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눈을 아무 데로 향하든지 어떤 그림자는 거기 벌려 있었다.그가 자든지 깨든지 어떤 그림자는 거기서 움직였다. 이렇게 엘리자베트는 사흘을 지냈다.그러는 동안 다함이 없는 철학이 감추여 있는 것 같고도 아무 뜻이 없는 헛말 같이도 생각 되는 말구가 흔히 무의식히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표본생활 이십 년!’ 그는 이 말을 여러 번 거푸 하였다. 이렇게 사흘째 되는 저녁,복거리 낮보다도 더 훈훈 타는 저녁,등과 사지 맨끝에서 시작하 여 짜르륵 온몸에 도는 추위의 쾌미를 역증으로 받으면서 잠과 깸의 가운데서 돌던 엘리자 베트는 오촌모의 소리에 놀라 흠칠 하면서 깨었다. “왜 그리 앓는 소리를 하냐?(혼자말로) 탈인지 무엇인지 낫지두 않구.” “아― 유― 죽겠다아― 하아―” 엘리자베트는 눈을 감은 채로 아주머니의 소리 나는 편으로 돌아누우면서 신음했다.그렇 지만 그에게는 아프리라 생각하는 데서 나온 아픔밖에는 아픔이 없었다. “왜 그래?참 앓는 너보다두 보는 내가 더 속상하다. 후!” 오촌모도 한숨을 쉰다. “아이구 덥다!” 오촌모는 빨리 부채를 집어서 엘리자베트를 부치면서 말했다.“내 부쳐 줄 것이니 일어나서 이 오미잣물을 마세 봐라.” 오미자라는 소리를 들은 그는 귀가 버썩하였다.어렸을 때부터 오미자를 좋아하던 그는 이 불 속에서 꿈질꿈질 먹을 준비를 시작하였다.오늘은 그의 머리는 똑똑하여졌다. 그림자가 안 보였고 아픔도 덜어졌다.오촌모는 자기도 한 숟갈 떠먹어 본 뒤에 권한다. “아이구 달다. 자 먹어 봐라.” 엘리자베트는 눈을 뜨고 엎디어서 오미잣물을 마셨다.새큼하고 단 가운데도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내음새를 가진 오미잣물은 병인인 엘리자베트에게 위에 없는 힘을 주었다.그는 단숨에 한 사발이나 되는 물을 다 마셔 버렸고 도로 누웠다. “맛있지?” “네.” “그런데 어떠냐, 아프기는?” 엘리자베트는 다만 씩 웃었다. 다 큰 것이 드러누워서 다 늙은 아주머니를 속상케 함에 대 한 미안과,크담한 것이 ‘ㅤㅇㅡㄺㅤㅇㅡㄺ’ 앓은 부끄러움이 합하여 낳은 웃음을 그는 다만 감추지 않 고 정직하게 웃은 것이다. “오늘은 정신 좀 들었냐?며칠 동안 별한 소릴, 어더런 소릴 하던지?…… 응!…… 응!무얼 ‘표분 생울 이십 년’이라던지?” “표본생활 이십 년!” 엘리자베트는 생각난 듯이 무의식히 소리를 내었다. “응!그 소리 그 소리!” 오촌모도 생각난 듯이 지껄였다. “아이 덥다!” 엘리자베트는 이불을 차 던지고 고함을 쳤다. “응, 부쳐 주지.” 어느덧 부채질을 멈추었던 오촌모는 다시 부치기 시작했다.속에서 나오는 태우는 듯한 더움과 밖에서 찌르는 무르녹이는 듯한 더위와 사늘쩍한 부채 바람이 합하여,엘리자베트의 몸에 쪼르륵 소름이 돋게 하였다.소름 돋을 때와 부채의 시 원한 바람의 쾌미는 그에게 졸음이 오게 하였다.그는 구름 타고 하늘에 올라가는 맛으로 잠과 깸의 가운데서 떠돌고 있었다.몇 시간 지났는지 몰랐다. 무르녹이기만 하던 날은 소낙비로 부어 내린다.그리 덥던 날도 비가 오면서는 서늘하여졌다. 방 안은 습기로 찼다.구팡에 내려져서 튀어나는 물방울들은 안개비와 같이 되면서 방 안으로 몰려 들어온다.그는 눈을 번쩍 떴다. 어느덧 역한 내음새 나는 모기장이 그를 덮었고 그의 곁에는 오촌모 가 번뜻 누워서 답답한 코를 구르고 있었다.위에는 불티를 잔뜩 앉히고 그 아래서 숨찬 듯 이 할락할락하는 석유 램프는 모기장 밖에서 반딧불같이 반짝거리며 할딱거리고 있었다.‘가는 목숨으로라도 살아지는 껏 살아라.’ 그 램프는 소곤거리는 것 같다.엘리자베트는 일어나서 요강을 모기장 밖에서 들여왔다.한참 타고 앉았다가 ‘악’ 소리를 내고 그는 엎으러졌다. 가슴은 뛰놀고 숨도 씩씩하여졌다.마음은 무한 설렁거렸다. 맥도 푹 났다.한참 엎디어 있다가 그는 생각난 듯이 벌떡 일어나서 요강을 내어놓고 번갯불과 같이 빨리 그 속에 손을 넣어서 주먹만한 핏덩이를 하나 꺼내었다.‘내 것.’ 그의 머리에 번갯불과 같이 이 생각이 지나갔다.그의 머리에는 모순된 두 가지 생각이 일어났다. ‘내 것.’ 참 자식에 대한 사랑이 그 핏덩어리에게 일어났다. ‘이것 때문에…….’ 그는 그 핏덩이에 대하여 무한한 미움이 일어났다. ‘이것도 저 아니꼬운 남작의 것, 나는 이것 때문에…….’ 이 두 가지 생각의 반사작용으로 그는 핏덩이를 힘껏 단단히 쥐었다.거기는 미움이 있고 사랑이 있었다. 그는 그 핏덩이를 씹어 먹고 싶었다.거기도 미움이 있고 사랑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쥔 채로 드러누웠다.맥이 나서 앉아 있을 힘이 없었다.드러누운 그에게는 얼토당토 않은 딴 생각이 두어 가지 머리에 났다.이것도 잠깐으로 끝 나고 잠이 들었다.이삼 푼의 잠이 그를 슬치고 지나간 뒤에 그는 눈을 번쩍 뜨면서 무의식히 중얼거렸다. “표본생활 이십 년!” 그 다음 순간 그에게는 별한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약한 자의 슬픔!’ ‘천하에 둘도 없는 명언이루다.’ 그는 생각하였다. 그는 이 문제를 두고 논문 비슷이,소설 비슷이 하나 지어 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는 생 각하여 보았다.자기의 설움은 약한 자의 슬픔에 다름없었다.약한 자기는 누리에게 지고 사회에게 지고 ‘ 삶’에게 져서,열패자(劣敗者)의 지위에 이르지 않았느냐?!약한 자기는 이환에게 사랑을 고백지 못하고 S와 혜숙에게서 참말을 듣지 못하고 남작에게 저항치를 못하고 재판석에서 좀더 굳세게 변론치를 못하여 지금 이 지경을 이르지 않았느냐?!‘그렇지만 이것은 밖이 약한 것이다. 좀더 깊이, 안으로!’ 그는 생각하였다. 자기의 아직까지 한 일 가운데서 하나라도 자기게서 나온 것이 어디 있느냐?반동(反動) 안 입고 한 일이 어디 있느냐?남작 집에서 나온 것도 필경은 부인이 좀더 있으라는 반동 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병원 안에 들어간 것도 필경은 집으로 돌아올 전차가 안 보임에 있지 않으냐?병원으로 향한 것도 그렇다. 재판을 시작한 것은?오촌모가 말리는 반동을 받았다!모든 일이 다 그렇다!“이십세기 사람이 다 그렇다!” 그는 힘있게 중얼거렸다. “어떻든…… 응!그렇다!문제는 ‘이십세기 사람’이라고 치고,첫줄을 ‘약한 자의 슬픔’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줄을 ‘현대 사람의 다의 약함’으로 끝내자.” 그는 자기 짓던 글을 생각하고 중얼거렸다. ‘표본생활 이십 년이란 구는 꼭 넣어야겠다.’ 그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글을 속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이리 짓고 저리 지어서,이만하면 완전하다 생각할 때 그는 마지막 구를 소리를 내어서 읽 었다. “현대 사람 다의 약함!” 그런 다음에는 그의 머리에 한 공허가 생겼다.그 공허가 가슴으로 퍼질 때에 그는 맥이 나 고 발끝과 손끝에서 그 공허가 일어날 때에 그는 눈을 감았다.눈이 무한 무거워졌다. 그 공허가 온몸에 퍼질 때에 그는 ‘후―’ 숨을 내어쉬면서 잠이 들었다.
12
“저런!원 저런!” 이튿날 아침 엘리자베트에게 어젯밤 변동을 듣고 눈이 둥그래져서 그 핏덩이를 들여다보 며 오촌모는 지껄였다.엘리자베트는 탁 그 핏덩이를 빼앗아서 이불 아래 감춘 뒤에 낯을 붉히며 이유 없이 씩 웃 었다.“어떻든 네 속은 시원하겠다. 밤낮 떨어지면 떨어지면 하더니-―--” 오촌모는 비웃는 듯이 입살을 주었다.아깟번에 웃은 엘리자베트는 이번에도 웃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그는 억지로 입과 눈 으로만 일순간의 웃음을 웃은 뒤에 곧 낯을 도로 쪽 폈다.그리고 미안스러운 듯이 오촌모 의 낯을 들여다보았다.오촌모의 낯에는 가련하다는 표정이 똑똑히 보였다. ‘역시 가련한 것이루구나!’ 그는 속으로 고함을 쳤다. ‘그것도 내 것이 아니냐!?’ 어머니가 자식에게 가지는 육친의 정다움이 엘리자베트의 마음에 일어났다.그는 몰래 손 을 더듬어서 겁적겁적하고 흐늘거리는 그 핏덩이를 만져 보았다.‘어디가 엉덩이구 어디가 머리 편인고?’ 하고 그는 손가락으로 핏덩이를 두드리고 쓸어 주고 있었다.차디찬 핏덩이에서도 엘리자 베트는 다스한 맛이 올라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이란 이런 것이루다.’ 그는 생각하였다. 물끄러미 한참 그를 들여다보던 오촌모는 도로 전과 같은 사랑의 낯이 되며 생각난 듯이 말했다.“잊었댔다. 오늘은 장날이 되어서 서울 잠깐 들어갔다 와야겠다. 무엇 먹고 싶은 것은 없 냐?있으면 말해라. 사다 줄 거니…….” “없어요.” 엘리자베트는 팔딱 정신을 차리며 무의식히 중얼거렸다.‘서울’ 소리를 듣고 그는 갑자기 가슴이 뛰놀기 시작하였다.‘저런 노파가 다 서울을 다니는데 내가 어찌…….’ 그는 오촌모를 쳐다보면서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오촌모를 찾았다. “아주머니!” “왜?” “서울 들어가세요?” 그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렸다. “응.” 엘리자베트는 비쭉하여졌다.오촌모의 ‘응’이란 대답뿐은 그를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응, 들어가겠다’든지 ‘응,다녀올란다’든지 좀더 친절히 똑똑히 대답 안 한 오촌모가 그에게는 밉게까지 보였다.그렇지만 그의 정조(情調)는 그의 비쭉한 것을 뚫고 위에 올라오기에 넉넉하였다.그는 좀 더 힘있게 떨리는 소리로 오촌모를 찾았다. “아주머니!” “왜?” 오촌모는 또 그렇게 대답하였다. “나두 함께 가요!” “어딜?” “서울!” “딴소리한다. 넌 편안히 누워 있어얀다.” 오촌모의 낯에는 무한한 동정이 나타났다. “그래두…… 가구 싶어요!”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내 다 구경해다 줄 거니 잘 누워 있거라.너 다 나은 다음에 한번 들어가 실컷 돌아다니자. 그래두 지금은 못 간다.” “길 다 말랐어요?” 그는 뚱딴짓소리를 물었다. “응, 소낙비니깐 땅 위로만 흘렀지 속은 안 뱄더라.” “뒤뜰 호박두 익었지요 인제. 메칠 동안 나가 보지두 못해서…….” 그의 목소리는 자못 떨렸다. “아까 가보니깐 아직 잘 안 익었더라.” 잠깐 말은 끊어졌다.조금 뒤에 엘리자베트는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아― 서울 가보구…….” “걱정 마라. 이제 곧 가게 되지.” “아주머니!” “왜 그러냐?” “그 애들이 아직 날 기억할까요?!” “그 애덜이라니?” “함께 공부하던 애들이요.” “하하!(한숨을 쉬고) 걱정 마라. 거저 걱정 마라. 내가 있지 않냐?인젠 그깟것들이 무엇에 쓸 데가 있어?나하구 이렇게 편안히 촌에서 사는 것이 오죽 좋으냐!아무 걱정 없이…… 지난 일은 다 꿈이다, 꿈이야!잊구 말어라.” ‘강한 자!’ 엘리자베트는 속으로 고함을 쳤다.‘아주머니는 강한 자이고 나는 약한 자이고…… 그 사이에 무슨 차별이 있을꼬?!’ “내 다녀올 것이니 편안히 누워 있거라.” 오촌모는 말하면서 봇짐을 들고 나간다.“무얼 사다 줄꼬 원. 복숭아나 났으면 사다 줄까. 우리 딸을…….” 엘리자베트는 자기 생각만 연속하여 하였다.스스로 알지는 못하였으나 어떤 회전기(廻轉 期) 위기 앞에 선 그는 산후(産後)의 날카로운 머리를 써서 꽤 똑똑한 해결을 얻을 수가 있 었다. ‘그렇다!나도 시방은 강한 자이다. 자기의 약한 것을 자각할 그때에는 나도 한 강한 자이 다.강한 자가 아니고야 어찌 자기의 약점을 볼 수가 있으리요?!어찌 알 수가 있으리요?!(그의 입에는 이김의 웃음이 떠올랐다.) 강한 자라야만 자기의 약한 곳을 찾을 수가 있다. 약한 자의 슬픔!(그는 생각난 듯이 중얼거렸다.) 전의 나의 설움은 내가 약한 자인 고로 생 긴 것밖에는 더 없었다.나뿐 아니라, 이 누리의 설움, 아니 설움뿐 아니라 모든 불만족, 불 평 들이 모두 어디서 나왔는가?약한 데서!세상이 나쁜 것도 아니다!인류가 나쁜 것도 아 니다!우리가 다만 약한 연고인밖에 또 무엇이 있으리요. 지금 세상을 죄악세상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니!우리 사람이 약한 연고이다!거기는 죄악도 없고 속임도 없다. 다만 약한 것!약함이 이 세상에 있을 동안 인류에게는 싸움이 안 그치고 죄악이 안 없어진다.모든 죄악 을 없이하려면은 먼저 약함을 없이하여야 하고,지상낙원을 세우려면은 먼저 약함을 없이 하여야 한다. 만일 약한 자는, 마지막에는 어찌 되노?……이 나!여기 표본이 있다. 표본생활 이십 년 (그는 생각난 듯이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참 약했다.일 하나라도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어디 있는가!세상 사람이 이렇다 하니 나도 이렇다,이 일을 하면 남들은 나를 어 찌 볼까 이런 걱정으로 두룩거리면서 지냈으니 어찌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으리요!하고 싶은 일은 자유로 해라. 힘써서 끝까지!거기서 우리는 사랑을 발견하고 진리를 발견하리 라!‘그렇지만 강한 자가 되려면은……!’ 그는 생각하여 보았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사랑하라!’ (그는 기쁨으로 눈에 빛을 내었다.) 그렇다!강함을 배는 태(胎)는 사랑!강함을 낳는 자는 사랑!사랑은 강함을 낳고, 강함은 모든 아름 다움을 낳는다. 여기, 강하여지고 싶은 자는,아름다움을 보고 싶은 자는, 삶의 진리를 알 고 싶은 자는,인생을 맛보고 싶은 자는 다 참사랑을 알아얀다. 만약 참 강한 자가 되려면은?사랑 안에서 살아야 한다. 우주에 널려 있는 사랑, 자연에 퍼 져 있는 사랑,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사랑!‘그렇다!내 앞길의 기초는 이 사랑!’ 그는 이불을 차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의 앞에는 끝없는 넓은 세계가 벌여 있었다.누리 에 눌리어 살던 그는 지금은 그 위에 올라섰다.그의 입에는 온 우주를 쳐누른 기쁨의 웃음 이 떠올랐다. 출전:창조1~2(191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