 일으키고, 모자를 벗어 들고 자꾸 미안한 절을 하였습니다. 앞에 가던 단장이 우뚝 서서, “이놈아, 왜 탈 줄도 모르는 자전거를 타고, 남을 다친단 말이냐!이 나 쁜 놈아!” 하고, 따질 듯이 달려들었습니다. 학생은 두어 번 머리를 굽실굽실 숙이고 는 제비같이 얼른 자전거에 올라앉아서, 아까와는 딴판으로 총알 같이 달아 났습니다. ‘흥, 저렇게 잘 타는 놈이 왜 사람을 치었어…….’ 일행들은 닭 쫓던 개 모양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한참이나 섰었습니다. 쓰러졌다가 일어난 순자의 손에는 조그만 종이쪽지가 쥐어 있었습니다. 아 까 자전거 타고 와서,일부러 순자를 치어 쓰러뜨린 학생이, 순자의 손을 잡아 일으킬 때에 그 손에 쥐어 주고 간 것입니다. ‘무얼까?’ 하는, 궁금한 생각으로 순자의 가슴은 이상하게 두근거렸습니다. ‘혹시 오빠에게서…….’ 하고 생각할 때, 순자는 더 참을 수 없어서 위험한 것을 무릅쓰고 걸어가면 서 넌지시 그 접고 또 접은 종이를 펴 보았습니다. 펴 보니, 연필로 홱홱 갈겨쓴 글씨…….
순자야, 오늘 저녁 안으로 어떻게든지 틈을 타 나와서 중학동 354번지로 찾아오너라. 거기서 온종일 기다리마. 거기는 외삼촌이 계신 집이다. 상호. 분명히 오빠의 글씨다!오빠의 글씨다!오!오빠는 무사히 있는 것이 분명 하다, 그리고 단 혼자 외롭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오빠를 위하여 도와주는 사람이 많이 있나 보다.그러니 아까 자전거 타고 왔던 학생도 그런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 생각할 때 순자는 살아난 것 같이 기뻐 날뛰었습니다. 그리고 기 회만 엿보았습니다. —《어린이》4권7호(1926년 7월호).
11. ○○동 354 점심때도 지나고 벌써 오후 네 시!짐을 꾸리기에 분주한 여관방 한 구석 에서 순자는 이제껏 빠져나갈 틈을 타지 못하고 가슴만 바작바작 졸이고 있 었습니다. 처음 듣는 동네 이름이라 잊어버릴까 보아 겁도 나고,또 찾아갈 적에 조 선 사람에게 물어보려면 말을 모르니까 적은 것을 보이고 물어야겠으므로,오빠가 써 보낸 것은 찢지도 아니하고 몸에 지니고 펴 보고 펴 보고 하면서 똑딱똑딱 지나가는 시계 소리에 가슴만 졸이고 앉았습니다.변소에 간다고 핑계를 하자니 변소는 뒤꼍에 있고, 앞으로 나가자 하니 한 걸음만 움직여도 어디를 가느냐고 앞을 막고……, 오빠와 외삼촌은 눈이 빠 지게 기다리고 계실 터인데, 이러고 있다가 나만 중국으로 끌려가겠구나 싶 어서 바작바작 타는 속에서도 더운 눈물이 옷자락에 뚝뚝 떨어졌습니다. “무어냐?너 손에 들고 들여다보는 것이……. 어디 보자!” 아까부터 순자가 이상한 종잇조각을 가진 것을 눈치 채고 눈여겨보고 있던 단장 마누라가 와락 달려들어 순자의 주먹 쥔 손을 급히 펴고 종이 끝을 쥐 었습니다.‘이것을 들켰으면 큰일 났구나.’ 생각하고 순자는 깜짝 놀라 손을 뿌리쳤으나, 일은 이미 늦었습니다.종이 의 3분의 1밖에는 손에 남아 있지 않고 3분의 2가 단장 마누라의 손으로 찢 겨 갔습니다. 찢어진 종이를 읽은 단장 마누라는, “알았다, 그놈 있는 곳을 알았다!” 하고, 소리쳤습니다. 단장이며 여러 부하들이 우루루 몰려들어서 쪽지를 읽 었습니다. 그러나 위 도막이 찢어져서 무슨 동네라는 동네 이름이 없고 354 라고 밖에 없으므로,위 도막을 찾으려고 순자에게 덤벼들었습니다. 그러나 순자는 벌써 그 위 도막을 입으로 씹어서 목구멍으로 삼켜 넘겨버 린 후였습니다. “종이는 없더라도 너는 동네 이름을 알 것이니까, 대라 대!요년아, 안 댈 테냐?안 댈 테냐?” 단장의 그 무서운 손이 발발 떨고 있는 뺨을 후려 갈겼습니다. 그러나 순 자의 입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요년!” 소리가 나자마자 단장의 발이 순자의 목과 어깨를 얼러 질렀습니다. 내여 던져 바수어지는 세간그릇같이 한숨에 죽는 것처럼 순자는 그냥 캑 하고 쓰 러지더니, 숨소리도 없었습니다.“그래도 입을 안벌리지, 그래도.” 말채찍 같은 것으로 후려갈기니 그 끝이 새빨간 다리에 휘감겼다가는 풀어 지고, 휘감겼다가는 풀어지고 하였습니다. 창자를 찢는 듯싶게,“아이그머니, 아야머니.” 하고 우는 소리가 사람들의 귀를 찢었습니다. 벌써 그의 다리에서나 뺨에서 는 피가 맺혔던 것이 뚝뚝 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도 요년이 안대!어디 견뎌 봐라.” 단장 마누라가 달려들어 옷을 벗겼습니다. 그러고는, 그 부드러운 비둘기 같은 몸을 채찍으로 갈기고 갈기고 하였습니다.몹시도 아픈지라 순자는 대 굴대굴 구르면서 소리쳐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 울음소리를 들어줄 사람이 누구였겠습니까?맞고 맞고 맞다 맞 다 못하여, 순자는 그냥 까무러쳐 죽었습니다.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얼굴은 해골같이 파래지고 이를 악물고 사지가 뻣뻣하여 그냥 죽었습니다.까무러쳐 죽은 것을 보고야 연놈들은 깜짝 놀라서 찬물을 떠다 얼굴에 뿜는 다 사지를 주물러 준다 야단법석이었습니다
12. 계교!계교!
불쌍한 순자가 간신히 눈을 뜨고 다시 숨을 쉬기는 그 후 한참이나 지난 때였습니다.우선 죽지 않고 살아난 것만 다행하여 연놈들은 기뻐하면서 그 피 흐르는 몸에 옷을 입혀서 자리 위에 뉘었습니다.좀 쉬게 해 놓고 기운 을 차리게 한 후에 또 물어 볼 작정이었습니다.그런데 그때 여관 문으로 급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쿵쿵거리고 뛰어 들어 와서 단장의 방으로 들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곡마단에 데리고 다니 는 키 작은 난쟁이였습니다.“저 단장님. 얼른 쫓아오세요. 지금 고놈 달아난 놈. 고놈이 곡마단 지었 던 터 뒤에 이층집 여관이 있지요?그리로 웬 조선 영감쟁이하고 들어가는 것을 보고 왔어요.” “응?정말이냐?” 단장과 일동은 벌떡 일어섰습니다. “정말이어요. 지금 막 들어갔습니다.” “자, 그럼 다 가자. 여럿이 가서 도망 못 가게 그 여관을 뺑 둘러싸라!” 비밀히 숨은 집을 알고 그를 잡으려고 단장과 그 여관에 있던 부하들은 우 르르 따라서 나갔습니다.별안간에 빈 집같이 조용해진 여관 안에는 단장 마누라 하나만이 남아 있 어서 순자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이고, 고놈의 자식을 이제야 잡게 되어서 시원하다. 잡혀 오거든 내가 먼저 그때 그 원수 먼저 갚아야지…….” 혼자 중얼거리고 있을 때, 그때 어디서 어떻게 들어왔는지, 새까만 양복을 입은 남자 한 사람이 자기 앞에 나타났습니다. “어머나, 이게 누구야?” 하고 쳐다보니까, 이런, 그것이 거기 서있는 코에 수염은 붙였을 망정, 분 명히 분명히 상호였습니다. “사람 살리우!” 소리를 지르려고 하였으나, 틀렸습니다. 어느 틈에 상호는 그의 입을 수건 으로 막아 뒤로 매놓고 미리 준비해 가졌던 끈으로 두 팔까지 뒤로 젖혀서, 결박을 하여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천천히 순자를 일으켰습니다. “나다. 나야. 상호다!” 하는 소리에 순자는 벌떡 뛰어 일어났습니다. “어서 가자!그놈들이 오기 전에.” 상호가 순자를 데리고 여관 문 밖을 나아가서 골목을 돌아서니까 거기에는 벌써 아까 자전거 타고 종이를 전하던 학생이 인력거 두 채를 준비해 놓고,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순자와 상호가 인력거에 올라타자 학생은 자전거를 타고 앞에 서서 인력거를 안내하면서 북쪽으로 몰아갔습니다. ─《어린이》4권8호 (1926년8ㆍ9월호). 13. 경찰서 힘으로
기묘한 꾀로 순자를 구해 가지고 북쪽으로 도망해 간 상호의 일행이 북촌 중학동 354번지 조선집 조선방에 앉아서 급하던 숨을 내어 쉴 때쯤 하여,저편에서는 난쟁이에게 속아서 명동 어귀의 여관까지 쫓아가 허탕을 친 단 장과 그 부하들이 하도 분하여, 난쟁이를 잡아 묶어서 추켜들고,씨근씨근 하면서 도로 자기네 여관으로 돌아왔습니다. 와 보니, 단장의 마누라는 묶이어 쓰러져 있고 순자는 간 곳이 없는지라, 그들은 너무도 뜻밖에 일에 눈 뒤집힐 지경이었습니다.“그러면 우리가 고놈의 계교에 빠졌구나.” 생각할 때, 단장은 얼굴이 찢어질 것같이 노하였습니다.“당신들이 막 나가자마자 어데 숨어 있다가 뛰어 나왔는지 별안간에 상호 란 놈이 와락 달려들더니,나를 그렇게 소리도 못 지르게 입까지 막아 묶어 놓고 순자를 일으켜 업고 나갑디다그려.” “이렇게 야단이 났는데 여관 주인은 모르고 있었담?” “알기는 어떻게 아오?감쪽같이 해서 시치미 딱 떼고 업고 나간 것을 …….” “요놈의 자식!”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단장은 와락 달려들어 난쟁이의 그 큰 머리를 으스 러지게 후려갈겼습니다. “네가 고놈의 부하 노릇을 하였으니까 그 놈이 있는 집도 알 테니, 대라 대!” 한 번에 맞아죽은 것처럼 폭 엎드려서 숨도 못 쉬던 난쟁이는 간신히 목소 리를 내서, “아니어요, 저도 정말로 알고 그랬어요.제 눈으로 보지는 못했어도 어떤 양복쟁이가 나를 보고 돈 1원을 주면서 가서 단장 보고‘곡마단 터 뒤에 있 는 여관으로 그 놈과 늙은이가 들어갔다’고 그러라고 이르기에,정말인 줄 알고 뛰어와서 그렇게 여쭌 것이어요.” 하고 사실대로 이야기하였습니다. “예끼, 이 미련한 놈의 자식아,” 하고, 단장은 발길로 찼습니다.그러나 그놈이 상호와 달리 연락 없는 것은 확실히 믿었습니다. “자, 그러면, 그놈들이 순자를 떠업고 어디로 간 줄을 알아야 쫓아가 지…….” “글쎄올시다. 어디든지 있는 곳을 알기만 하면야, 그까짓 것들 당장에 가 서 쥐새끼 잡듯 잡아오지요.” “그러나 이 넓은 경성에서 어디로 간 줄 압니까?” 머리를 이리 숙이고 저리 숙이고 하면서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알아낼 도리가 없어서 저희들끼리도 갑갑증이 생겼습니다. “옳지, 옳지, 좋은 수가 있소.” 하고,단장의 마누라가 무릎으로 걸어 나와 앉으므로, 여러 사람은 무슨 꾀 나 난 줄 알고, 일제히 그를 향하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까, 그 쪽지 반쪽이 있지 않소?왜, 그 무슨 354번지라고 쓰인 쪽지 말이어요. 그것을 경찰서에 갖다 주고, 찾아 달라 합시다.” 말을 듣고 나서 단장은 픽 웃었습니다. “나는 무슨 별 꾀라고……. 그까짓 쪽지, 동리 이름이 없이 허청대고 354 번지라고만 씌어있는 것을 경찰서에선들 어떻게 어디 가서 찾누……. 흥!” 하고, 또 코웃음을 쳐버렸습니다. “그래도 경찰서에서는 그런 것이 없이도 찾으려면 찾는데, 그런 것이라도 갖다가 주면 무슨 참고가 되겠지, 설마 못 찾을라구.어쨌든 갖다 주고 자 세한 이야기를 합시다.” 단장 마누라가 억지를 세워서, 기어코 ○동 경찰서에 그 반쪽 쪽지를 갖다 가 주고,그 동안 지난 이야기와 오늘 여자까지 마저 데리고 달아난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였습니다. “옳지. 참 좋은 것을 가져 오셨소. 이것만 있으면 당장에 찾아 드리지 요.” 뜻밖에 경찰서에서는 그 쪽지 반쪽을 대단히 기뻐하였습니다. “동네 이름이 없어도요?” “동네 이름 없이도 곧 잡아 드릴 터이니 염려 말고 가서 기다리시오.” 이렇게 일러서 돌려보내 놓고, 그 경부는, 즉시 종○ 경찰서로 전화를 걸 고,북촌 일대에 어느 동네든지 동네란 동네마다 354번지는 모조리들 들추 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이 부탁을 받은 종○ 경찰서에서는 곧 각처 파출소에 전화를 하여 어느 동 네든지 354번지를 조사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14. 맞닥뜨린 불행
중학동 354번지 외삼촌 댁 안방에서, 지옥에서 극락으로 나온 것같이 마음 을 놓고 있는 순자와 상호는,외삼촌댁 아주머니가(서로 말도 못 통하니까 역시 한기호라는 학생이 통역을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장 속에서 내어준 사진을 보고 있었습니다.사진은 상호와 순자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 박힌 상호의 집 가족사진이었습니다. 상호는 그래도 아버지의 무릎 위에 앉아서,의젓하 게 박혔는데 순자는 걸상에 앉으신 어머니 무릎 위에서 네 활개를 내뻗치고 입을 벌리고, 울면서 박혀 있었습니다. 기억도 없는 부모의 얼굴을 열여섯, 열네 살에 처음 보는 설움!불쌍한 오 누이의 눈에서는 굵다란 눈물이 낙숫물같이 뚝뚝 사진 위에 떨어졌습니다. 그 모양을 보는 외삼촌과 아주머니도 늙으신 눈에 눈물이 고여 넘었습니 다. “원수를 갚아야 한다!원수를 갚아야 한다. 너의 어머니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그러나 너희 아버지를 찾아가야 한다. 중국으로 가셨는지, 미국으로 가셨는지, 도무지 소식을 모르는 외롭게 헤매는 너의 아버지를 찾아야 한 다!너희 아버지도 지금쯤은 차차 늙기를 시작할 텐데……. 너희들 생사도 모르고, 지금 어디서 편히나 계신지. 하루 바삐 너의 아버지를 찾아야 한 다.” 말씀하는 외삼촌 노인도 울음에 떨리는 소리거니와,듣고 있는 두 오뉘의 눈에서는 그대로 눈물이 비 오듯 하였습니다. “오냐. 이 원수는 죽어도 갚고야 죽는다.” 하고, 상호가 속으로 맹세하느라고,비 오듯 하는 눈물에 젖은 입술을 단단 히 깨물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아,바로 그때에 대문을 박차는 소리가 나더니 내다 볼 사이도 없 이 마당 앞에 우뚝우뚝 양복 입은 험상궂은 사람이 세 사람이나 들어섰습니 다. ─《어린이》4권9호 (1926년 10월호).
15. 중국으로 중국으로
캄캄한 밤, 달도 없는 캄캄한 밤을 급행 기차는 지금 자꾸 북쪽으로 북쪽 으로 달아나고 있습니다.곡마단의 여러 일행과 그 일행에게 다시 잡혀 에워싸여 가는 순자를 태워 가지고 이 밤에 경성역을 떠난 이 급행열차는 지금 중국 봉천(奉天)을 향하 여 속력을 다하며 별로 쉬지도 않고,달아나는 중입니다. 자정이 지났는지 안 지났는지 기차는 개성을 지나서‘뛰!’소리로 어둠을 헤치면서 달아나는데, 찻간마다 가득 탄 손님들은 거의 모두가 앉은 채로 고개를 기울이고 코를 골고 있습니다.자정이 넘어서 그런지 차 속에 달린 전등도 아까보다는 몹시 컴컴하여졌습니다. 보기도 싫은 곡마단 사람들에게 에워싸여서,단장 내외의 앞자리에 끼어 앉은 순자는 조 비비는 가슴 속을 누구에게 하소연할 곳이 없어, 타는 불길 같이 쏟아져 나오는 한숨을 ‘후유!’ 쉬면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유리창 밖을 내다보고 내다보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리창 밖은 캄캄한 어둔 세상 으로, 차 안 모양만 거울 속 같이 비치어 보일 뿐이었습니다.순자는 두들겨 맞아 아픈 두 팔을 늘이어 긴 한숨과 함께 기지개를 펴면서 두 눈을 감았습니다. ‘이대로 끌려가서 어떻게 되려노……?’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였습니다. 어저께 낮에 서울 중학동 외삼촌 댁 안방에서 오빠와 함께 어릴 적 사진을 보면서 울던 일까지는 똑똑하게 생각이 나건마는,별안간 경찰서 형사들이 대문을 박차고 우루루 몰려 들어오던 때부터의 일은,암만하여도 나쁜 꿈을 꾸고 그때에 같이 잡혀간 외삼촌과 그 한기호라는 학생은 꿈속 일 같이만 생각되었습니다.그러나 지금 이렇게 자기 몸이 그 무서운 악마들에게 붙들 려 끌려가는 중인 것을 보면, 꿈은 아니고 확실히 사실은 사실이구나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하면,어저께 낮에 형사 세 사람이 마루 끝에 들어 설 때에 오빠는 분명히 높다란 들창으로 얼른 뛰어넘어 갔었는데……, 그 후에 잡히지 아니하고 어디로 피신을 잘 하였는지 달아나다가 잡히지나 아 니하였는지,그리고 자기와 외삼촌 노인과 한기호라는 학생과 세 사람이 형 사들에게 끌려 경찰서로 걸어 갈 때의 울렁거리는 가슴,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리었습니다.자기는 여러 가지 조사를 받고 있다가 잃어버린 물건 이나 찾으러 오는 듯이 내 몸을 찾으러 온 곡마단장의 마누라와 그 부하의 손으로 넘겨 와서 이렇게 중국으로 끌려가지마는 어찌나 되었는지,모든 것 이 궁금하였습니다. 곡마단 단장과 부하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으면, 남의 식구 꾀어냈다는 유 인죄로 감옥에 보낸다 하던데,그 늙으신 외삼촌이 정말 감옥에 갇히셨으면 어떻게 하나, 머리가 센 늙은 몸은 우리 오뉘를 구해 내려고 그렇듯 애를 쓰시다가 결국 감옥에까지 가시게 되는가 생각할 때에 순자는 몸이 떨리고 눈물이 흘렀습니다.오빠의 일 외삼촌의 일을 궁금해 하면서 붙들려 가는 가엾은 몸이 슬픈 생 각 무서운 생각에 가슴을 태우는 동안에 벌써 밤은 새어서 어느 틈에 평양 을 지난 지도 오래고,지금은 조선의 끝 신의주 정거장을 지나서 큰 소리를 지르며 기차는 압록강 철교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아아, 인제는 중국이로구나!” 하고 중얼거리면서, 차창으로 내다보는 순자는 그만 소리를 내어 통곡도 하 고 싶고,양양히 흘러 내려가는 푸른 물결을 내려다볼 때는 그냥 몸을 솟구 쳐 풍덩 빠지고도 싶었습니다.
16. 외로운 활동
중학동 354번지로 형사의 한 떼가 상호와 순자를 잡으려고 달려들 때에, “이래도 잡히고 저래도 잡히기는 일반이다.” 생각하고,높은 들창에 손을 대자마자 곡마단에서 하던 버릇으로 소리도 안 내고 휙 뛰어 넘은 상호는 그 길로 그냥 줄달음질하여 서대문 밖으로 나아 갔습니다.급한 대로 들키지 않으려고 서대문 밖으로 오기까지는 하였으나, 그러나 생후에 처음 와 본 길이라 북으로 가야할지 남으로 가야할지 단 한 걸음도 내디딜 길이 망연하였습니다.도둑질을 한 것도 아니요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요 아무 죄 없는 몸이 곡 마단에서 빠져 나왔다고 이렇게까지 남의 눈을 속여 쫓겨 다니게 되는가 생 각하면,우습기도 하고 신세가 슬프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까닭도 모르는 형사들이 사면 방에서 내 몸을 찾고 있을 것이니 눈물만 흘리고 있 을 수도 없었습니다.서대문 밖 감옥 옆 금화산 중턱 잔디 위에 앉아서 상 호는 온종일 궁리하다 못하여 밑에 있는 일본 사람의 하숙집에 들어가 주인 을 청하고 며칠 동안을 파묻혀 숨어 있기로 하였습니다.그 이튿날이었습니다. 순자와 외삼촌과 그 한기호가 어찌 되었을까, 반드시 잡혀갔을 줄 짐작은 하면서도, 그래도 궁금하고 갑갑해서 못 견뎠습니다.새벽에라도 곧 중학동 집에 들어가 보려고 몇 번이나 모자를 쓰고 나섰으나, 자기를 마저 잡으려 고 밤중에 자로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형사들이 지키고 있을 것이 분명하여 서,나섰다가는 도로 들어서고 도로 들어서고 하였건마는, 그래도 갑갑증이 나서 소식을 알려고 저녁 전깃불이 켜지기를 기다려 전처럼 얼굴에 수염을 붙이고 대담스럽게 중학동 거리를 걸어 들어섰습니다.걸으면서도 이렇게 걸어가다가 들켜서 잡히면 어쩌나 생각을 하니, 외삼촌 댁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가슴은 크게 뛰놀고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모두 형사 같아서 몸이 오싹하였습니다.그러나 다행히 아무 탈 없이 외삼촌댁에까지 당도하였습니다. 웬일인지 일 찍부터 닫혀 있는 대문을 밀어 열고 들어서려 할 때에 갑자기 상호의 가슴 은 성큼하였습니다.혹시 이 대문 안에 형사들이 기다리고 있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난 까 닭이었습니다. 상호는 내밀었던 손을 움츠리고, 열까?말까?멈칫거렸습니다. 그런데, 그 때 천만뜻밖에 뒤에서 와락 달려들어 상호의 바른편 팔을 꽉 붙잡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린이》4권호 10호 (1926년 11월호).
17. 대문 앞에서
중학동 외삼촌 댁 대문 앞에서 동정을 엿보느라고 망설이는 상호에게 뜻밖 에 와락 달겨든 사람!분명히 경찰서의 형사에게 잡힌 것이라고, 상호는 가 슴이 덜컥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형사가 아니고 외삼촌 노인과 한데 잡 혀갔을 통역 학생 한기호였습니다. “오!어떻게 안 잡혀 갔소?” 상호는 반갑고 놀라워서, 크게 소리쳐 물었습니다. “갑시다, 갑시다. 여기 있으면 위험하니, 어디로 얼른 갑시다.” 그는 상호의 손을 잡아끌듯 하면서 나지막한 소리로,“이 근처가 온통 형사 천지요, 빨리 갑시다. 지금 당신을 잡으려고 발끈 뒤집혔으니, 조심해 가야 됩니다.” 하면서, 자기가 먼저 앞서서 급히 걸었습니다.학생의 말은 한 마디 한 마 디가 무거운 쇠방망이로 상호의 가슴을 때리는 것 같았습니다.자기의 몸은 지금 거미줄에 얽힌 것 같아 까딱하면 독수리의 발톱에 새 새끼가 채이듯이 붙잡힐 것을 생각하니, 한 발 한 걸음을 내어 딛기가 무시무시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점점 저 길로 지나가는 사람이 모두 자기를 노려보는 것 같 고, 심지어 여편네 아이들까지 형사의 돈을 먹고 자기의 뒤를 일부러 따라 오는 것 같았습니다. 두근두근!상호는 아무 말도 내지 못하고, 학생의 뒤를 따라 잠자코 걸어 서, 광화문 앞을 지나, 비각 앞 네거리까지 무사히 나왔습니다. “어디로 가면 안전할까?” 네거리까지 나와서 학생이 상호를 돌아다보고, 비로소 입을 열어 물 었습니다. “서대문 밖으로 가지…….” 상호는 서대문밖에 몰랐습니다. “아니, 그리 가면 위험하니 진고개로 갑시다. 그리 가야 안전하겠소.”두 사람은 걸어서 진고개로 올라가며,소근소근 궁금하던 일을 이야기하였습니 다. 상호가 들창으로 뛰어 도망한 후 순자와 학생과 외삼촌 노인은 다 같이 경 찰서로 붙잡혀 갔던 일,그 후로 순자는 곡마단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고 노 인은 검사국으로 넘어가고 학생은 증거가 없어서 놓여나온 일을 상호는 속 이 시원하게 알았습니다.그러나 한 가지 모를 일은 순자가 곡마단의 손으 로 넘어가서 어찌 되었는지 곡마단 일행은 중국으로 갔는지 안 갔는지 그것 이었습니다. “곡마단 패들이 어찌 되었는지 그것을 알아볼 도리가 없을까?” 상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알아보기도 급하지만 섣불리 하다가는 도리어 잡히게 될 것이니, 우리 저 산으로 올라가서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학생의 의견대로 두 사람은 좌우 옆을 흘낏흘낏 눈치 채어 가면서 좁다란 골목만 골라서 남산을 향하고 올라갔습니다. 벌써 순자는 중국 땅에 가 있는 줄은 알지도 못하고…….
18. 이상한 편지
곡마단이 묵던 여관은 곡마단 일행이 떠난 후로 몹시 조용하여졌습니다. 문 옆방에 앉아 있는 주인 내외는 심부름하는 심부름꾼들을 데리고,“그 수선스런 패들이 지금쯤은 중국에 가서 내렸겠다.” “아이고, 그 밤낮 두들겨 맞기만 하던 처녀가 불쌍해 못 보겠어요. 어디 가서든지 그렇게 두들겨 맞기만 하겠지요. ” “그럼, 오죽하면 도망을 하려니 그랬겠니?불쌍한 일도 많지…….” 이런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습니다. 손님들은 각각 볼일 보러 나간 사이라, 여관치고는 제법 한가한 때였습니다. 그때 어떤 말쑥한 청년 이 한 분 들어서더니, 황급히 모자를 벗고, “여기 곡마단 일행…….” 하고, 말을 시작하다가 멈칫거렸습니다. 주인 여자가, “네. 곡마단 단장은 그저께 밤차로 중국으로 간다고 떠났습니다.” 하자, “아니오. 떠난 줄은 압니다.내가 그 곡마단의 사무원이니까요. 그런데, 단장이 이 여관에 잊어버리고 간 것이 평양까지 갔을 때에 생각이 나서, 그 것을 찾아오라 해서, 내가 도로 온 것입니다. ” 주인 여자는 그제야 까닭을 알고, “예, 그러십니까?그럼 올라오셔셔 찾아보십시오마는 방을 그날 곧 소제 를 하여도 아무 것도 없었는걸요.” “예, 무슨 문서인데 남의 눈에 안 띄게 다락 구석에 깊이 두었었다니까, 찾아보면 있겠지요.” “그럼, 올라오셔서 찾아보세요.” 싹싹하고 친절하게 안내하였습니다. 젊은 손님은 따라 들어와서 단장 내외 가 있던 방의 다락 속을 뒤졌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웬일일까?분명히 다락에 넣었었다는데……. 없어졌으면 큰일 날 것인 데……. 응 큰일났군…….” “글쎄요. 없어졌으면 미안합니다.” “혹시 딴 데다가 두고 잊어버렸는지도 모르니, 미안하지만 다다미 밑을 좀 보겠습니다.” 하고 그 젊은 소님은 방바닥에 깔린 다다미를 일일이 들어내고 보았습니다. “있군!예 있습니다. 이것입니다.” 하고, 젊은 손님은 방 한 구석 다다미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납작한 봉투를 집어 들고 기뻐하더니, 부리나케 나가서 구두를 신으며,“실례입니다마는 기차 시간이 바빠서 치워 드리지 못하고 급히 갑니다. 자, 이것을 그 하인에게 주십시오.” 하고, 돈 1원을 내놓고 급급히 나갔습니다.그 젊은 손님이 봉투를 들고 여관 문을 나가 여관 판장 옆을 돌아서자, 거 기서 기다리고 있든 상호가, “어떻게 되었소?” 하고 물으면서 뛰어나왔습니다. “됐어. 됐어!” 하는 그 젊은 손님은, 통역 학생 한기호였습니다. 두 사람은 걸음을 급히 하여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처음에 가서 시치미 딱 떼고 곡마단이……. 하고 우물쭈물하니까 주인 마누라가 먼저 곡마단은 그저께 저녁에 중국으로 갔다고 그럽디다. 그래서 우선 중국으로 간 것은 분명히 알았고,그 다음에 우리가 계획 한대로 나는 곡마단 사람인데, 잊어버린 것이 있어서 평양까지 갔다가 도로 왔다고,그 리고 뛰어 들어가서 다다미를 일일이 들고 조사하니까 이 봉투가 있기에 아 주 잊어버린 것이나 찾은 것처럼 이것이라고 하고 가지고 나왔지…….” 하 고, 한기호는 그 봉투를 꺼내 주었습니다. 상호는 자기가 계획한 대로 들어 맞아 성공한 것을 기뻐하면서 바삐 봉투 편지를 보았습니다.편지는 중국 봉천에 있는 ‘전중여관’ 이라는 일본 여관 주인이 서울 있 는 곡마단 단장에게 보낸 편지였는데, 속을 빼어 보니, 참말 수상스런 일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것은 두 꿰짝을 보내었으니 잘 받아서 처치하고, 어느 때 중국으로 오는 지 이번에…… 꼭 15, 16짜리로 적어도 셋은 가지고 와야 한다.
고,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것 두 꿰짝은 무엇을 가리켜 한 말이고, 15.16짜리 셋은 무슨 소리인지 도 도무지 얼른 짐작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그러나 어쨌든지 이 편지는 잘 가지고 있기로 하고, 오늘밤이라도 곧 중 국으로 갑시다. 아까 이야기한 대로,그럼 내가 가서 내 저금을 찾고 또 다 른 것도 준비해 가지고 오리다. 당신은 서대문 밖 그 여관에 가서 기다리고 계시오.” 하고, 한기호가 먼저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날 밤, 중국 봉천을 향하고 경성역을 떠난 길다란 급행열차가 신촌역을 지날 때에, 남의 눈을 피하는 청년 두 사람이 어둡고 조그만 정거장에서 슬 쩍 올라탔습니다. ─《어린이》4권 11호 (1926년 12월호).
19. 봉천의 깊은 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