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아침 열시쯤 엘리자베트의 탄 인력거는 서울 성밖에 나섰다. 해는 떴지마는 보스럭비는 보슬보슬 내리붓고 엘리자베트의 맞은편에는 일곱 빛이 영롱한 무지개가 반원형으로 벌리고 있다.비와 인력거의 셀룰로이드창을 꿰어서 어렴풋이 이 무지개를 바라보면서, 엘리자베트는 뜨거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어젯밤에,남작 부인에게 자기 같은 약한 것에게 는 촌이 좋다고 밝히 말하기는 하였지만,그래도 반생 이상을 서울서 지낸 엘리자베트는 자기 둘째 고향을 떠날 때에 마음에 떠나기 설운 생각이 없지 못하였다.뿐만 아니라 서울에 자기 사랑 이환이가 있고 자기에게 끝없이 동정하는 남작 부인이 있지 않으냐, 엘리자베트는 부인의 친절히 준 돈을 만져 보았다.이렇게 서울에게 섭섭한 생각을 가진 엘리자베트는 몸은 차차 서울을 떠나지만 마음은 서 울 하늘에서만 떠돈다.어젯밤에 밤새도록 잠도 안 자고 내일은 꼭 서울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여, 양심이 싫다는 것을 억지로 그렇게 해결까지 한 그도, 막상 서울을 떠나는 지금 에 이르러서는,만약 자기가 말할 용기만 있으면 이제라도 인력거를 돌이켜서 서울로 향하 였으리라 생각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치만 그에게는 그리할 용기가 없었다. 아니,제일 말하 기가 싫었고 인력거꾼에게 웃기우기가 싫었다. 그러는 것보다도, 그는 말은 하고 싶었지 만, 마음속의 어떤 물건이 그것을 막았다. 그는 입술을 악물었다.인력거는 바람에 풍겨서 한편으로 기울어졌다가 이삼 초 뒤에 도로 바로 서서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장마때 바람은 윙!소리를 내면서 인력거 뒤로 달아난다. 엘리자베트의 머리에는, 갑자기 ‘생각날 듯 생각날 듯하면서 채 생각나지 않는 어떤 물건’ 이 떠올랐다. 그는 생각하여 보았다.한참 동안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남작, 그는 가렵고도 가려운 자리를 찾지 못한 때와 같이 안타깝고 속이 타는 고로 살눈썹을 부들부들 떨었다.‘ 남작’이 자기 생각의 원몸에 가까운 것 같고도 채 생각나지 않았다. ‘남작이 고운가 미운가. 때릴까 안을까. 오랠까 쫓을까.’ 그는 한참이나 남작을 두고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탁 눈을 치뜨면서 주먹을 꼭 쥐었다. 이 제야 겨우 그 원몸이 잡혔다. “재판!” 그는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남작을 걸어서 재판하는 것은 엘리자베트에게는 큰 문제에 다름없었다. 남작 부 인에게 얻은 위로금이 재판 비용으로는 넉넉하겠지만,자기를 끝없이 측은히 여기는 부인 에게 남편이 잘못한 일을 알게 하는 것은 엘리자베트에게는 차마 못 할 일이다. 이 일을 알 면 부인은 제 남편을 어찌 생각할까,엘리자베트 자기를 어찌 생각할까. 남작 집안의 어지 러움―--- 엘리자베트는 한숨을 후― 하니 내쉬었다. 그것뿐이냐, 서울에는 자기 사랑 이 환이가 있다.만약 재판을 하면 그 일이 신문에 나겠고, 신문에 나면 이환이가 볼 것이다. 이환이가 이 일을 알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까, 또 몇백 명 동창은 어떻게 생각할까,세상 은 어떻게 생각할까. “재판은 못 하겠다.” 그는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남작의 미운 짓을 볼 때에는, 엘리자베트는 가만 있지 못할 것같이 생각된다.자 기는 남작으로 인하여 모든 바람과 앞길을 잃어버리지 않았느냐. 자기는 남작으로 인하여 바람과 앞길 밖에 사랑과 벗과 모든 즐거움까지 잃어버리지 않았느냐.그런 후에 자기는 남작으로 인하여 서울과는 온전히 떠나지 않으면 안 되지 않게 되었느냐. 이와 같은 남작 을…… 이와 같은 죄인을……. “아무래도 재판은 하여야겠다.” 그는 다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로도 재판을 하여야 할지 안 하여야 할지 똑똑히 해결치를 못하였다.하겠다 할 때에는 갑(甲)이 그것을 막고, 못 하겠다 할 때에는 을(乙)이 금하였다. ‘집에 가서 천천히 생각하자.’ 그는 속이 타는 고로 억지로 이렇게 마음을 먹고 생각의 끝을 다른 데로 옮겼다. 이 생각에서 떠난 그의 머리는 걷잡을 새 없이 빨리 동작하였다. 그의 머리는 남작에서 S,이환, 혜숙, 서울, 오촌모, 죽은 어버이들로 왔다갔다하였다. 한참 이리 생각한 후에 그의 흥분하였던 머리는 좀 내려앉고 몸이 차차 맥이 나면서 그것이 전신에 퍼진 뒤에 머리와 가슴이 무한 상쾌하게 되면서 눈이 자연히 감겼다.수레의 흔들리 는 것이 그에게는 양상 스러웠다. 조을지도 않은 채 깨지도 않고 근덕근덕하면서 한참 갈 때에 우르륵 우뢰 소리가 나므로 그는 눈을 번쩍 떴다.하늘은 전면이 시커멓게 되고 그 새에서는 비의 실이 헬 수 없이 많 이 땅에까지 맞닿았다.비 곁에 또 비 비 밖에 비 비 위에 구름 구름 위에 또 구름이라 형용할 수밖에 없는 이 짓은, 엘리자베트에게 큰 무서움을 주었다. ‘저 무지한 인력거꾼 놈이…….’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사면은 다만 어두움뿐이고 그 큰 길에도 사람 다니는 것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툭툭툭툭 하는 인력거의 비 맞는 소리,물 괸 곳에 비 오는 소리, 외앵 하고 달아나는 장마때 바람 소리, 인력거꾼의 식식거리는 소리, 자기의 두근거리는 가슴 소리-―-- 엘리자베트의 떨림은 더 심하여졌다.그는 떨면서도 조그만 의식을 가지고 구원의 길이 어디 있지나 않은가 하고 셀룰로이드창 을 꿰어서 앞을 내어다보았다.창을 꿰고 비를 꿰고 또 비를 꿰어서 저편 한 이십 간 앞에 조그마한 방성 하나가 엘리자베트의 눈에 띄었다. “아!” 그는 안심의 숨을 내어쉬었다. ‘저것이 만약?’ 그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눈을 비비고 반만큼 일어서서 뚫어지게 내어다보았다. 가슴은 뚝 뚝 소리를 낸다……. 어렴풋이 보이는 그 방성에 엘리자베트는 상상을 가하여 보기 시작하였다.앞집만 보일 때 에는 상상으로 뒷집을 세우고 그것이 보일 때에는 또 상상의 집을 세워서 한참 볼 때에 그 방성은 자기가 오촌모의 있는 마을로 엘리자베트의 눈에 비쳤다.엘리자베트는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이 흥분하여 피곤하여지고 가슴이 뛰노는 고로 서 있 을 힘이 없었다. 가슴과 목 뒤에서는 뚝뚝 소리를 더 빨리 더 힘있게 낸다.가뜩이나 더디게 걷던 인력거가 방성 어구에 들어서서는 더 느리게 걷는다……. 엘리자베트는 흥분한 눈으로 가슴을 뛰놀리면서 그 방성을 보았다. 길에 사람 하나 없다. 평화의 이 촌은 작년보다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작년에 보던 길 좌우편에만 벌려 있던 이십여 호의 집은 역시 내게 상관 있나 하는 낯으로 엘리자베트를 맞는다. 그 방성 맨 끝,뫼 바로 아래 있는 엘리자베트의 오촌모의 집에 인력거는 닿았다. 비의 실 은 그냥 하늘과 땅을 맞맨 것같이 보이면서 힘있게 쪽쪽 내리쏜다. 엘리자베트는 인력거에서 내렸다.세 시간 동안이나 앉아서 온 그의 다리는 엘리자베트의 자유로 되지 않았다. 그는 취한 것 같이 비츨비츨하며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같이 허둥허둥 낮은 대문을 들어섰다.비는 용 서 없이 엘리자베트의 머리에서 가는 모시저고리 치마 구두로 내리쏜다. 대문 안에 들어선 엘리자베트는 어찌할지를 몰라서 담장에 몸을 기대고 우두커니 서 있었 다. 그때에 마침 때좋게 오촌모가 무슨 일로 밖에 나왔다. “아주머니!” 엘리자베트는 무의식히 고함을 치고 두어 발자국 나섰다. 오촌모는 늙은 눈을 주름살 많은 손으로 비비고 잠깐 엘리자베트를 보다가, “엘리자베트냐. ” 하면서 뛰어와서 마주 붙들었다. “어떻게 왔냐?자 비 맞겠다. 아이구 이 비 맞은 것 봐라. 들어가자. 자, 자.” “인력거가 있어요.” 하고 엘리자베트는 땅에 발이 닿지 않는 것 같은 걸음으로 허둥허둥 인력거꾼에게 짐을 들 여오라 명하고, 오촌모와 함께 어둡고 낮고 시시한, 내음새나는 방 안에 들어왔다. “전엔 암만 오래두 잘 안 오더니, 어찌 갑자기 왔냐?” 오촌모는 눈에 다정한 웃음을 띠고 물었다. 엘리자베트는 진리 있는 거짓말을 한다. “서울 있어야 이젠 재미두 없구 그래서…….” “으응!” 오촌모는 말의 끝을 높여서 엘리자베트의 대답을 비인(非認)한다. “네 상에 걱정빛이 뵌다. 무슨 걱정스러운 일이라도 있냐?” ‘바로 대답할까.’ 엘리자베트가 생각하는 동시에 입은 거짓말을 했다. “걱정은 무슨 걱정이요. 쯧.” 엘리자베트는 혀를 가만히 찼다. 왜 거짓말을 해……. “그래두 젊었을 땐 남 모르는 걱정이 많으니라.” ‘대답할까.’ 엘리자베트는 갑자기 생각했다. 가슴이 뛰놀기 시작한다. 치만 기회는 또 지나갔다. 오촌 모는 딴 말을 꺼낸다.“그런데 너 점심 못 먹었겠구나. 채려다 주지, 네 촌밥 먹어 봐라. 어찌 맛있나.” 오촌모는 나갔다. “짐 들여왔습니다.” 하는 인력거꾼의 소리가 나므로 엘리자베트는 나가서 짐을 찾고 들어와 앉아서, 밖을 내어 다보았다.뜰 움푹움푹 들어간 데마다 물이 고였고 물 고인 데마다 비로 인하여 방울이 맺혀서 떠다 니다가는 없어지고, 또 새로 생겨서 떠다니다가는 없어지곳 한다.초가집 지붕에서는 누렇 고 붉은 처마물이 그치지 않고 줄줄 흘러내린다. 한참이나 눈이 멀거니 뜰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 오촌모가 밥과 달걀, 반찬,김치 등 간단한 음식을 엘리자베트를 위하여 차려 왔다. 엘리자베트는 점심을 먹은 뒤에 또 뜰을 내어다보기 시작하였다.뜰 한편 구석에는 박 넌 출이 하나 답답한 듯이 웅크러뜨리고 있었다.잎 위에는 빗물이 고여 있다가 바람이 불 때 마다 잎이 기울어지며,고였던 물이 땅에 쭈루룩 쏟아지는 것이 엘리자베트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그 잎들 아래는 허옇고 푸른 크담한 박 하나가 잎이 바람에 움직일 때마다 걸핏걸 핏 보였다.박 넌출 아래서 머구리가 한 마리 우덕덕 뛰어나왔다. 본래부터 머구리를 무서워하던 엘리 자베트는 머리를 빨리 돌렸다.머구리에게 무서움을 가지는 동시에 엘리자베트의 머리에 는 아깟걱정이 떠올랐다. 그는 낯을 찡그리고 한숨을 후 내어쉬었다. 이것을 본 오촌모는 물었다. “왜 그러냐?한숨을 다 짚으면서…… 네게 아무래두 걱정이 있기는 하구나.” 엘리자베트는 마음이 뜨끔하였다. 그러면서도, 이 기회 넘겼다가는……. “아주머니!” 그는 흥분하고 떨리는 소리로 오촌모를 찾았다. “왜, 왜 그러냐?이야기 다 해라.” “서울은 참 나쁜 뎁디다그려…….” 엘리자베트는 울기 시작하였다. “자, 왜?” “하―아!” 엘리자베트는 울음이 섞인 한숨을 쉬었다. “아 왜 그래?” “아― 어찌할까요.” “무엇을 어찌해. 자 왜 그러느냐?” “난 죽고 싶어요.” 엘리자베트는 쓰러졌다. “딴소리한다. 왜 그래?자 이야기해라.” 오촌모는 얼른다. 엘리자베트는 끊었다 끊었다 하면서 무한 간단하게 자기와 남작의 새를 이야기한 뒤에, 재 판하겠단 말로 말을 끝내었다. “너 같은 것이 강가(姜家) 집에…….” 엘리자베트의 말을 들은 오촌모는 성난 소리로 책망하였다. 괴로운 침묵이 한참 연속하였다. 아주머니의 책망을 들을 때에 엘리자베트는 울음 소리까 지 그쳤다. 한참 뒤에,오촌모는 엘리자베트가 불쌍하였던지 이제 방금 온 것을 책망한 것이 미안하였 던지 말을 돌린다. “그래두 재판은 못 한다. 우리는 상것이고 저편은 양반이 아니냐?” 아직 채 작정치 못하고 있던 엘리자베트의 마음이 이 말 한마디로 온전히 작정되었다. 그 는 아주머니의 말을 우쩍 반대하고 싶었다. “재판에두 양반 상놈이 있나요?” “그래두 지금은 주먹 천지란다.” 엘리자베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양반 상놈 문제에 얼토당토 않은 주먹을 내어놓는 아주머 니의 무식이 그에게는 경멸스럽기도 하고 성도 났다.그렇지만 그 말의 진리는 자기의 지 낸 일로 미루어 보아도 그르달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재판은 꼭 하고 싶었다. “그래두 해요!” “그리 하고 싶으면 하기는 해라마는…….” “그럼 아주머니!” “왜.” “이 동리에 면소가 있나요?” “응 있다. 무엇 하려구?” “거기 가서 재판에 대하여 좀 물어 보아 주시구려…….” “싫다야…… 그런 일은.” “그래두…… 아주머니까지…… 그러시면…….” 엘리자베트의 낯은 울상이 되었다. 이것이 불쌍하게 보였던지 오촌모는 면서기를 찾아갔 다. 이튿날 엘리자베트는 남작을 걸어서, 정조 유린에 대한 배상 및 위자료로서 5천 원,서생 아(庶生兒) 승인, 신문상 사죄광고 게재 청구 소송을 경성지방법원에 일으켰다.
8
늘 그치지 않고 줄줄 내리붓던 비는 종시 조선 전지(全地)에 장마를 지웠다.엘리자베트가 있는 마을 뒷뫼에서도 간직하여 두었던 모든 샘이 이번 비로 말미암아 터져 서 개골가에 있는 집 몇은 집채같이 흘러내려오는 물로 인하여 혹은 떠내려가고 혹은 무너 졌다.매일 흰 물방울을 안개같이 내면서 ㅤㅇㅘㄺㅤㅇㅘㄺ 흘러내려가는 물을 보면서 엘리자베트는 몇 가지 일로 느끼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반성도 없지 않았다.이번 이와 같이 큰 재판을 일으킨 것이 엘리자베트의 뜻은 아니다. 법률을 아는 사람이 ‘그 리하여야 좋다’는 고로 엘리자베트는 으쓱하여서 그리할 뿐이다.그에게는 서생아 승인으 로 넉넉하였다. “에이 썅.” 그는 만날 이 일이 생각날 때마다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서울을 떠난 것도 그의 느낌의 하나이다. 차라리 반성의 하나이다.오촌모는 ‘에이구 내 딸 에이구 내 딸’ 하며 크담한 엘리자베트의 궁둥이를 두드리며 사랑하였고, 엘리자베트는 여 왕과 같이 가만히 앉아서 모든 일을 오촌모를 부려먹었지만,그것만으로 그는 만족지를 못 하였다. 그는 낮고 더럽고 답답하고 덥고 시시한 냄새 나는 촌집보다 높고 정한 서울집이 낫고,광목바지 입고 상투 틀고 낯이 시꺼먼 원시적인 촌무지렁이들보다 맥고모자에 궐련 물고 가는 모시두루마기 입은 서울 사람이 낫다. 굵은 광당포치마보다 가는 모시치마가 낫 고,다 처진 짚신보다 맵시나는 구두가 낫다. 기름머리에 맵시나게 차린 후에 파라솔을 받 고 장안 큰거리를 팔과 궁둥이를 저으면서 다니던 자기 모양을 흐린 하늘에 그려 볼 때에 는,엘리자베트는 자기에게도 부끄럽도록 그 그림자가 예뻐 보였다. 장마는 걷혔다. 장마 뒤의 촌집은 참 분주하였다. 모를 옮긴다 김을 맨다 금년 추수는 이때에 있다고,각 집이 모두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나서서 활동을 한다. 각 곳에서 중양가(重陽歌)의 처 량한 곡조, 농부가의 웅장한 곡조가 일어나서 뫼로 반향하고 들로 퍼진다.자농(自農) 밭 몇 뙈기와 뒤뜰에 터앝을 가진 엘리자베트의 오촌모의 집도 꽤 분주하였다. 자농 밭은 삯을 주어서 김을 매고 터앝만 오촌모 자기가 감자와 파 이종을 하기로 하였다.뻔뻔 놀고 있기가 무미도 하고 갑갑도 한 고로, 엘리자베트는 아주머니를 도와서 손에 익 지 않은 일을 하고 있었다. 첫번에는 일하기가 죽게 어려웠지마는,좀 연습된 뒤에는 땀으로 온몸이 젖고 몸이 곤하여 진 뒤에 나무 그늘 아래서 상추쌈에 고추장으로 밥을 먹고 얼음과 같은 찬 우물물을 마시 는 것은 참 엘리자베트에게는 위에 없는 유쾌한 일이 되었다.첫번에는 심심끄기로 시작하 였던 일을 마지막에는 쾌락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는 새에도 틈만 있으면 그는 집 뒤 뫼에 올라가서 서울을 바라보고 한숨을 짓고 있었 다.보얀 여름 안개로 둘러싸여서 아침 햇빛을 간접으로 받고 보얗게 반짝거리는 아침 서울,너무 강하여 누렇게까지 보이는 여름 햇빛을 정면으로 받고 여기저기서 김을 무럭무럭 내 는 낮 서울,새빨간 저녁놀을 받고 모든 유리창은 그것을 몇십 리 밖까지 반사하여 헬 수 없는 땅 위의 해를 이루는 저녁 서울, 그 가운데 우뚝 일어서 있는 푸른 남산, 잿빛 삼각산,먼지로 싸인 큰거리, 울깃불깃한 경복궁, 동물원, 공원, 한강, 하나도 엘리자베트에게 정답 게 생각 안 나는 것이 없고, 느낌 안 주는 것이 없었다. ‘아― 내 서울아,내 사랑아 나는 너를 바라본다 붉은 눈으로 더운 사랑으로…… 아침 해와 저녁 놀, 잿빛 안개 흩어진 더움 아래서, 나는 너를 아― 나는 너를 바라본다.천 년을 살겠냐 만 년을 살겠냐. 내 목숨 다하기까지, 내 삶 끝나기까지, 나는 너를 그리리라.’ 처량한 곡조로 엘리자베트는 부르곳 하였다.엘리자베트는 한 자리를 정하고 뫼에 올라갈 때에는 언제든지 거기 앉아 있었다. 뒤에는 큰 소나무를 지고 그 솔그늘 아래 꼭 한 사람이 앉아 있기 좋으리만한 바위가 하나 있었다.그것이 엘리자베트의 정한 자리다. 그 바위 두어 걸음 앞에서 여남은 길 되는 절벽이 있었다. 이 절벽을 내려다볼 때마다 그의 마음속에는 한 기쁨이 움직였다. 종시 재판날이 왔다.
9
재판 전날, 엘리자베트는 오촌모와 함께 서울로 들어와서 재판소 곁 어떤 객줏집에 주인을 잡았다. 서울을 들어설 때에 엘리자베트는,한 달밖에는 떠나 있지 않았으되 그렇게 그리던 서울이 므로 기쁨의 흥분으로 몸이 죽게 피곤하여져서 부들부들 떨면서 객줏집에 들었다. ‘혜숙이나 만나지 않을까,이환 씨나 만나지 않을까, S 혹은 부인이나 혹은 남작이나 만나 지 않을까.’ 그는 반가움과 무서움과 바람으로 머리를 푹 숙이고 곁눈질을 하면서 아주머니와 함께 거 리들을 지나갔다. 할 수 있는 대로는 좁은 길로……. 그는 하룻밤 새도록 모기와 빈대와 흥분, 걱정 들로 말미암아 잠도 잘 못 자고, 이튿날 낯 이 뚱뚱 부어서 제시간에 재판소에 들어왔다.아주머니는 방청석으로 보내고 자기 혼자 원고석(原告席)에 와 앉을 때에는, 엘리자베트는 자기도 어찌 되는지를 모르도록 마음이 뒤숭숭하였다.염통은 한 분(分) 동안에 여든일곱 번이나 뛰놀고 숨도 한 분 사이에 스무 번 이상을 쉬게 되었다. 땀은 줄줄 기왓골에 빗물 흐르듯 흘러서 짠물이 자꾸 눈과 입으로 들어온다.서울 들어오느라고 새로 갈아입은 엘리 자베트의 빈사저고리와 바지허리는 땀으로 소낙비 맞은 것보다 더 젖게 되었다. 세 분쯤 뒤에 그는 마음을 좀 진정하여 장내를 둘러보았다.방청석에는 아주머니 혼자 낯에 근심을 띠고 눈이 둥그래져 서 있었고 피고석에는 남작이 머리를 저편으로 돌리고 있었다. 남작을 볼 때에 그는 갑자기 죄송스러운 생각이 났다. ‘오죽 민망할까. 이런 데 오는 것이 남작에게는 오죽 민망할까?내가 잘못했지, 재판은 왜 일으켜?남작은 나를 어찌 생각할까?또 부인은……?’ 그는 이제라도 할 수만 있으면 재판을 그만두고 싶었다. 짐짓 자기가 남작에게 져주고 싶 기까지 하였다. 그는 머리를 좀더 돌이켰다.거기는 남작의 대리인인 변호사가 엄연히 앉아 있었다. 만장 을 무시하는 낯으로 자기 혼자만이 재판을 좌우할 능력이 있다는 낯으로 변호사는 빈 재판 석을 둘러보고 있었다. 변호사를 볼 때에 엘리자베트는 남모르게, “아!” 하는 절망의 소리를 내었다. 자기의 변론이 어찌 변호사에게 미칠까, 그의 머리에는 똑똑 히 이 생각이 떠올랐다. 남작에 대한 미움이 마음속에 솟아나왔다.자기를 끝까지 지우려 고 변호사까지 세운 남작이 어찌 아니꼽지를 않을까. 그는 외면한 남작을 흘겨보았다. 판사, 통변, 서기 들이 임석하고 재판은 시작되었다.규정의 순서가 몇이 지나간 뒤에 원고 의 변론할 차례가 이르렀다. 규정대로 사는 곳과 이름 들을 물은 뒤에 엘리자베트는 변론 하여야 하게 되었다.엘리자베트는 벌떡 일어서서 묻는 말에는 대답하였지만 변론은 나오 지를 않았다. 재판소가 빙빙 도는 것 같고 낯에서는 불덩이가 나올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용기를 내어야지.’ 생각할 때에 얼마의 용기는 회복되었다. 그는 끊었닷 끊었닷 하면서 자기의 청구를 질서 없이 설명하였다. “더 할 말은 없냐?” 엘리자베트의 말이 끝난 뒤에 주석판사가 물었다. “없어요.” 엘리자베트는 말이 하기 싫은 고로 겨우 중얼거리고 앉았다. ‘겨우 넘겼다.’ 엘리자베트는 앉으면서 괴로운 숨을 내어쉬면서 생각하였다. 피고의 변론할 차례가 되었다. 변호사는 일어서서 웅장한 큰 소리로, 만장을 누르는 소리 로,장내가 웅웅 울리는 소리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원고의 말은 모두 허황하다. 그 증거가 어디 있는가?있으면 보고 싶다. 잉태하였다 하니 거짓말인지도 모르거니와, 설혹 잉태하였다 하여도 그것이 남작의 자식인 증거가 어디 있 는가?자기 자식이니까 떨어뜨리려고 병원에 데리고 갔다 원고는 말하지만, 주인이 자기 집에 가정교사가 병원에 좀 데려다 달랄 때 데려다 줄 수가 없을까?피고가 자기 일이 나 타날까 저퍼서 원고를 내어쫓았다 원고는 말하지마는 다른 일로 내어보냈는지 어찌 아는 가?원고는 당시에는 학교에도 안 가고 가정교사의 의무도 다하지 않고 게다가 탈까지 났 으니, 누구가 이런 식객을 가만 두기를 좋아할까?어떻든 원고에게는 정신이상이 있는 것 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엘리자베트는 변호사가 ‘원고의 말은 허황하다’ 할 때에 마음이 뜨끔하였다.‘남작의 자식 인지 어찌 알까’ 할 때에 가슴에서 ‘툭’ 하는 소리를 들었다. 병원 이야기가 나올 때에 머리 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에는 어찌 되는지 몰랐다.청각은 가졌지만 듣지는 못하였다. 다만 둥둥 하는 사람의 말소리가 한 백 리 밖에서 나는 것같이 들렸을 뿐이고 아 무것도 의식지를 못하였다.유도에 목 끼운 때와 같이 온몸이 양상스러워지는 것이 구름을 타고 하늘을 떠다니는 것 같았다.그가 바롯 의식상태로 들기 비롯한 때는 판사가 ‘더 할 말이 없느냐’고 물을 때이다. 판사의 묻는 말을 똑똑히 알아듣지 못하고 또 말하기도 싫은 엘리자베트는 다만, “네.” 하고 대답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런 뒤에는 그의 눈앞에는 검은 물건이 왔닷갔닷 움직움직 하는 것만 보였다. 무엇인지는 똑똑히 알지 못하였다. 한참 있다가 판결은 났다.원고의 주장은 하나도 증거가 없다. 그런 고로 원고의 청구는 기 각한다. 이 말을 겨우 알아들은 엘리자베트는 가슴에서 두 번째 ‘툭’ 하는 소리를 들었다.그 뒤에 는 정신이 아득하여지고 말았다. 몇 시간 동안을 혼미상태로 지낸 후에 겨우 정신이 좀 드는 때는 그는 이상한 방 안에 앉아 있었다.껌껌한 그 방은 사면 침척(尺) 두 자밖에는 안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방은 들썩들 썩 움직인다. ‘흥 재미있구나!’ 그는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한가한 생각이 그의 머리에 오랫동안 머물지를 못하였다. 높이 세 치,길이 다섯 치쯤 되는 조그만 구멍으로 자기 아주머니가 보일 때에 엘리자베트는 펄떡 정신 을 차렸다. 그때야 그는 자기 있는 곳은 보교(步轎) 안이고,벌써 아주머니의 집에 다 이르 렀고, 아까 판결받은 것이 생각났다. 보교는 놓였다. 엘리자베트는 우덕덕 보교에서 뛰어내리다가 꼬꾸라졌다.발이 저린 것을 잊고 뛰어내리 던 그는 엎드러질 수밖에는 없었다. “에구머니!” 아주머니는 엘리자베트가 또다시 기절을 한 줄 알고 고함을 치며 뛰어왔다. 엘리자베트는 ‘죽어라’ 하고 발이 저린 것을 참고 일어서서 뛰어 방 안에 들어와 꼬꾸라졌 다.그는 울음도 안 나오고 웃음도 안 나왔다. 다만, ‘야단났구만, 야단났구만.’ 생각만 하였다. 그렇지만 어디가 야단나고 어떻게 야단났는지는 그는 몰랐다. 다만,어떤 큰 야단난 일이 어느 곳에 있기는 하였다. 오촌모가 들어와 흔드는 것도 그는 모른 체하고 다만 씩씩거리며 엎디어 있었다. ‘야단, 야단.’ 그의 눈에는 여러 가지 환상이 보인다. 네모난 사람, 개, 우물거리는 모를 물건, 뫼보다도 크게도 보이고 주먹만하게도 보이는 검은 어떤 물건, 아주머니,연필-―-- 이것이 모두 합 하여 그에게는 야단으로 보였다. 오촌모가 펴준 자리에 누워서도 그는 이런 그림자들만 보면서 씩씩거리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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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엘리자베트는 눈을 번쩍 뜨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주머니는 방 안에 없었다. 부엌에서 덜겅거리는 고로 거기 있나 보다 그는 생각하였다.전에는 그리 주의하여 보지 않았던 그 방 안의 경치에서 병인의 날카로운 눈으로 그는 새 로운 맛있는 것을 여러 가지 보았다. 제일 눈에 뜨이는 것은,담벽 사면에 붙인 당지들이다. 일본 포속(布屬)들에서 꺼내어 붙인 듯한 그 당지들을 엘리자베트는 흥미의 눈으로 하나씩 하나씩 건너보았다.그 다음에 보인 것은 천장 서까래 틈에 친 거미줄들이다. 엘리자베트는 그 가운데 하나를 자세히 보았다. 그가 보고 있는 동안에 욍 하니 날아오던 파리가 한 마리 그 줄에 걸렸다.거미줄은 잠깐 흔들리다가 멎고 어디 있댔는지 보이지 않던 거미가 한 마리 빨리 나와서 파리를 발로 움킨다. 파리는 깃을 벌리고 도망하려 애를 쓰기 시작하였다.거미줄은 대단 히 떨렸다. 그렇지만 조금 뒤에 파리는 죽었는지 거미줄의 흔들림은 멎고 거미 혼자서 발 발 파리를 두고 돌아다닌다. 엘리자베트는 바르륵 떨면서 머리를 돌이켰다. ‘저 파리의 경우와…… 내 경우가, 어디가 다를까?어디가……?’ 엘리자베트가 움직할 때에 파리가 한 마리 욍 나타났다. 그 파리의 날기를 기다리고 있었 던지 다른 파리들도 일제히 웅― 날았다가 도로 각각 제자리에 앉는다……. 엘리자베트는 눈을 감았다. 상쾌한 졸음이 짜르륵 엘리자베트의 온몸에 돌았다. 엘리자베 트는 승천(昇天)하는 것 같은 쾌미를 누리고 있었다.이때에 오촌모가 샛문을 벌컥 열며 들어왔다. 엘리자베트는 눈을 번쩍 떴다. 오촌모는 들어와서 물에 젖은 손을 수건에 씻은 뒤에 엘리 자베트의 머리곁에 와 앉았다. “좀 나은 것 같으냐?” “무엇 낫지 않아요.” “어디가 아파?어젯밤 새도록 헛소릴 하더니…….” “헛소리까지 했어요?” 엘리자베트는 낯에 적적한 웃음을 띠고 묻는 대답을 하였다. “그런데 어디가 아픈지는 일정하게 아픈 데가 없어요. 손목 발목이 저리저릿하는 것이 온 몸이 다 쏘아요. 꼭…… 첫몸할 때…….” “왜 그런고…… 원.” “왜 그런지요…….” 잠깐의 침묵이 생겼다. “앗!” 좀 후에 엘리자베트는 작은 소리로 날카로운 부르짖음을 내었다. 낯에는 무한 괴로움이 나 타났다. “왜 그러냐!?” 오촌모는 놀라서 물었다. “봤다는 안 되어요.” 엘리자베트는 억지로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보지 않을 것이니 왜 그러냐?” “묻지두 말구요!” “묻지두 않을 것이니 왜 그래?” “그럼 안 묻는 거인가요?” “그럼 그만두자…… 그런데 미음 안 먹겠냐?” “좀 이따 먹지요.” 엘리자베트는 괴로운 낯을 하고 팔과 다리를 꼬면서 앓는 소리를 내고 있다가 참다 못하여 억지로 말했다. “아주머니 요강 좀 집어 주세요.” 오촌모는 근심스러운 낯으로 물끄러미 엘리자베트를 들여다보다가 말없이 요강을 집어 주 었다. 엘리자베트는 요강을 타고 앉았다.나올 듯 나올 듯하면서도 나오지 않는 오줌은 그에게 큰 아픔을 주었다. 한 십 분 동안이나 낯을 무한 찡글고 있다가 내어놓을 때는 그 요강은 피오줌으로 가득 찼다. “피가 났구나!” 오촌모는 놀란 소리로 물었다. “……네.” “떨어지려는 것이로구나.” “그런가 봐요.” 말은 끊어졌다. 엘리자베트의 마음은 무한 설렁거렸다. 그 가운데는 저픔과 반가움이 섞여 있었다. “깨를 어떻게 먹으면 올라붙기는 한다더라만…….” 잠깐 후에 아주머니가 말을 시작했다. “그건 올라붙어 무엇 해요.” 엘리자베트는 낯을 찡글고 대답하였다. “그래도 낙태로 죽는 사람두 있너니라…….” 엘리자베트는 대답을 하려다가 말이 하기 싫은 고로 그만두었다. 말은 또 끊어졌다. 엘리자베트는 ‘죽어두 좋아요’라고 대답하려 하였다. ‘죽으면 뭘 ㅤㅎㅏㅆ나.’ 그는 병적으로 날카롭게 된 머리로 생각하여 보았다. ‘내게 이제 무엇이 있을까?행복이 있을까?없다. 즐거움은?그것도 없다. 반가움은?물론 없지. 그럼 무엇이 있을까?먹고 깨고 자는 것뿐-―-- 그 뒤에는?죽음!그 밖에 무엇이 있 을까?아무것도 없다. 그것뿐으로도 살 가치가 있을까?살 가치가 있을까?아, 아!어떨까?없다!그러면?나 같은 것은 죽는 편이 나을까?물론. 그럼 자살?아!’ ‘자살?(그는 사지를 부들부들 떨었다.) 모르겠다. 살아지는 대로 살아 보자. 죽는 것도 무 섭지 않고, 사는 것도 싫지도 않고-―-- ’ 이때에 오촌모가 말을 시작했다.“내가 가서 물어 보고 올라.” “그만두세요.” 그는 우덕덕 놀라면서 무의식히 날카롭게 말하였다. “그래두 내 잠깐 다녀오지.” 아주머니는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아주머니가 나간 뒤에 그는 또 생각하여 보았다. 내 근 이십 년 생애는 어떠하였는가?앞일은 그만두고 지난 일로…… 근 이십 년 동안이나 살면서, 남에게, 사회에게 이익한 일을 하나라도 하였는가?벗들에게 교과를 가르친 일-―--이것뿐!이것을 가히 사회에 이익한 일이라 부를 수가 있을까?(그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응!하나 있다!‘표본!’ (그는 괴로운 웃음을 씩― 웃었다.) 이후 사람을 경계할 만한 내 사 적!곧 ‘표본!’ 표본생활 이십 년…… 아……!그러니 이것도 내가 표본이 되려서 되었나?되기 싫어서도 되었지. 헛데로 돌아간 이십 년, 쓸데없는 이십 년, ‘나’를 모르고 산 이십 년, 남에게 깔리어 산 이십 년. 그 동안에 번 것 은?표본!그 동안에 한 일은?표본!그는 피곤하여진 고로 눈을 감았다. 더움과 추움이 그를 쏘았다. 그는 추워서 사지를 보들 보들 떨면서도 이마와 모든 틈에는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아래는 수만 근 되는 추를 단 것같이 대단히 무거웠다. 괴로움과 한참 싸우다가 오촌모의 돌아옴이 너무 더딘 고로 그는 그만 잠이 들었다.자는 동안에 여러 가지 그림자가 그의 앞에서 움직였다. 네모난 사람이 어떤 모를 물건을 가지고 온다. 그 뒤에는 개가 따라온다.방성 뒷산에서 뫼보다도 큰 어떤 검은 물건이 수없 이 많이 흐늘흐늘 날아오다가, 엘리자베트의 있는 방 앞에 와서는 주먹만하게 되면서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어온다.하나씩 하나씩 다 들어온 다음에는 도로 하나씩 하나씩 흐늘흐늘 날아 나가서 차차 커지며 뫼만하게 되어 도로산 가운데서 쓰러져 없어진다.다 나갔다는 도로 들어오고 다 들어왔다는 도로 나가고, 자꾸자꾸 순환되었다. 엘리자베트는 앓는 소리 를 연발로 내며 이 그림자들을 보고 있었다.이렇게 무서운 그림자를 한참 보고 있을 때에, “얘 미음 먹어라.” 하는 오촌모의 소리가 나는 고로 눈을 번쩍 떴다.그는 미음 그릇을 들고 들어오는 아주머니를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저런 큰 그릇을 원 어 찌 들고 다니노?키도 댓자밖에는 못 되는 노파가…….’ 오촌모가 미음 그릇을 놓은 다음에 엘리자베트는 그것을 먹으려고 엎디었다. 아픔이 온몸 에 쭉 돌았다……. “숟갈이 커서 어찌 먹어요?” 그는 놋숟갈을 보고 오촌모에게 물었다. 그는, ‘숟갈이 커서 들지를 못하겠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어제두 먹던 것이 커?” 엘리자베트는 안심하고 숟갈을 들었다. 그것은 뜻밖에 크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았다. 그는 곁에 놓인 흰 가루를 미음에 치고 먹기 시작하였다. “아이고 짜다. ” 그는 한 술 먹은 뒤에 소리를 내었다. “짜기는 왜 짜?사탕가루를 많이 치구…….” 병으로 날카롭게 된 그의 신경은 그의 자유로 되었다. 마치 최면술에 피술자(被術者)가 시 술자(施術者)의 명령을 절대로 복종하여,단 것도 시술자가 쓰다 할 때에는 쓰다 생각하는 것과 같이 그의 신경도 절대로 그의 명령을 좇았다.휜 가루를 소금이라 생각할 때에는 짜 게 보였으나 사탕가루라 생각할 때에는 꿀송이보다도 더 달았다. 그렇지만 그의 신경도 한 가지는 복종치를 않았다.아픔이 좀 나았으면 하는 데는 조금도 순종치를 않았다. 미음을 먹는 동안에 오촌모가 투덜거렸다. “스무 집이나 되는 동리 가운데서 그것 아는 것이 하나두 없단 말인가 원…….” “무엇이요?” 엘리자베트는 미음을 삼키고 물었다. “그 올라붙는 방문 말이루다. 원 깨를 어짠대든지…….” 엘리자베트는 성이 나서 대답을 안 하였다. 미음을 다 마신 다음에 돌아누우려다가 그는, “읽!” 소리를 내고 그 자리에서 꼬꾸라졌다. 어디가 아픈지 똑똑히 모를 아픔이 온몸을 쿡 쏘았 다. 정신까지 어지러웠다. “어찌?더하냐?” “물이 쏟아져요.” 엘리자베트는 똑똑한 말로 대답하였다. “어째?” “바람이 부는지요?” “얘 정신채레라.” 엘리자베트는 후덕덕 정신을 차리면서, “내가 원 정신이 없어졌는가?” 하고 간신히 천장을 향하고 누웠다. 천장에는 소가 두 마리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엘리자 베트는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리 시작하였다. 두 마리의 소는 싸움을 시작했다. ‘떨어지면……?’ 생각할 때에 한 마리는 그의 배 위에 떨어졌다. 일순간 뜨끔한 아픔 뒤에 는 아뭏지도 않았다. ‘앍’ 소리를 내고 그는 다시 천장을 보았다. 소는 역시 두 마리지만 이번은 춤을 추고 있다. “표본생활 이십 년!” 그는 중얼거리고 담벽을 향하여 돌아누웠다. 거기서는 남작과 이환과 도야지와 파리가 장 거리 경주를 하고 있었다. ‘흥!재미있다. 누구가 이길 터인고?’ 그는 생각하였다. 조금 있다가 그는 생각난 듯이 수군거렸다. “표본생활 이십 년!”
11
그가 눈을 아무 데로 향하든지 어떤 그림자는 거기 벌려 있었다. 그가 자든지 깨든지 어떤 그림자는 거기서 움직였다. 이렇게 엘리자베트는 사흘을 지냈다.그러는 동안 다함이 없는 철학이 감추여 있는 것 같고도 아무 뜻이 없는 헛말 같이도 생각 되는 말구가 흔히 무의식히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표본생활 이십 년!’ 그는 이 말을 여러 번 거푸 하였다. 이렇게 사흘째 되는 저녁, 복거리 낮보다도 더 훈훈 타는 저녁,등과 사지 맨끝에서 시작하 여 짜르륵 온몸에 도는 추위의 쾌미를 역증으로 받으면서 잠과 깸의 가운데서 돌던 엘리자 베트는 오촌모의 소리에 놀라 흠칠 하면서 깨었다. “왜 그리 앓는 소리를 하냐?(혼자말로) 탈인지 무엇인지 낫지두 않구.” “아― 유― 죽겠다아― 하아―” 엘리자베트는 눈을 감은 채로 아주머니의 소리 나는 편으로 돌아누우면서 신음했다.그렇 지만 그에게는 아프리라 생각하는 데서 나온 아픔밖에는 아픔이 없었다. “왜 그래?참 앓는 너보다두 보는 내가 더 속상하다. 후!” 오촌모도 한숨을 쉰다. “아이구 덥다!” 오촌모는 빨리 부채를 집어서 엘리자베트를 부치면서 말했다. “내 부쳐 줄 것이니 일어나서 이 오미잣물을 마세 봐라.” 오미자라는 소리를 들은 그는 귀가 버썩하였다.어렸을 때부터 오미자를 좋아하던 그는 이 불 속에서 꿈질꿈질 먹을 준비를 시작하였다. 오늘은 그의 머리는 똑똑하여졌다. 그림자가 안 보였고 아픔도 덜어졌다.오촌모는 자기도 한 숟갈 떠먹어 본 뒤에 권한다. “아이구 달다. 자 먹어 봐라.” 엘리자베트는 눈을 뜨고 엎디어서 오미잣물을 마셨다.새큼하고 단 가운데도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내음새를 가진 오미잣물은 병인인 엘리자베트에게 위에 없는 힘을 주었다.그는 단숨에 한 사발이나 되는 물을 다 마셔 버렸고 도로 누웠다. “맛있지?” “네.” “그런데 어떠냐, 아프기는?” 엘리자베트는 다만 씩 웃었다. 다 큰 것이 드러누워서 다 늙은 아주머니를 속상케 함에 대 한 미안과,크담한 것이 ‘ㅤㅇㅡㄺㅤㅇㅡㄺ’ 앓은 부끄러움이 합하여 낳은 웃음을 그는 다만 감추지 않 고 정직하게 웃은 것이다. “오늘은 정신 좀 들었냐?며칠 동안 별한 소릴, 어더런 소릴 하던지?…… 응!…… 응!무얼 ‘표분 생울 이십 년’이라던지?” “표본생활 이십 년!” 엘리자베트는 생각난 듯이 무의식히 소리를 내었다. “응!그 소리 그 소리!” 오촌모도 생각난 듯이 지껄였다. “아이 덥다!” 엘리자베트는 이불을 차 던지고 고함을 쳤다. “응, 부쳐 주지.” 어느덧 부채질을 멈추었던 오촌모는 다시 부치기 시작했다.속에서 나오는 태우는 듯한 더움과 밖에서 찌르는 무르녹이는 듯한 더위와 사늘쩍한 부채 바람이 합하여, 엘리자베트의 몸에 쪼르륵 소름이 돋게 하였다.소름 돋을 때와 부채의 시 원한 바람의 쾌미는 그에게 졸음이 오게 하였다. 그는 구름 타고 하늘에 올라가는 맛으로 잠과 깸의 가운데서 떠돌고 있었다. 몇 시간 지났는지 몰랐다.무르녹이기만 하던 날은 소낙비로 부어 내린다. 그리 덥던 날도 비가 오면서는 서늘하여졌다. 방 안은 습기로 찼다.구팡에 내려져서 튀어나는 물방울들은 안개비와 같이 되면서 방 안으로 몰려 들어온다. 그는 눈을 번쩍 떴다.어느덧 역한 내음새 나는 모기장이 그를 덮었고 그의 곁에는 오촌모 가 번뜻 누워서 답답한 코를 구르고 있었다.위에는 불티를 잔뜩 앉히고 그 아래서 숨찬 듯 이 할락할락하는 석유 램프는 모기장 밖에서 반딧불같이 반짝거리며 할딱거리고 있었다. ‘가는 목숨으로라도 살아지는 껏 살아라.’ 그 램프는 소곤거리는 것 같다. 엘리자베트는 일어나서 요강을 모기장 밖에서 들여왔다. 한참 타고 앉았다가 ‘악’ 소리를 내고 그는 엎으러졌다. 가슴은 뛰놀고 숨도 씩씩하여졌다.마음은 무한 설렁거렸다. 맥도 푹 났다. 한참 엎디어 있다가 그는 생각난 듯이 벌떡 일어나서 요강을 내어놓고 번갯불과 같이 빨리 그 속에 손을 넣어서 주먹만한 핏덩이를 하나 꺼내었다.‘내 것.’ 그의 머리에 번갯불과 같이 이 생각이 지나갔다. 그의 머리에는 모순된 두 가지 생각이 일어났다. ‘내 것.’ 참 자식에 대한 사랑이 그 핏덩어리에게 일어났다. ‘이것 때문에…….’ 그는 그 핏덩이에 대하여 무한한 미움이 일어났다. ‘이것도 저 아니꼬운 남작의 것, 나는 이것 때문에…….’ 이 두 가지 생각의 반사작용으로 그는 핏덩이를 힘껏 단단히 쥐었다. 거기는 미움이 있고 사랑이 있었다. 그는 그 핏덩이를 씹어 먹고 싶었다.거기도 미움이 있고 사랑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쥔 채로 드러누웠다. 맥이 나서 앉아 있을 힘이 없었다. 드러누운 그에게는 얼토당토 않은 딴 생각이 두어 가지 머리에 났다.이것도 잠깐으로 끝 나고 잠이 들었다. 이삼 푼의 잠이 그를 슬치고 지나간 뒤에 그는 눈을 번쩍 뜨면서 무의식히 중얼거렸다. “표본생활 이십 년!” 그 다음 순간 그에게는 별한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약한 자의 슬픔!’ ‘천하에 둘도 없는 명언이루다.’ 그는 생각하였다. 그는 이 문제를 두고 논문 비슷이, 소설 비슷이 하나 지어 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는 생 각하여 보았다.자기의 설움은 약한 자의 슬픔에 다름없었다. 약한 자기는 누리에게 지고 사회에게 지고 ‘ 삶’에게 져서, 열패자(劣敗者)의 지위에 이르지 않았느냐?!약한 자기는 이환에게 사랑을 고백지 못하고 S와 혜숙에게서 참말을 듣지 못하고 남작에게 저항치를 못하고 재판석에서 좀더 굳세게 변론치를 못하여 지금 이 지경을 이르지 않았느냐?!‘그렇지만 이것은 밖이 약한 것이다. 좀더 깊이, 안으로!’ 그는 생각하였다. 자기의 아직까지 한 일 가운데서 하나라도 자기게서 나온 것이 어디 있느냐?반동(反動) 안 입고 한 일이 어디 있느냐?남작 집에서 나온 것도 필경은 부인이 좀더 있으라는 반동 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병원 안에 들어간 것도 필경은 집으로 돌아올 전차가 안 보임에 있지 않으냐?병원으로 향한 것도 그렇다. 재판을 시작한 것은?오촌모가 말리는 반동을 받았다!모든 일이 다 그렇다!“이십세기 사람이 다 그렇다!” 그는 힘있게 중얼거렸다. “어떻든…… 응!그렇다!문제는 ‘이십세기 사람’이라고 치고, 첫줄을 ‘약한 자의 슬픔’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줄을 ‘현대 사람의 다의 약함’으로 끝내자.” 그는 자기 짓던 글을 생각하고 중얼거렸다.‘표본생활 이십 년이란 구는 꼭 넣어야겠다.’ 그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글을 속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이리 짓고 저리 지어서,이만하면 완전하다 생각할 때 그는 마지막 구를 소리를 내어서 읽 었다. “현대 사람 다의 약함!” 그런 다음에는 그의 머리에 한 공허가 생겼다. 그 공허가 가슴으로 퍼질 때에 그는 맥이 나 고 발끝과 손끝에서 그 공허가 일어날 때에 그는 눈을 감았다. 눈이 무한 무거워졌다.그 공허가 온몸에 퍼질 때에 그는 ‘후―’ 숨을 내어쉬면서 잠이 들었다.
12
“저런!원 저런!” 이튿날 아침 엘리자베트에게 어젯밤 변동을 듣고 눈이 둥그래져서 그 핏덩이를 들여다보 며 오촌모는 지껄였다.엘리자베트는 탁 그 핏덩이를 빼앗아서 이불 아래 감춘 뒤에 낯을 붉히며 이유 없이 씩 웃 었다. “어떻든 네 속은 시원하겠다.밤낮 떨어지면 떨어지면 하더니-―--” 오촌모는 비웃는 듯이 입살을 주었다. 아깟번에 웃은 엘리자베트는 이번에도 웃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그는 억지로 입과 눈 으로만 일순간의 웃음을 웃은 뒤에 곧 낯을 도로 쪽 폈다. 그리고 미안스러운 듯이 오촌모 의 낯을 들여다보았다.오촌모의 낯에는 가련하다는 표정이 똑똑히 보였다. ‘역시 가련한 것이루구나!’ 그는 속으로 고함을 쳤다. ‘그것도 내 것이 아니냐!?’ 어머니가 자식에게 가지는 육친의 정다움이 엘리자베트의 마음에 일어났다. 그는 몰래 손 을 더듬어서 겁적겁적하고 흐늘거리는 그 핏덩이를 만져 보았다. ‘어디가 엉덩이구 어디가 머리 편인고?’ 하고 그는 손가락으로 핏덩이를 두드리고 쓸어 주고 있었다. 차디찬 핏덩이에서도 엘리자 베트는 다스한 맛이 올라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이란 이런 것이루다.’ 그는 생각하였다.물끄러미 한참 그를 들여다보던 오촌모는 도로 전과 같은 사랑의 낯이 되며 생각난 듯이 말했다. “잊었댔다. 오늘은 장날이 되어서 서울 잠깐 들어갔다 와야겠다. 무엇 먹고 싶은 것은 없 냐?있으면 말해라. 사다 줄 거니…….” “없어요.” 엘리자베트는 팔딱 정신을 차리며 무의식히 중얼거렸다. ‘서울’ 소리를 듣고 그는 갑자기 가슴이 뛰놀기 시작하였다. ‘저런 노파가 다 서울을 다니는데 내가 어찌…….’ 그는 오촌모를 쳐다보면서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오촌모를 찾았다. “아주머니!” “왜?” “서울 들어가세요?” 그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렸다. “응.” 엘리자베트는 비쭉하여졌다. 오촌모의 ‘응’이란 대답뿐은 그를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응, 들어가겠다’든지 ‘응,다녀올란다’든지 좀더 친절히 똑똑히 대답 안 한 오촌모가 그에게는 밉게까지 보였다. 그렇지만 그의 정조(情調)는 그의 비쭉한 것을 뚫고 위에 올라오기에 넉넉하였다. 그는 좀 더 힘있게 떨리는 소리로 오촌모를 찾았다. “아주머니!” “왜?” 오촌모는 또 그렇게 대답하였다. “나두 함께 가요!” “어딜?” “서울!” “딴소리한다. 넌 편안히 누워 있어얀다.” 오촌모의 낯에는 무한한 동정이 나타났다. “그래두…… 가구 싶어요!”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내 다 구경해다 줄 거니 잘 누워 있거라. 너 다 나은 다음에 한번 들어가 실컷 돌아다니자. 그래두 지금은 못 간다.” “길 다 말랐어요?” 그는 뚱딴짓소리를 물었다. “응, 소낙비니깐 땅 위로만 흘렀지 속은 안 뱄더라.” “뒤뜰 호박두 익었지요 인제. 메칠 동안 나가 보지두 못해서…….” 그의 목소리는 자못 떨렸다. “아까 가보니깐 아직 잘 안 익었더라.” 잠깐 말은 끊어졌다. 조금 뒤에 엘리자베트는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아― 서울 가보구…….” “걱정 마라. 이제 곧 가게 되지.” “아주머니!” “왜 그러냐?” “그 애들이 아직 날 기억할까요?!” “그 애덜이라니?” “함께 공부하던 애들이요.” “하하!(한숨을 쉬고) 걱정 마라. 거저 걱정 마라. 내가 있지 않냐?인젠 그깟것들이 무엇에 쓸 데가 있어?나하구 이렇게 편안히 촌에서 사는 것이 오죽 좋으냐!아무 걱정 없이…… 지난 일은 다 꿈이다, 꿈이야!잊구 말어라.” ‘강한 자!’ 엘리자베트는 속으로 고함을 쳤다. ‘아주머니는 강한 자이고 나는 약한 자이고…… 그 사이에 무슨 차별이 있을꼬?!’ “내 다녀올 것이니 편안히 누워 있거라.” 오촌모는 말하면서 봇짐을 들고 나간다. “무얼 사다 줄꼬 원. 복숭아나 났으면 사다 줄까. 우리 딸을…….” 엘리자베트는 자기 생각만 연속하여 하였다. 스스로 알지는 못하였으나 어떤 회전기(廻轉 期) 위기 앞에 선 그는 산후(産後)의 날카로운 머리를 써서 꽤 똑똑한 해결을 얻을 수가 있 었다. ‘그렇다!나도 시방은 강한 자이다. 자기의 약한 것을 자각할 그때에는 나도 한 강한 자이 다. 강한 자가 아니고야 어찌 자기의 약점을 볼 수가 있으리요?!어찌 알 수가 있으리요?!(그의 입에는 이김의 웃음이 떠올랐다.) 강한 자라야만 자기의 약한 곳을 찾을 수가 있다. 약한 자의 슬픔!(그는 생각난 듯이 중얼거렸다.) 전의 나의 설움은 내가 약한 자인 고로 생 긴 것밖에는 더 없었다. 나뿐 아니라, 이 누리의 설움, 아니 설움뿐 아니라 모든 불만족, 불 평 들이 모두 어디서 나왔는가?약한 데서!세상이 나쁜 것도 아니다!인류가 나쁜 것도 아 니다!우리가 다만 약한 연고인밖에 또 무엇이 있으리요. 지금 세상을 죄악세상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니!우리 사람이 약한 연고이다!거기는 죄악도 없고 속임도 없다. 다만 약한 것!약함이 이 세상에 있을 동안 인류에게는 싸움이 안 그치고 죄악이 안 없어진다. 모든 죄악 을 없이하려면은 먼저 약함을 없이하여야 하고,지상낙원을 세우려면은 먼저 약함을 없이 하여야 한다. 만일 약한 자는, 마지막에는 어찌 되노?……이 나!여기 표본이 있다. 표본생활 이십 년 (그는 생각난 듯이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참 약했다. 일 하나라도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어디 있는가!세상 사람이 이렇다 하니 나도 이렇다, 이 일을 하면 남들은 나를 어 찌 볼까 이런 걱정으로 두룩거리면서 지냈으니 어찌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으리요!하고 싶은 일은 자유로 해라. 힘써서 끝까지!거기서 우리는 사랑을 발견하고 진리를 발견하리 라!‘그렇지만 강한 자가 되려면은……!’ 그는 생각하여 보았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사랑하라!’ (그는 기쁨으로 눈에 빛을 내었다.) 그렇다!강함을 배는 태(胎)는 사랑!강함을 낳는 자는 사랑!사랑은 강함을 낳고, 강함은 모든 아름 다움을 낳는다. 여기, 강하여지고 싶은 자는, 아름다움을 보고 싶은 자는, 삶의 진리를 알 고 싶은 자는,인생을 맛보고 싶은 자는 다 참사랑을 알아얀다. 만약 참 강한 자가 되려면은?사랑 안에서 살아야 한다. 우주에 널려 있는 사랑, 자연에 퍼 져 있는 사랑,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사랑!‘그렇다!내 앞길의 기초는 이 사랑!’ 그는 이불을 차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의 앞에는 끝없는 넓은 세계가 벌여 있었다. 누리 에 눌리어 살던 그는 지금은 그 위에 올라섰다.그의 입에는 온 우주를 쳐누른 기쁨의 웃음 이 떠올랐다. 출전:창조1~2(191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