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 <광염 소나타> 독자는 이제 내가 쓰려는 이야기를,유럽의 어떤 곳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여도 좋다.혹 은 사십 오십 년 뒤에 조선을 무대로 생겨날 이야기라고 생각하여도 좋다. 다만,이 지구상 의 어떠한 곳에 이러한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있는지도 모르겠다,혹은 있을지도 모 르겠다, 가능성뿐은 있다―---이만치 알아두면 그만이다. 그런지라,내가 여기 쓰려는 이야기의 주인공 되는 백성수(白性洙)를 혹은 알벨트라 생각 하여도 좋을 것이요 짐이라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요 또는 호모(胡某)나 기무라모(木村某) 로 생각하여도 괜찮다. 다만 사람이라 하는 동물을 주인공삼아 가지고 사람의 세상에서 생 겨난 일인 줄만 알면……. 이러한 전제로써, 자 그러면 내 이야기를 시작하자.* “기회(찬스)라 하는 것이 사람을 망하게도 하고 흥하게도 하는 것을 아시오?” “네, 새삼스러이 연구할 문제도 아닐걸요.” “자, 여기 어떤 상점이 있다 합시다.그런데 마침 주인도 없고 사환도 없고 온통 비었을 적 에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던 신사가―---그 신사는 재산도 있고 명망도 있는 점잖은 사람 인데―---그 신사가 빈 상점을 들여다보고 혹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아요?통 비었 으니깐 도적놈이라도 넉넉히 들어갈 게다, 들어가서 훔치면 아무도 모를 테다,집을 왜 이 렇게 비워 둔담…… 이런 생각 끝에 혹은 그 그 뭐랄까 그 돌발적 변태심리로써 조그만 물 건 하나(변변치도 않고 욕심도 안 나는)를 집어서 주머니에 넣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있습니다, 있어요.” 어떤 여름날 저녁이었었다.도회를 떠난 교외 어떤 강변에 두 노인이 앉아서 이런 이야기 를 하고 있었다.그 기회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유명한 음악비평가 K씨였었다. 듣는 사람은 사회 교화자의 모씨였었다. “글쎄 있을까요?” “있어요. 좌우간 있다 가정하고 그러한 경우에는 그 책임은 어디 있습니까?” “동양 속담말에 외밭서는 신끈도 다시 매지 말랬으니 그 신사가 책임을 질까요?” “그래 버리면 그뿐이지만 그 신사는 점잖은 사람으로서 그런 절대적 기묘한 찬스만 아니 더라면 그런 마음은커녕 염도 내지도 않을 사람이라 생각하면 어찌 됩니까?” “……” “말하자면 죄는 ‘기회’에 있는데 ‘기회’라는 무형물은 벌은 할 수가 없으니깐 그 신사를 가 해자로 인정할 수밖에는 지금은 없지요.” “그렇습니다.” “또 한 가지―---사람의 천재라 하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기회’가 없으면 영구히 안 나타나고 마는 일이 있는데,그 ‘기회’란 것이 어떤 사람에게서 그 사람의 ‘천재’와 ‘범죄 본능’을 한꺼번에 끄을어내었다면 우리는 그 ‘기회’를 저주하여야겠습니까 축복하여야겠 습니까?” “글쎄요.” “선생은 백성수라는 사람을 아시오?” “백성수?자, 기억이 없는데요.” “작곡가로서 그―---” “네, 생각납니다.유명한 ‘광염(狂炎) 소나타’의 작가 말씀이지요?” “녜, 그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뭐 발광했단 말이 있었는데―---” “네,지금 ××정신병원에 감금돼 있는데 그 사람의 일대기를 이야기 할게 들으시고 사회 교화자로서의 의견을 말씀해 주십쇼.” * 내가 이제 이야기하려는 백성수의 아버지도 또한 천분 많은 음악가였습니다.나와는 동창 생이었는데 학생시대부터 벌써 그의 천분은 넉넉히 볼 수가 있었습니다.그는 작곡과를 전 공하였는데 때때로 스스로 작곡을 하여서는 밤중에 혼자서 피아노를 두드리고 하여서 우 리들로 하여금 뜻하지 않고 일어나게 하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밤중에 울리어 오는 야성적 선율에 몸을 소스라치고 하였습니다. 그는 야인(野人)이었습니다. 광포스런 야성은 때때로 비위에 틀리면 선생을 두들기기가 예 사이며 우리 학교 근처의 술집이며 모든 상점 주인들은 그에게 매깨나 안 얻어맞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야성은 그의 음악 속에 풍부히 잠겨 있어서 오히려 그 야성적 힘이 그 의 예술을 더 빛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는 그 야성은 다른 곳으로 발전되고 말았습니다. 술!술!무서운 술이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술잔이 그의 입에서 떠 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술을 먹고는 여편네들에게 행패를 하고,경찰서에 구류를 당하 고, 나와서는 또 같은 일을 하고……. 작품?작품이 다 무엇이외까. 술을 먹은 뒤에 취흥에 겨워 때때로 피아노에 앉아서 즉흥으 로 탄주를 하고 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귀기(鬼氣)가 사람을 엄습하는 힘과 야성 (베토 벤 이래로 근대 음악가에서 발견할 수 없던) 그런 보물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 많았지만 우 리들은 각각 제 길 닦기에 바쁜 사람이라 주정꾼의 즉흥악을 일일이 베껴 둔다든가 그런 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그의 장래를 생각하여 때때로 술을 삼가기를 권고하였지만 그런 야인에게 친구 의 권고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술?술은 음악이다!” 하고는 하하하하 웃어 버리고 다시 술집으로 달아나고 합니다.그러한 지 칠팔 년이 지난 뒤에 그는 아주 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술이 안 들어가면 그의 손은 떨렸습니다. 눈에는 눈곱이 꼈습니다. 그리고 술이 들어가면,술이 들어가면 그는 그 광포성을 발휘하였습니다.누구를 물론하고 붙잡고는 입에 술을 부어 넣어 주었습니다.그 러다가는 장소를 불문하고 아무 데나 누워서 잡니다. 사실 아까운 천재였습니다.우리들 새에는 때때로 그의 천분을 생각하고 아깝게 여기는 한 숨이 있었지만 세상에서는 그 ‘장래가 무서운 한 천재’가 있었다는 것은 몰랐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는 그는 어떤 양가의 처녀를 어떻게 관계를 맺어서 애까지 뱄습니다. 그러나 그 애의 출생을 보지 못하고 아깝게도 심장마비로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유복자로 세상에 나온 것이 백성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백성수가 세상에 출생되었다는 풍문만 들었지, 그 애 아버지가 죽은 뒤부터 는 그 애의 소식이며 그 애 어머니의 소식은 일절 몰랐습니다. 아니, 몰랐다는 것보다, 그 집안의 일은 우리의 머리에서 온전히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 삼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십 년이면 산천도 변한다 하는데 삼십 년 새의 변천을 어찌 이루 다 말하겠습니까. 좌우간 그 동안에 나는 내 이름을 닦아 놓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K라 하면 이 나라에서 첫 손 가락을 꼽는 음악비평가가 아닙니까. 견실한 지도적 비평가 K라면 이 나라의 음악계의 권 위이며, 이 나의 한마디는 음악가의 가치를 결정하는 판결문이라 하여도 옳을 만치 되었습 니다. 많은 음악가가 내 손 아래서 자랐으며 많은 음악가가 내 지도로써 이름을 날렸습니 다. * 재작년 이른 봄 어떤 날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조용한 밤중의 몇 시간씩을 ○○예배당에 가서 명상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습 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언덕 위에 홀로 서 있는 집으로서 조용한 밤중에 혼자 앉아 있노라 면 때때로 들보에서 놀라 깬 비둘기의 날개 소리와 간간이 기둥에서 뚝뚝 하는 소리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말하자면 나 같은 괴상한 성미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돈을 주면 서 들어가래도 들어가지 않을 음침한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나 같은 명상을 즐기는 사람에 게는 다른 데서 구하기 힘들도록 온갖 것을 가진 집이었습니다. 외따로고 조용하고 음침하 며 간간이 알지 못할 신비한 소리까지 들리며 멀리서는 때때로 놀란 듯한 기적(汽笛) 소리 도 들리는…… 이것뿐으로도 상당한데, 게다가 이 예배당에는 피아노도 한 대 있었습니다. 예배당에는 오르간은 있을지나 피아노가 있는 곳은 쉽지 않은 것으로서 무슨 흥이나 날 때 에는 피아노에 가서 한 곡조 두드리는 재미도 또한 괜찮았습니다. 그날 밤도 (아마 두시는 지났을걸요) 그 예배당에서 혼자서 눈을 감고 조용한 맛을 즐기고 있노라는데, 갑자기 저편 아래에서 재재 하는 소리가 납디다. 그래서 눈을 번쩍 뜨니까 화 광이 충천하였는데, 내다보니까 언덕 아래 어떤 집이 불이 붙으며 사람들이 왔다갔다 야단 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불붙는 것을 바라보는 맛도 괜찮 은 것이었습니다. 일어서는 불길이며 퍼져 나가는 연기, 불씨의 날아나는 양, 그 가운데 거 뭇거뭇 보이는 기둥, 집의 송장, 재재거리는 사람의 무리,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과연 시도 될지며 음악도 될 것이었습니다. 옛날에 네로가 로마의 불붙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 기는 비파를 들고 노래를 하였다는 것도 음악가의 견지로 보면 그다지 나무랄 것이 아니었 습니다. 나도 그때에 그 불을 보고 차차 흥이 났습니다. ……네로를 본받아서 나도 즉흥으로 한 곡조 두드려 볼까.어렴풋이 이런 생각을 하며 나 는 그 불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갑자기 덜컥덜컥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예배당 문이 열리며 웬 젊은 사람이 하나 낭패한 듯이 뛰어들어왔습니다.그리고 무엇에 놀란 사람같이 두리번두리번 사면을 살피더니 그래도 내가 있는 것은 못 보았는지 저편에 있는 창 안에 가서 숨어 서서 아래서 붙는 불을 내다봅니다. 나도 꼼짝을 못 하였습니다. 좌우간 심상스런 사람은 아니요 방화범이나 도적으로밖에는 인정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그래서 꼼짝을 못 하고 서 있노라니까 그 사람은 한숨을 쉽니 다.그리고 맥없이 두 팔을 늘이고 도로 나가려고 발을 떼려다가 자기 곁에 피아노가 놓인 것을 보더니 교의를 끌어다 놓고 피아노 앞에 주저앉고 말겠지요. 나도 거기는 그만 직업 적 흥미에 끌렸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나 보자 하고 있노라니까 뚜껑을 열더니 한 번 뚱 하고 시험을 해보아요. 그리고 조금 있더니 다시 뚱뚱 하고 시험을 해보겠지요. 이때부터 그의 숨소리가 차차 높아 가기 시작했습니다. 씩씩거리며 몹시 흥분된 사람같이 몸을 떨다가 벼락같이 양 손을 키 위에 갖다가 덮었습니다. 그 다음 순간으로 C샤프 단음 계의 알레그로가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다만 흥미로써 그의 모양을 엿보고 있던 나는 그 알레그로가 울리어 나오는 순간 마음은 끝까지 긴장되고 흥분되었습니다. 그것은 순전한 야성적 음향이었습니다. 음악이라 하기에는 너무 힘있고 무기교(無技巧)이 었습니다. 그러나 음악이 아니라기에는 거기는 너무 괴롭고도 무겁고 힘있는 ‘감정’이 들 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야반의 종소리와도 같이 사람의 마음을 무겁고 음침하게 하는 음향인 동시에 맹수의 부르짖음과 같이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 돋치게 하는 무서운 감정의 발현이었습니다. 아아 그 야성적 힘과 남성적 부르짖음, 그 아래 감추어 있는 침통한 주림 과 아픔, 순박하고도 아무 기교가 없는 그 표현!나는 덜석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그리고 음악가의 본능으로써 뜻하지 않고 주머 니에서 오선지와 연필을 꺼내었습니다.피아노의 울리어 나아가는 소리에 따라서 나의 연 필은 오선지 위에서 뛰놀았습니다.좀 급속도로 시작된 빈곤, 거기 연하여 주림, 꺼져 가는 불꽃과 같은 목숨,그러한 것을 지 나서 한참 연속되는 완서조(緩徐調)의 압축된 감정, 갑자기 튀어져 나오는 광포.거기 연한 쾌미(快味) 홍소(哄笑)―--- 이리하여 주화조(主和調)로서 탄주는 끝이 났습니다.더구나 그 속에 나타나 있는 압축된 감정이며 주림 또는 맹렬한 불길 등이 사람의 마음에 주는 그 처참함이며 광포성은 나로 하여금 아직 ‘문명’이라 하는 것의 은택에 목욕하여 보지 못한 야인(野人)을 연상케 하였습니다. 탄주가 다 끝이 난 뒤에도 나는 정신을 못 차리고 망연히 앉아 있었습니다. 물론 조금이라 도 음악의 소양이 있는 사람일 것 같으면 이제 그 소나타를 음악에 대하여 정통으로 아무 러한 수양도 받지 못한 사람이 다만 자기의 천재적 즉흥뿐으로 탄주한 것임을 알 것입니 다. 해결이 없이 감칠도 화현(減七度和絃)이며 증육도 화현(增六度和絃)을 범벅으로 섞어 놓았으며 금칙(禁則)인 병행 오팔도(竝行五八度)까지 집어넣은 것으로서, 더구나 스케르초 는 온전히 뽑아 먹은, 대담하다면 대담하고 무식하다면 무식하달 수도 있는 방분 자유한 소나타였습니다. 이때에 문득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삼십 년 전에 심장마비로 죽은 백○○였습니다. 그의 음악으로서 만약 정통적 훈련만 뽑고 거기다가 야성을 더 집어넣으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그 음악가의 것과 같은 것이 될 것이었습니다. 귀기가 사람을 엄습하는 듯한 그 힘과 방분 스런 표현과 야성―--- 이것은 근대 음악가에게 구하기 힘든 보물이었습니다. 그 소나타에 취하여 한참 정신이 어리둥절히 앉았던 나는 고즈넉이 일어서서, 그 피아노 앞에 가서 그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습니다. 한 곡조를 타고 나서 아주 곤한 듯이 정신 이 없이 앉아 있던 그는 펄떡 놀라며 일어서서 내 얼굴을 보았습니다. “자네 몇 살 났나?” 나는 그에게 이렇게 첫 말을 물었습니다.가슴이 답답한 나로서는 이런 말밖에는 갑자기 다른 말이 생각 안 났습니다.그는 높은 창에서 들어오는 달빛을 받고 있는 내 얼굴을 한순 간 쳐다보고 머리를 돌이키고 말았습니다. “배고프나?” 나는 두 번째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시끄러운 듯이 벌떡 일어섰습니다.그리고 달빛이 비친 내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다 가, “아, K선생님 아니세요?” 하면서 나를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렇노라고 하니깐, “사진으로는 늘 봤습니다마는…….” 하면서 다시 맥없이 나를 놓으며 머리를 돌렸습니다. 그 순간,그가 머리를 돌이키는 순간 달빛에 얼핏, 나는 그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았습니다.그리고 나는 거기서 뜻밖에 삼십 년 전에 죽은 벗 백○○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자, 자네 이름이 뭐인가?” “백성수…….” “백성수?그 백○○의 아들이 아닌가. 삼십 년 전에, 자네가 나오기 전에 세상 떠난…….” 그는 머리를 번쩍 들었습니다. “네?선생님 어떻게 아세요?” “백○○의 아들인가?같이두 생겼다. 내가 자네의 아버지와 동창이네. 아아, 역시 그 애비 의 아들이다.” 그는 한숨을 길게 쉬며 머리를 수그려 버렸습니다.* 나는 그날 밤 그 백성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그리고 비록 작곡상 온갖 법칙에 는 어그러진다 하나 그만치 힘과 정열과 야성으로 찬 소나타를 거저 버리기가 아까워서 다 시 한번 피아노에 올라앉기를 명하였습니다. 아까 예배당에서 내가 베낀 것은 알레그로가 거의 끝난 곳부터였으므로 그 전 것을 베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피아노를 향하여 앉아서 머리를 기울였습니다. 몇 번 손으로 키를 두드려 보다가는 다시 머리를 기울이고 생각하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섯 번 여섯 번을 다시 하여 보았으 나 아무 효과도 없었습니다. 피아노에서 울려 나오는 음향은 규칙 없고 되지 않은 한낱 소 음(騷音)에 지나지 못하였습니다. 야성?힘?귀기?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감정의 재뿐이 있었습니다. “선생님 잘 안 됩니다.” 그는 부끄러운 듯이 연하여 고개를 기울이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두 시간도 못 되어서 벌써 잊어버린담?” 나는 그를 밀어 놓고 내가 대신하여 피아노 앞에 앉아서 아까 베낀 그 음보를 펴놓았습니 다.그리고 내가 베낀 곳부터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화염!화염!빈곤, 주림, 야성적 힘, 기괴한 감금당한 감정!음보를 보면서 타던 나는 스스로 흥분이 되었습니다.미상불 그때는 내 눈은 미친 사람같이 번득였으며 얼굴은 흥분으로 새 빨갛게 되었을 것이었습니다.즉 그때에 그가 갑자기 달려들더니 나를 떠밀쳐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대신하여 앉았 습니다.의자에서 떨어진 나는 너무 흥분되어 다시 일어날 힘도 없이 그 자리에 앉은 대로 그의 양 을 쳐다보았습니다.그는 나를 밀쳐 버린 다음에 그 음보를 들고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아 그의 얼굴!그의 숨소리가 차차 높아지면서 눈은 미친 사람과 같이 빛을 내기 시작하 였습니다.그러더니 그 음보를 홱 내어던지며 문득 벼락같이 그의 두 손은 피아노 위에 덧 업혔습니다.‘C샤프 단음계’의 광포스런 ‘소나타’는 다시 시작되었습니다.폭풍우같이 또는 무서운 물 결같이 사람으로 하여금 숨막히게 하는 그 힘,그것은 베토벤 이래로 근대 음악가에서 보 지 못하던 광포스런 야성이었습니다.무섭고도 참담스런 주림, 빈곤, 압축된 감정, 거기서 튀어져 나온 맹염(猛炎), 공포,홍소―--- 아아 나는 너무 숨이 답답하여 뜻하지 않고 두 손을 홰홰 내저었습니다.* 그날 밤이 새도록, 그는 흥분이 되어서 자기의 과거를 일일이 다 이야기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