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자
1
우리 둘이 ─ C와 나 ─ 명월관(明月館) 지점에 왔을 때는 오후 일곱 시가 조금 지냈을 적이었다.봄은 벌써 반이 가까웠건만 찬바람이 오히려 사람의 살점을 에는 작년 이월 어느 날이다. 우리가 거기 간 것은 우리 사( 社)에 처음 들어온 K군의 초대를 받은 까닭이었다.이런 요리점에 오기가 그 날이 처음은 아니다. 처음이 아니라면 많이 다닌 것 같지만, 그런 것도 아니니 이번까지 어울려야 겨우 세 번밖에는 더안 된다.나는 이런 연회석에 참례(參禮)할 적마다 매우 즐거웠다. 길다란 요리상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웃고 떠들며 술도 마시고 요리도 먹는 것이 좋았음이라.아니 그것보담도 나의 가슴을 뛰게 한 것은 기생을 볼 수 있음이었다. 친할 수 있음이었다."무엇 때문에?"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나는 잠깐 나의 경우를 설명해 두고 싶다. 나는 일본에서 공부를 하다가 중도에 폐학(廢學) 안 할 수 없게 된 사람이다.그것은 어느덧 이 년 전의 일이다. 나도 공부할 적에는 모범적 학생, 유망한 청년이란 칭찬을 들었었다. 기실 그것이 허예(虛譽)는 아니었다.남은 히비야( 日比谷[ 일 비곡]) 운동장에서 뛰고, 아사쿠사 구(淺草區[천초구]) 놀이터에서 정신을 잃을 때에도 나는한 자라도 알려고 하며 두 자라도 배우려 하였다.나는 공일도 모르고 휴일에도 쉬지 않았었다. 나의 유일의 벗은 서책뿐이었다. 나에게 위안을 주고 오락을 주는 것은 오직 지식뿐이었다.창 틈으로 새어 오는 찬바람에 곤( 困) 한 잠이 깨어지고, 선선한 달빛이 찬물처럼 외로운 벼개를 적시는 새벽,사향(思鄕)의 눈물을 뿌리다가도 갑자기 머리맡에 두었던 책을 집어 들었었다. 이대도록 나는 공부에 열광적이었다. 공부만 하고 보면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다.내가 숭배하는 영웅호걸도 따를 수 있다. 그보담 지 내 간들 무엇이 어려우라!나는 까마득하나마 광채 찬란한 장래를 꿈꾸었다. 나의 환영은 희망의 붉은 꽃이 필 대로 핀 꽃밭 사이로 떠돌았었다. 물론 나는 이 꿈을 믿었었다. 이 환영을 참으로 여기었다. 그러나!심술궂은 운명은 그것을 흥뎅이치고 말아다. 불의에 오촌 당숙에 별세하시니 나는 그 의입후( 入後) 가 아니될 수 없었다. 팔십이 넘은 종조모님의 홑손자가 되고,삼십이 남짓한 당숙모님의 외아들이 되고 말았다. 인제는 집을 떠날 수 없 다.바다를 건너 일본에 가기는커녕 며칠 시골만 다녀와도 할머님과 어머님이 우시며 부시며 집안이 호젓한 것을 하소연하신다. 꿈은 깨어졌다. 환영은 사라졌다.광명이 기다리던 앞길에 잿빛 안개가 가리었다. 희망의 불꽃은 그물그물 사라져 간다. 날이 감을 따라 달이 감을 따라 가슴을 캄캄하게 하는 실망의 구름장만 두터워 갈 뿐이었다. 나의 혼은 얼마나 이 크나큰 손실에 오열하였는지 신음하였는지!마츰내 돛대가 꺾어진 배 모양으로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게 되고 말았다."되는 대로 되어라!위인이 다 무엇이랴!인생이란 물거품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밤새도록 잠 한숨 아니 자고 머리 속에서 온갖 신기루를 쌓아 올리다가 그것이 싸늘한 현실에 무참히 깨어질 때 이런 자포자기하는 생각을 일으키 기도 하였다.공부할 동안 끊었던 담배도 어느 결엔지 잇(續[속])게 되었다. 때때로,"화난다!화난다!" 하고는 술을 찾기도 하였다. 술은 본래 못 먹음은 아니니, 어릴 적부터 맛도 모르면서 부친의 잡수실 술을 도적해서 한 모금 두 모금 홀짝홀짝 마셨다.그래도 중간에 그것을 절금(切禁)하였으니 정말 공부에 심신을 바친 나는 그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담배와 술을 먹게 된 때는 집에 나온 지 한일 년이나 되었으리라.술을 먹는대도 요리점에서 버듬적하게 먹을 처지가 아니라(그런 처지야 맨 들려면 맨들 수 있지만은 그까지는 아직 타락하지 않았었다.)십 전 어치 나이십 전어치나 받아다가 집에서 자작(自酌)할 뿐이었다.거주소수 수 갱수( 擧酒消愁愁更愁) 란 격으로 주기(酒氣)는 도리어 화증을 돋운다. 화 풀 곳은 없다. 어찌 되든 집을 휙 나오는 수밖에 없다. 나오기는 나왔지만,발 들릴 곳이 없다. 서울서 학교에 다닌 일도 없고 또 교제를 싫어하는 나이라 어느 친구 하나 없다. 있대도 나의 화풀이 받을 벗은 아니다.지향 없이 종로 네거리를 헤맬 따름이다. 남산공원에나 올라가서 저도 모를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한껏 흥분하여 혼자 우는 것이 고작 이었다.그 후 내가 ○○사(社)에 들어가자 오늘처럼 사우(社友)의 초대를 받아 요리 점에 간 일이 있다. 거기서 나는 기생이란 물건을 보았다.여염집 여자에게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어여쁜 표정, 옷이 몸에 들어 붙은 듯한 아름다운 맵시, 교묘한 언사(言辭), 유혹적 웃음이 과연 그럴듯하였다.묵묵히 보 고만 있는 나에게도 위안을 주고 쾌락을 주는 것 같았다. 답답하던 가슴 이한결 풀리는 듯싶었다. 싸늘하던 심장에 따뜻한 피가 흐르는 듯싶었다. "이럴 때에 기생이나 아는 것이 있었으면……." 쓸쓸히 덮쳐오는 환멸의 비애에 가슴을 물어뜯기도 하다가 흔히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전자(前者)에는 기생이라면 남의 피를 빨고 뼈를 긁어내는 요물이고 사갈(蛇蝎)이라 하였었다. 그런 데 드나드는 사람조차 사람으로 알지 않았었다.'부랑자’,'타락자’……말 못할 인간이라 하였었다."유위유망(有爲有望)한 꽃다운 청춘에 무슨 노릇을 못해서 화류계에서 세월을 보낸단 말입니까?그들은 제 일평생을 그르칠 뿐만 아니라 그 해독을 제 자손에게까지 끼치어 제 가족을 멸망시키고 제 민족을 멸망 시키는, 사회의 죄인이고 인류의 죄인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연설회에서 얼굴을 붉혀 가며 이렇게까지 절규도 한 일이 있다. 그때의 나, 지금의 나, 변한들 어찌 이다지도 변하랴!인제 길거리에 혹 기생들과 서로 지나치면 문득 가슴이 꿈틀함을 느끼었다.나는 그 치마 뒷자락을 홀린 듯이 돌아보기도 하고 슬쩍 코에 앉히는 그 매력 있는 향기를 주린듯이 들여 마시기도 하였다. 어느날 나는 마츰내 소위 토벌(討伐)까지 하게 되었다.그것은 사우( 社友) C가 심심 파적(破寂)이란 구실 밑에 놀러를 가자 함이었다.이 C란 이는 몸집이 작고 짧으며 머리가 곱슬곱슬한 사람인데 그 홍 갈색으로 반질반질하는 얼굴은 무른 것 단단한 것에 다 달궈 보았다, 하는 듯 하였다.나는 그 재사영롱(才思玲瓏)한 농담을 좋아하며 또 나보담 근 십년 맏 이언만 조금도 연장자로 자처치 않는 데 감복하였었다.그리고 또 그 의 여관이 우리 집 가까이 있는 때문에 우리는 자조로이 상종하게 되었다. 그도 몇 해 전 주머니가 넉넉할 때에는 화류계에 많이 놀았다 한다. 그의 말을 빌리건대,그는 화류계리(花柳界裡)에 백전노장(百戰老將)이었다. 우리는 어둠침침한 행랑 뒷골로 돌았다. 나는 어데가 어데인지 잘 알지도 못 하였다. 다만 C의 뒤만 따른다.C의 번지(番地) 보는 성냥불이 몇 번 번쩍 하였다. 그럴 적마다 나의 가슴에도 희망과 기대가 번쩍였다. 그래도, ' 나는 같이 아니 왔소.’ 라고 변명하는 듯이 늘 몇 걸음 물러서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번지는 자꾸 틀리었다. 어느 때는 속 깊이 들어갔던 골목을 도로 나오기도 하였다.헛되이 성냥 개피만 허비하였다. 인제 희망은커녕, ' 웬걸 거길라구.’ 미리 실망조차 할 지경이다. 그리고 C가 속히 그 집이 그 집 아닌 줄 알 고 딴 데로 갔으면 하였다.다리가 아프다. 찾던 집을 찾기는 찾았다.C는 대문을 살그머니 열더니 그 안으로 사라졌다."이리 오너라." 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웬일인지 나의 가슴은 닥쳐올 중대한 일을 기다리는 사람 모양으로 뛰놀았다. 펄떡 하고 행랑방 문 여는 소리가 난다."기생 있소?""기생 집 아니야요." 하는 퉁명스러운 말이 끝나자마자, 탁하고 성낸 듯이 문을 닫는 것 같다."대단히 잘못했구려, 고런 것, 나하고 오늘 저녁에 만나자 해 놓고 고만 이사를 간담?" C는 비위 좋게 거짓말을 뿌리고 웃으며 나왔다. 그 날 밤 원정은 실패 이었다."공연히 남을 끌고만 다니지." 도로 그 골목을 걸어나오며 나는 C를 원망하였다. "똑 보아야 멋인가?이렇게 다니는 것이 운동도 되고 좋지. 우리가 어데다니고 싶어 다니나, 하도 갑갑스러워서 그러지.""그것은 그래." 나는 동의를 하면서도 어째 무엇을 잃은 듯이 섭섭함을 어찌할 수 없었다.
2
시간은 이미 일곱 점 반이나 되었건만 손들은 오히려 모여 들지 않았다. 너르다는 명월관 C지점 일호실은 쓸쓸하게 비어 있다. 손이라고는 C와 나외에 우리를 초대한 K와,그의 절친한 친구로 이 연회의 설계자이고 준비 원인 D가 있을 뿐이었다. 아니 그들뿐은 아니다. 우리가 들어올 때 밥을 먹다가 일어선 기생 둘도 있다.그의 하나는 한 번 본 일이 있는 계선(桂仙)이란 것이었다. 그는 이미 기생으론 노자(老子)를 붙일 만한 낫세이다. 삼십 가까웠으리라.그도 한참 당년에는 어여쁜 자태와 능란한 가무로 많은 장부의 간장을 녹이었다 한다. 어느 이름난 대관을 감투 끝까지 빠지게도 맨들었다 한다.그러나 지금 보는 나의 눈에는 그런 일이 거짓말인 듯싶을 만큼 그의 얼굴은 사람을 끄는 무슨 힘도 없었다. 두 뺨은 부은 듯이 불룩하고 이마는 민 듯이 훌렁 하였다.더구나 그 시들시들한 살빛에는 벌써 늙은 그림자가 깃들인 것 같다.하건만 여성으로는 차마 못 들을 음담외설(淫談猥設)이 날 적마다 그 검은 눈을 스르르 감아 붙이며,'흥흥’하는 콧소리와 함께 그 뜨거운 입술을 비죽 비죽하는 것은 음탕 그것이었다. 저기 옛날 솜씨의 남은 자최를 찾으려면 찾을 수 있을는지!그렇다고 그에게 나와 고향을 같이한 명예 있음조차 부정할 수 없다. 더구나 그가 나를 처음 볼 때,"저 이가 아모 지배인의 아우가 아닌가요?" 라고 C에게 물었으리만큼 그는 지금 어느 시골 ○○회사 지배인으로 있는우리 형님을 잘 알았다. 어린 나를 몇 번 보기조차 하였다 한다.따라서 그는 기생 중 나를 아는 오즉 한 사람이었다. 또 하나는 처음 보는 기생이었다. 나의 주의는 처음부터 그에게로 끌리었다.공평하게 말하면 그 또한 미인 축에 끼이지는 못할는지 모르리라. 이마는 조금 좁고 코끝은 약간 옥은 듯하였다. 하나 그 어여쁜 뺨볼과 귀여운 입 언 저리가,그런 흠점을 감추고도 남았었다. 그것보담 그 어린 우유( 牛乳) 모양으로 하늘하늘한 앳된 살이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적어도 그 날 밤에는 그렇게 보였다. "너 요사이 나지미 많이 정했니?그래 나는 네 나지미 될 자격이 없 단말이냐?나도 좀 되어 보자꾸나, 응?" 몇 만금(萬金) 부모의 재산을 오입의 구덩에 쓸어 넣고, 그 대신 몇 곡조 노래와 몇 마디 농담을 얻은 D는, 그 통통하게 살찐 손을 늘여 그 기생의 손목을 잡고 ,빙글빙글 웃어가며 이런 말을 하였다. 그들은 밥을 다 먹고 상도 치운 때이었다."네 좋습니다." 하고 그 기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그래 정말이냐?""네, 좋습니다." 하고 대어드는 D를 밀치며 문득 소리를 쳐 웃는다.입술이 귀염성 있게 방싯 열리며 하얀 쌀낟같이 찬찬한 이빨 사이에 다문다문 섞인 금니가 유혹적으로 번쩍인다. 나의 입술에도 어느 결에 웃음이 흘렀다."흥흥, 논을 팔란 말이지, 밭을 팔란 말이지?에이고 요런 것." 하고 D는 손으로 그의 뺨을 치고, 쳤다느니보담 스치고 물러 앉는다."이리 좀 오게그려." 기생을 보면 감질이 나서 못 견디는 C는 애교의 웃음을 흘리며 그 기생을 부른다. 그 때 나는 C와 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슴이 출렁하였다. "우리가 어째 여태껏 서로 만나지 못했담?" 채 앉지도 않은 그의 손을 잡아다리며 C는 말을 붙이기 시작하였다."이름이 무엇?""춘심이야요.""고장이 어데야?""○○이야요." 나는 먼저 그가 나와 한 고을 사람임을 기뻐하였다."서울 온 지 얼마나 되었나?""한 삼 년 되지요.""이건 참 내가 너무 고루하군." C는 인제 내 판이라 하는 듯이 일변 몸을 그리로 다그며 일변 그 독특한 농담을 늘어놓기 비롯하였다.C의 하는 양은 마치 열 번 스무 번 보아 친히아는 듯하였다. 나는 물끄러미 그들의 하는 양을 보고만 있었다.나의 눈에는 요술쟁이가 입으로 오색 종이를 뽑아냄을 구경하는 촌뜨기의 그것 모양으로 의아(疑訝)와 경탄의 빛이 있었으리라. 보기 사나웁기도 하였다. 부럽 기도 하였다.어찌하면 저렇게도 말을 잘 붙일 수 있는가 하고, 가는 손을 함부로 쥘 수 있는가, 한시바삐 C의 대신에 내가 그와 말을 하였으면, 손을 쥐었으면 하였다.선망(羨望)에 타고 있는 나의 눈은 맛난 음식을 먹는 어른의 입만 바라보는 어린애의 그것 같았으리라. 어느덧 C의 팔은 비스듬히 춘심을 안고 있다.사랑을 속살거리는 애인들처럼 C의 입술은 춘심의 귀에 닿을 듯 말 듯하다."에그, 점잖은 이가 그게 무슨 말씀이야요?" 하고 춘심은 몸을 빼친다."점잖길래 그런 말을 하지, 어린애가 그런 소리를 하던?" 하고 C는 제 말솜씨에 만족한 것같이 빙그레 웃었다. 춘심은 나에게 곁눈질하며 빈정대는 듯이 방긋 웃는다. 마츰 그 순간인즉, 나도 춘심을 보고 웃을 때이었다.그것은 C의 재담 때문이 아니다. 아까부터 생각하고 생각하던 춘심에게 건넬 묘한 말을 얻고 나오는 줄 모르게 띠운 웃음이라. 그런데 의외에 두 웃음은 마주쳤다.어째 내 마음을 춘 심에게 꿰뚫려 보인 듯싶어 나는 하염없이 얼굴을 붉히었다. 그래도 나의 가슴에는 기쁜 물결이 술렁하고 퍼지는 듯하였다.'나를 좋아하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나의 피를 끓게 하였다. 우연히 오고 간 이 웃음이 둘 사이에 거멀못을 친 듯이 그와 나를 달라붙 게 하는 듯싶었다. 나는 고만 무조건으로 그가 정다웠다.뜻도 모를 무슨 말이 불쑥 올라온다. 그 찰나이었다. 밀창이 고이 열리며 보얀 얼굴과 푸른 치마가 얼른한다.그 다음 순간에 나는 누구를 향하는지 모르게 한 팔을 짚고 인사하는 기생을 보았다. 그 기생도 계선이보담 나이 많았으면 많았지 어리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 얼굴이야!분으로 메이고 메인 보람도 없이 드문드문한 손티, 가 뭇가 뭇 한 주근깨, 깎은 듯한 뺨, 그야말로 아모렇게나 생긴 것이었다.'저까짓 것을 왜 불렀을까?’ 나는 속으로 의아히 여길 지경이었다."형님!인제 오셔요?" 춘심은 반갑게 부르짖으며 불현듯 몸을 일으킨다. 몹시 시달리는 C 로부터 벗어날 핑계 얻음을 못내 기뻐하는 듯이.C는 아모 일도 없었던 모양으로 시침을 뚝 따고 그 곱슬곱슬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제야 손들이 모이지 않음을 깨달은 것같이,"왜들 오지를 않아?" 라고 하였다. 그와 나의 거리는 멀어지고 말았다. 그에게 말을 건넬 절호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자아 수십 명이나 올 터이니 그는 어느 틈에 끼일는지!누구하고 꿀 같은 이야기를 주고 받을는지!나는 하릴없이 뒷전만 보고 있을 뿐이다.'에이, 못생긴 것!’ 나는 마음속으로 애닯게 부르짖었다. 저희들끼리 모인 그들은 이야기꽃을 필 대로 되게 한다.연잎에 실비 뿌리듯 속살속살하기도 하며 때때로 옥반(玉盤)을 깨뜨리듯 때그르르 하고 웃기도 하였다. 나는 어린 듯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계선이가 눈으로 나를 가리키며 춘심이더러 무에라 무에라 하는 듯하였다. 그는 고개를 까딱까딱 하기도 하고 슬쩍슬쩍 나에게 시선을 던지기도 하였다."내 말을 하는가 보다. " 하고 나는 눈을 나리 감았다. 얼굴에 춘심의 시선을 느끼면서.
사람들은 여덟 점이나 되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서로 맞춰 둔 것같이 한 사람 뒤를 한 사람이 잇고 그 사람이 채 자리도 잡기 전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었다.어느 결에 갈고리란 갈고리는 모자와 외투가 빈틈 없이 걸리었다."인제 기생 소리나 한 마디 들읍시다." 한동안 늘 하는 인사와 무미한 담화(談話)가 끝나고 잠깐 무료한 침묵이 있은 후 누가 이런 제의를 하였다."그것 좋지요." 다른 소리가 찬성을 한다."그래 볼까요?" 그런 일이면 내가 도맡지요, 하는 듯한 얼굴로 D는 말을 하였다. 그의 쉰 듯한 소리는 뽀이는 불렀다. 퉁명스럽게 꾸짖는 듯이 뽀이에게 분부하기 시작 하였다.가야금이 들어왔다. 장구가 들어왔다. 갈강갈강한 뽀이는 가야금을 잊(忘)기도 하고, 장구가 소리가 잘 아니 나기도 하여 D에게 톡톡히 꾸중을 모시었다.하건만 그 뽀이는 '그런 야단이야 밤마다 만납니다.’ 하는 듯이 그 하이칼라 한 머리를 긁 적 긁 적하고는 허리를 굽실굽실하며 연해 연방,"네, 네." 하고 시키는 대로 하였다.먼저 춘심이가 가야금을 뜯기로 하였다. 그는 나에게 등을 향하고 줄을 검사 하기 비롯하였다."저 계집애가 왜 돌아를 앉어!" 나는 화증을 내었다. 그대도록 나는 그의 얼굴을 보기나마 언제든지 계속하고 싶었다. 줄을 고르고 저희들끼리 문의도 끝난 뒤,우는 듯한 구슬픈 가야금 가락을 맞추어 느리고 순한 춘심의 소리가 섞여 들리었다."가자가자 어서 가, 위수 건너 백로가……." 말소리는 뚝 끈치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은 그리로 몰리었다. 그리고 제각기 고대 음률에 지식이 있어 그 잘잘못을 가릴 듯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그 지식의 발표로 어느 구절에 '좋다’하여야 옳을지 정신을 모르고 있는듯 싶었다."……기경선자(騎鯨仙子)간 연후 공추월지단단 자라 등 저 반달 실어라 우리 고향을 한께 가……." 노랫가락은 멋있게 슬쩍 넘어간다.'흥흥’하는 콧소리가 여기저기서 일어난다. 나도 부지불식간에 '흥’하고 말았다. 그 노래는 마치 봄바람 모양으로나 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그 서슬에 얼어붙은 무엇이 스르르 풀리는듯 싶었다. 그 무엇이 활개를 벌리고 우줄우줄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어깨가 우쭐우쭐할 리 있으랴!이럴수록 그 노래의 임자 가보고 싶었다. 그 표정이 어떨까?그 입술이!…….'저 맞은편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는 척하고 슬그머니 그의 정면에 가 앉을까?’ 절묘한 낙상(落想)이다!그러나 나의 몸은 무엇으로 동여 맨 것같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의 눈은 박힌 듯이 그의 뒤 꼴에 어리고 있었다. 앞으로 구부릴 적마다 반질하고 빛나는 그의 머리,연분홍 숙고사 저구리 밑에서 곰실곰실 움직이는 어깨의 윤곽, 늘었다 굽혔다 하는 팔,그 꾸김 꾸김 한 치마 주름…… 이 모든 것보담도 가야금 줄 위에서 남실남실 춤추는 보얀 손가락이 나의 넋을 사르고 말았다.보면 볼수록 그 모든 것에 미(美)가 더하고 매력이 더하였다. 때때로 정신이 아찔해지며 모든 것이 한데 뒤범벅도 되었다.그 고사(庫紗)무늬가 서로 뭉켜지기도 하고 치마 주름이 한 데로 몰려지 기도 하였다. 어슴푸레한 어둠 가운데서 보얀 손가락만 파뜩파뜩 하기도 하였다. 나종에는 모든 것이 아물아물해지며, 눈앞에 불꽃이 주렁주렁 흩어진다…….
3
요리상은 들어왔다. 우리는 그것을 가운데 놓고 둘러앉았다. 기생들은 술병을 들고 서 있었다. 이윽고 비교적 나이 좀 많은 편에 두 노기(老妓)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춘심은!그는 잠깐 나의 안계(眼界)에서 사라졌다. 나는 얼른 좌석을 둘러보았다, 없다!웬일인가?그러다가 나는 마츰내 아모의 곁에도 아니 앉고 오히려 나의 등뒤에 서 있는 그를 발견하였다. 그 때의 기쁨은 여간 몇 천원 잃었던 돈을 찾은 것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찾기는 찾았지만 내 곁에 앉을지 말지는 그래도 미지수이다. 감(())이 그저 떨어지기를 기다리랴. 못 올라 따겠거든 나무를 흔들기라도 하여야 한다.그것조차 못할 지경이면 그 밑에 입이라도 벌리고 누워야 한다. 앉히려는 뜻만이라도 보여야 한다. 나는 밍그적밍그적 몸을 한편으로 밀어 그 의 앉을 자리를 비워 놓았다. 그리고 이리로 앉아요?란 말을 풍긴 눈찌로 몇번 그를 슬쩍슬쩍 쳐다보았다. 남의 눈치는 빌어먹게도 못 알아준다. 하다하다 못하여 나는 내 곁에 앉은 P에게 눈꿈쩍이를 하였다.이것은 정말 나의 피땀을 흘린 마음의 노력이었다. P는 춘심을 힐끗 쳐다보더니,"이리 앉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던졌다. 그 당장엔 그냥 뻣뻣이 서 있었다. 이 짧은 찰나가 나에게는 얼마나 길었으랴!이윽고 소루룩 코에 앉히는 향기 실린 실바람을 느낄 제, 그는 벌써 사뿐하고 나의 왼편 P의 오른편에 앉아 있었다.펄떡펄떡 고동하는 나의 가슴의 장단 맞춤으로 나의 한 옆을 스치는 그의 옷이 사르륵 하고 그윽한 소리를 내었다. 그와 나는 서로 대일 듯 말 듯이 앉게 되었다.이것은 우연인 듯 싶어도 우연이 아니다. 이 많은 사람 가운데 하필 나의 곁을 취하랴. 여기 무슨 깊은 의미가 있어야 되리라. 암만해도 나에게 마음이 있는가 보다.그렇지 않으면 나의 등뒤에 서 있을 리도 없을 것이다. 그도 나 모양으로 나를 알고 친하기를 마음 그윽이 갈망하고 있었으리라.이런 생각을 한 나는 말할 수 없는 환희를 느끼었다. 자석에 끌리는 쇠끝 모양으로 우리 둘의 사이는 점점 다가들어 갔었다.그의 팔과 가장 스치기 쉬웁도록 나의 팔은 슬며시 나려 놓이었다. 나의 손은 그 보드라운 살에 대이기 전에 먼저 그 보들보들한 옷자락에 더할 수 없는 쾌미(快味)를 맛보았다.나는 술잔을 비우고 또 비웠다. 아니 비우고 견딜 것인가. 그 힘을 빌려야만 나에게로 날아오는 행복을 꼭 잡을 수 있다. 아니라,그의 보얀 손 이재 불 동하며 방울방울이 잇딸아 떨어진 이 술이야말로 행복 그것이 아니랴!적어도 행복의 구름을 걸러 내린 감로수(甘露水)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말만 하면 속에 잡아놓은 행복이 날아갈까 두려워하는 것같이 그는 묵묵히 부어 주고 나는 묵묵히 마시었다.나의 마음은 실실이 풀어졌다. 그리면서 한껏 긴장하고 있었다. 평소 때와는 달라 술은 좀처럼 취해 오르지 않는다. 정신은 잔을 거듭할수록 더욱 말뚱말뚱해 갈 뿐이었다.그의 손을 쥐자면 서도 그의 얼굴을 보자면서도 그와 말을 하자면서도 나는 헛되이 시선을 딴데로 돌리어, 너절한 남의 말참예를 하고 있었다. 술은 벌써 열 잔이 넘어갔다.전 같으면 이미 정신 모르고 나뒹굴어졌으리라. 하지만 웬일인지 오늘 밤에는 잔을 거듭할수록 정신은 더욱 말뚱말뚱하였다. 술은 열 잔이 넘어갔다. 그제야 조금 얼큰한 듯하였다. 나는 담배 하나를 집어 들었다."성냥 없소?" 라고 나는 그에게 첫 말을 건네었다. 그것도 그의 담배 붙이는 것을 본 까닭 이었다. 그는 성냥 한 개피를 그었다. 나는 으레 붙여줄 줄 알고 담배 문 입을 내밀었다.하나 그는 불을 붙여 주려고도 않고 그것을 나에게 준다. 나는 실망도 하고 섭섭도 하였다. 하지만 붙여 달랄 용기는 없었다. 하릴없이 그것을 받았다.실망한 빛이 나의 안색에 드러났으리라. 그 다음 순간 에그 앵두빛 같은 입술이 방실 열리며, 나에게 무어라고 소근거렸는가!그는 마치 변명하는 듯이 방긋 웃으며,"불을 붙여 주면 아니 된데요." 이것은 더 의외이었다."어째 그래?""저!……." 매우 말하기 어려운 듯이 망살거리다가 또 한 번 빙글 하고는 말을 이어"저!정이 갈린대요. 왜 저!첫날밤에 신부가 신랑의 담뱃불을 붙여 주면 소박 맞는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아요?" 꿀 같은 말이다!아모리 부끄럼 많은 도련님이라 한들 이에 미쳐서야 말문이 아니 터지랴!"그러면 나에게 소박 만날까 걱정이란 말이지?" 나는 뚫을 듯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다그쳐 물었다. 그는 부끄러운 듯이 시선을 피하며 의미 있게 웃기만 한다. 그 아름다운 입술이란!모든 것을 잊고 열렬한 키스를 하고 싶었다. 그것은 못하나마 나의 손만은 어느 결에 상 밑에서 그의 녹신녹신한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이 말 끝을 잃어서는 아니 된다.무슨 말이든지 하여야 될 것 같다. 하나 아까 생각 해 놓은 절묘한 언사는 다 어데로 갔는지?씻은 듯이 잊고 말았었다.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앵무새 모양으로 남의 늘 하는 말을 되풀이하는 수밖에 없었다."이름이 무엇?""춘심이야요.""고장이 어데?""○○이야요.""나도 ○○사람이야.""참말씀이야요?""그러면 거짓말 할까?""네에……." 하고 고개를 까딱까딱하였다. 그의 손가락이 살금살금 나의 손 안을 누르고있다. 나는 또 술을 한 잔 마시었다."자꾸 술만 잡수셔서 어찌합니까?진지를 좀 드시지요." 담긴 밥이 그대로 남아 있는 밥 보시기를 가리키며 그는 잔상스럽게 권하였다."나는 괜찮아. 참, 밥 좀 먹지?""싫어요." 그는 고개를 흔든다. 나는 밥 보시기를 그의 앞에 갖다 놓으며,"시장 할 것을 그래, 좀 먹어요.""아니, 먹기 싫어요.""그러면 무엇 딴 것이라도 먹어야지.""아까 잔뜩 먹었어요." 우리는 벌써 사랑이 흠씬 든 애인끼리 하는 모양으로 서로 생각하며 서로 아끼고 있다. 문득 여러 사람의 웃는 소리가 우레같이 나의 이막(耳膜)을 울린다.나는 깜짝하며 고개를 들었다. 모든 시선은 우리에게로 몰리었다. 모든 웃는 얼굴은 이리로 향하여 있다."미남자는 다른걸.""○○야 오죽이 이뻐야지.""아암, ○○보고 아니 반하면 눈 없는 기생이지!""둘의 얼굴이 한 판에 박아 놓은 듯이 같은걸.""저런 부부가 있었으면 좀 어울릴까?""별소릴 다 하네. 오늘밤에라도 되면 그뿐이지." 모든 사람은 웃음 섞어 이렇게 떠들었다. 나의 얼굴은 모닥불을 담아 붓는 듯이 화끈화끈하였다.그것은 부끄럼의 불 때문뿐이 아니다. 빨간 행복의 불꽃도 방글방글 피고 있었음이라. 그러나 나의 얼굴과 그의 얼굴이 같다 함에는 불복이었다.살거리가 흰 것은 서로 어금버금할는지 모르리라 마는나의 오목한 코끝과 알맞은 이마 넓이는 그의 그것들의 발 벗고 따를 바 아니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나의 얼굴은 남에게 그리 뒤지지 아니리만치 못 생긴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나의 눈은 C의 말을 들으면 가을 물같이 맑은데 맥맥한 정파(情波)가 도는 듯한 것이었다."자네에게는 계집이 많이 따르리니." 한 것은 어느 친구의 나를 비평한 말이다. 나도 어째 그럴 듯싶었다. 우선 오늘밤으로 말하면 나는 벌써 춘심이가 나에게 홀린 줄 알았다.저는 기생으로 예사로이 하는 것이라도 나에게는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물론 나도 그에게 마음이 기울어졌으리라 하되 그것은 여성으로의 그의 아름다움에 끌림이요,그가 나보담 잘나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렇다 하고 여러 사람의 칭찬이 기쁘기는 하였다.그 기림이 춘 심으로 하여금 나의 잘난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점에 있어 더욱 기뻤다. 나는 빙그레 득의양양한 웃음을 웃었다."둘이 한 곳에만 붙어 앉아 쓰나?춘심이. 이리도 좀 오게그려." 나와 맞은 편에 앉은 M이 그 험상궂은 상에 어울리지 않는 간악한 웃음을 띠며 그를 부른다. 나는 어이없이 M을 바라보았다.나의 눈은 감때 사나운 형이 제 작난감을 보자고 할 때 쳐다보는 어린 아우의 그것 모양으로 그것을 앗길까 하는 두려움과 또 그것을 빼앗지 말아 달라는 애원이 섞여 있었으리라.그는 그리로 갔다. 하건만 나는 의연히 기뻤다. 그가 가도 그저 아니 간 까닭이다. 몸을 일으키는 그 찰나에 그 아름다운 얼굴을 나에게로 돌리며 눈웃음을 쳤다."잠시라도 나리 곁을 떠나가기는 참 싫어요. 그래도 기생 몸 되어 손님이 부르는데 아니 갈 수 없습니다. 눈 한번 깜짝할 동안만 참아 주셔요. 내가 곧 돌아올 터이니……." 그의 추파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였다."될 수 있는 대로 얼른 오게. 벌써 오나!" 나도 눈으로 이렇게 일렀다. M은 음흉한 웃음을 껄껄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아 이끌 사이도 없이 안반 같은 제 무릎 위에 올려 앉힌다."저런!" 남에게 저렇게 쉬운 일이 나에게는 왜 그리 어려웁던가?"이것을 좀 보아, 어떤가?" M은 춘심의 어깨에 머리를 누이며 나를 보았다."어떻기는 무엇이 어때?" 나는 태연히 말을 하였다마는 나의 귀에도 그 소리가 억지로 지은 것 같이 울림을 어찌할 수 없었다."오장이를 짊어지고도 분하지 않아?""아이고, 참 죽겠는걸." 이번에는 한 불 넘어 보았다. 그래도 자리 잡힌 소리는 아니었다. 몹시 가슴이 울렁거린다. 암만 시치미를 따도 그가 남에게 안긴 것을 보기 싫었다.스스러운 생각이 무의식한 가운데에도, 또 스스로 부정하면서도 마음어 데서 인지 움직이고 있었음이리라. 나는 툇마루로 나왔다.M의 노닥거리는 꼴도 보고 있기 무엇하였고 또 먹 은 술이 왼 몸에 불을 일으켜 선선한 공기도 마시고 싶었음이라.웃고 떠드는 소리가 가끔 흘러 듣기지만 거기는 딴 세상같이 고요하였다. 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한참 서서 저도 모르게 무슨 생각을 하고있었다.이윽고 무심히 고개를 돌린 나는 무엇에 놀랜 듯이, 가슴이 꿈틀 하였다. 나의 앞에 춘심이가 서 있다."어데를 가?" 나는 몇 해 못 만나던 절친한 친구와 길거리에서 뜻밖에 마주칠 때 모양으로 반갑게 소리를 쳤다. 그러자마자 그의 가냘픈 허리는 벌써 나의 가슴에 착 안겨 있었다. 그 날씬날씬한 허리란!자릿자릿 눌리는 가슴이란!나는 잠깐 황홀하였다."집이 어데야?" 나는 슬며시 감았던 팔을 풀며 생각난 듯이 물어 보았다."그것은 왜 물으셔요?"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번연히 알겠거늘 왜 채쳐 물을까?나는 잠깐 할말이 없었다. 그는 제 일신에 관한 무슨 중대한 해결을 기다리는 것처럼 얼굴빛을 바루고 있다."그것을 왜 물어!" 나는 혼잣말같이 중얼거리었다."왜 물으셔요?" 그는 대질러 묻는다."나, 놀러갈 터이야." 나는 간신히 이 말을 하였다."놀러는 왜 오셔요?" 그는 또 다그쳐 묻는다."자네 보고 싶어서." 하고 나는 다시금 그를 잡아다리었다."고만두셔요." 하고, 그는 몸을 빼치며 냉연하였다."그것은 또 웬말이야?" 나는 정말 웬 셈인지 알 수 없었다."그래, 나를 보고 싶으실까요?""그러면!""무얼, 지금뿐이지. 내일이면 씻은 듯이 잊으실걸 뭐." 하고, 원(怨)하는 듯 한(恨)하는 듯 눈을 깔아 메친다. 나는 꿈을 처음으로 깨인 듯하였다."무슨 그럴 리가 있나?" 나는 부드럽게 그를 위로하였다. 이 말은 결코 곁을 바르는 말이 아니었다. 충장(衷腸)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흥, 그럴 리가 있나?나도 많이 속아 봤습니다." 그는 이 말을 남기고 돌아서더니 나를 떠나 한 걸음 두 걸음 생각 깊은 발길을 옮기었다. 나는 무엇을 잃은 듯이 망연하였다.별안간 그는 발길을 휙 돌이킨다. 방긋 쏟아지는 듯한 웃음을 흘리고 선뜩 나의 앞에 들어서자 그 다음 순간에는 그의 향기롭고 보들보들한 두 팔이 나의 목을 잡고 있었다.그리고 그 부드러운 입술이 나의 귀를 스칠 듯말 듯 하며,"참말 나를 아니 잊으실 터이야요?" 라고 소곤거렸다. 나는 정신이 얼떨떨하였다. 한동안 말도 나오지 않았다."그래, 나를 아니 잊으실 터이야요?""잊을 리 없지.""정말?" 하고 물끄러미 쳐다보다가,"꼭 그리 하셔요." 란 말과 함께 나에게 달콤한 키스를 주었다."다옥정(茶屋町) ○○번지. 위선 이 번지를 잊지 마셔요." 나는 기계적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이 연회가 끝나거든, 우리 같이 가요, 꼭." 하고, 가볍게 나의 등을 두드린 후 저 갈 데로 가버렸다. 나는 우두머니 그대로 있었다.미끈하고 그의 팔이 감기었던 목 언저리는 무슨 기름이 발라있는 듯싶었다. 그리고 나의 입술은 무슨 버레가 기어다니는 것같이 근 실 근실하였다. 나는 웃음을 띠고 방에 돌아왔다.모든 사람이 나를 보고 웃는 듯싶었다. 방바닥이고 천정이고 전등불이고 모다 나에게 웃음을 건네는 듯하였다. 말끔 좋은 사람들 뿐이라 하였다.이런 좋은 사람들에게 술 한 잔 아니 권할 수 없다 하였다. 나는 차례로 술을 권하였다. 나도 그 돌려 주는 술잔을 사양치 않았다. 나는 잔뜩 술이 취하였다.그 뒤에 들어온 춘심은 인제나 의 것이 되고 말았다. 세상 없는 사람이 불러도 나는 그를 놓지 않았다. 그가 기어이 가야 될 사정이면 둘이 같이 갔었다. 나는 주정을 막 하였다.간에 헛바람 든 사람 모양으로 연해연방 웃었다. 술을 더 가져 오라고 뽀이를 야단도 쳤다. 할 줄 모르는 노래를 고함 치기도 하였다. 그 너른 방을 좁다고 휘돌며 춤도 추었다.내 마음대로 놀았다. 남이야 싫어하든 미워하든 비웃든 욕하든 나는 조금도 관계치 않았다. 사( 社) 의 윗사람이 몇 있었지만 그것들!다 초개(草芥)같이 보이었다.
4
내가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고 잠을 깬 때는 눈을 부시게 하는 햇발이 문살을 쏘고 있었다. 어찌 된 셈인가?지금껏 나의 가슴에는 춘심의 온유한 몸이 녹신 거리고 있었는데…… 여기는 암만해도 그의 방은 아니다. 확실히 우리 집이다. 보라!윗목을 빽빽하게 차지한 옷걸이, 삼층장, 반다지 그 위에 이불을 싼 모란 꽃을 수 놓은 물 날은 야단 보(褓). 문갑 위와 밑과 가운데 뒤 숭숭하 게재이고 꼽혀있고 누인 책자들,틀림없는 우리집 건넌방이다. 흐릿한 기억 가운데 문득 어젯밤 헤어지던 광경이 떠나왔다. 몇 아니 남은 손들도 외투를 입으며 모자를 찾게 되었다.그 때가 되도록 나는 춘심을 놓지 않았다. 언제든지 언제든지 그의 곁을 떠나기 싫었 음이라.하건만 딴 기생들이 제 만토도 있고 셈도 따질 요리점 사무실로 사라질 제 춘심이도 아니 일어설 수 없었다."어데를 가?""사무실에 가야지요.""나하고 같이 가!" 나는 어린애 모양으로 울 듯이 부르짖으면서 그에게 매달렸다. 마치 한번 놓치면 다시 못 잡을 행복을 붙드는 것처럼.그럴 때 어째 구두 생각이 났던지 그것을 불현듯 집어 들고 그의 뒤를 따르려 하였다."창피합니다. 남이 흉을 봅니다. 대문에서 기다릴 것이니." 그는 이렇게 타이르자 나를 내어 버리고 그림자를 감추었다. 그 때 시커먼 실망이 납덩이같이 나의 가슴을 나리지르던 것을 지금도 생각할 수 있다.그러나 어찌하여 집으로 돌아왔는지는 까맣게 모를 일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둘러 보았으나 자리끼는 벌써 거기 없었다."물!물 주어!" 라고, 나는 성난 듯이 소리를 질렀다. 황망한 발자최가 마루를 울릴 겨를도 없이 안해가 물그릇을 들고 들어온다. 김이 무럭무럭 남은, 미리 덥혀 두었음이리라. "무슨 술을 그렇게 잡수신단 말입니까?왼 골목이 떠나가도록 고함을 치고 대문을 부서지라고 짓두드리고……. 야단야단 해도 그런 야단이 어데 있겠습니까?" 내가 살 듯이 물을 들입다 켜고 있는 동안, 안해는 발간, 물 묻은 손을 요 밑에 넣고 이런 말을 하였다."내 원 참." 안해는 말을 이어,"마루에 그냥 털썩 드러누우시더니,세상 일어나시나요. 죽을 애를 써서 근근히 방에 모셔다 놓으니 외투를 입으신 채 쓰러지시지요." 나는 묵묵히 물만 마시고 있었다. 그러면서 속으론 또 무척 성가셨구나 하였다.나는 가끔 이런 괴로움을 그에게 끼치었다. 일뿐 아니라 가슴이 답답할 제, 비위가 틀릴 제, 화증 풀이도 그에게 하였다. 설운 사정도 그에게 하였다. 사회에서 받는 나의 불평,가정에서 있는 나의 울분, 또는 운명에 대 한 저주들 말끔 그에게 퍼부었다. 그가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인 듯하게 나는 그를 들볶았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싫다 아니하였다.쓰리다 아니하였다, 달게 받아주었다. 까닭 없이 자아치는 애닯은 슬픔으로 하여 하염없이 눈물을 뿌릴 제,"왜 이리 하셔요, 왜 이리 하셔요?" 하는 그의 눈물 젖은 부드러운 소리가 슬픔을 거두어 주었다. 또는 공연히 부글부글 피어오르는 심사를 어찌할 수 없어 억메를 덮어 죄 없는 그를 야단을 치다가도 그 또렷또렷한 눈치를 보면 어느 결엔지 마음이 가라앉 음을 깨 달았다.여기 나는 불충분하나마 불만족하나마 위자(慰藉)도 얻고 행복도 스러웠다. 만일 그가 없었던들 나는 벌써 타락의 심연에 왼 몸,왼 마음을 다 빠뜨리고 지금쯤은 헤어날 수도 없게 되었으리라."에그, 물 고만 잡수셔요. 진지가 벌써 다 되었는데." 하고 그는 물그릇을 앗는다.그리고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그 의눈과 입술에 문득 의미 있는 웃음이 흐른다."어젯밤에 날더러 무에라고 한 줄 아셔요?""무에라고 하기는!""그래, 모르셔요?""나 몰라.""그런데 어젯밤에 어데 가셨습니까?""명월관 지점에 갔었지.""기생이 왔지요?""그럼, 왜 그래?""그렇지요." 하고, 안해는 북받쳐 나오는 웃음을 못 참겠다는 듯이 진저리를 치며 웃는다.사르르 감기는 눈초리에 가는 금이 잡히고 연한 뺨살이 광대뼈 위로 토실 토실 하게 밀리자,장미꽃 봉오리가 피어나듯 입술이 동글고 오목하게 열리는 것이 그의 웃음의 특징인 동시에 또 그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특징 이었다."왜 말을 아니하고 웃기만 웃어?" 안해는 웃음에 막히어 말을 이루지 못 하면서,"저어, 하하하하……. 아이고, 참 우스워 죽겠네……. 저어…….""저어……하지 말고 말을 해요.""저어……하하하하. 한잠을 주…… 주무시고 부시시 일어나시길래 외투와 두루막을 벗겨 드리려 하니까 하하하하." 하고, 그는 이불 위에 무너지며 어깨를 들썩거리고 한참 웃음에 잦아진다.나는 멋모르고 빙그레 하며,"말을 해요, 말을 해요." 하였다. 이윽고 안해는 웃음의 파문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다홍빛 같은 얼굴을 들더니,"저어…… 눈을 감으신 채……하하하하, 나 나를 한 팔로 스르르 잡아당기시며 하하하하 춘심이 춘심이 하 하시겠지요. 하하하하, 그 춘심이란 게 누구이야 요?" 나는 가슴이 뜨끔하였지만 무안새김으로 빙그레 웃으며,"춘 심이가 춘심이지." 하고 시침을 뚝 땄다.그러나 별안간 춘심의 아름다운 모양이 선명한 활동사진같이 선뜩 머리에 비쳤다. 환영에 달뜬 나의 시각이 안해의 옥양목 저구리에 붉은 광선이 사르르 덮힘을 느끼자,어느 결엔지 연분흥 국사(庫紗[고사]) 저구리 입은 춘 심이가 연기같이 나의 앞에 앉아 있었다……."무엇을 이렇게 생각하셔요?" 하는 안해의 말소리를 들은 때에도 나의 눈은 꿈꾸는 사람 모양으로 말뚱말뚱 하였다. 그 다음날 밤에야 나는 C와 함께 춘심의 집에 갔었다.가고 싶은 마음이야 한시가 바빴지만 다방골에 서투른 나는 C의 힘을 아니 빌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집 번지는 내가 알았다.취중에 오직 한 번 들은 그 숫자가 야릇하게도 나의 기억에 새긴 듯이 남아 있었다.다만 그 집 찾기가 곤란 도하고 또 이런 명예롭지 못한 방문을 혼자 하기 싫어서 C를 힘입으려는 것이라.어젯밤에도 두 번이나 C를 만나려 하였건만 출입이 잦은 C는 여관에 붙어있지 않았다.오늘도 저녁 일찍이 서둘렀지만 긴치 않은 C의 방문객으로 말미암아 나는 지리한 시간을 꿀꺽꿀꺽하고 아니 참을 수 없었다.기쁜 기대와 달디단 희망에 눈을 번쩍이면서 가슴을 뛰면서 길에 나선 지는 아홉 시가 훨씬 지난 때이었다.그의 집은 광천교(廣泉橋)에서 남쪽 개천을 끼고 한참 올라가다가 조그마한 다리 놓인 데서 가운데 다방골로 빠지면 오른편 셋째 골목 막다른 집이었다.이 근처에 발이 넓은 듯한 C는 어렵지 않게 그것을 발견하였다. 대문 안으로 쑥 들어선 우리는 흘러나오는 가야금 가락에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그 날 밤 춘심의 가야금 뜯던 채화(彩畵) 일폭이 다시금 얼른 하고나의 안계를 스쳐 간다. 그 남실남실하는 보얀 손가락이…… 그 반질반질하는 까만 머리가……. 거침없이 중문을 열어젖힌 C는 점잖게,"이리 오너라." 고 불렀다. 그 소리가 떨어짐을 따라 묵은 악기도 울림을 멈추었다."누구십니까?" 안에서 고운 목소리가 묻는다. C는 성큼성큼 마당으로 사라졌다. 나는 오히려 하회(下回)를 기다리며 어둠침침한 중문간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윽고,"들어와요." 란 C의 부름을 듣자 환희의 전율이 찬물처럼 왼 몸에 쭉 끼치었다. 춘 심이가 있구나 하였다. 나는 야릇한 불안을 느끼며 허청허청 발길을 옮기었다.열린 미닫이 사이로 밝게 흐르는 광선을 막은 듯이 서 있던 처녀 하나가 이상한 눈치로 나를 살피다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올라오셔요." 하였다. 얼른 방안을 엿보았다.C는 벌써 방안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춘심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안방에서나 옆방에서나 또는 나 못 본 어슴푸레한 한 구석에서나 춘 심의 튀어나옴을 마음 그윽이 바라면서 나는 구두를 끌렀다."형이 어데 갔어?" C의 이 말에 나의 어리석은 바람은 속절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나의 마음은 밤같이 어두웠다."유일관(唯一館)에 갔습니다." 하고 그 동기(童妓)는 놀랐다는 듯한 눈으로 묻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끝 모를 검은 빛에 맑은 광채가 도는 그의 눈매는 더할 수 없이 어여뻤다.열 대여섯이 될락 말락 하리라. 봉올봉올 피려는 목련꽃처럼 그의 얼굴은 탐 스럽고 아름다웠다. 나는 묵묵히 숨소리만 씨근거렸다. 웬일인지 낯이 화끈화끈 타는 듯 하였다.하염없이 시선만 이리저리 던졌다. 세간은 그리 화려하다고 못하리라. 옷걸이와 이불 얹힌 커다란 궤와 일본제 경대뿐이었다. 그러나 기생 방에만 있는 고혹적 색채는 모본단 보료에도,비스듬히 세운 가야금에도 농후하게 흘러 있었다. 한편 벽 알맞은 자리에 화판(畵板)에 넣은 양화(洋畵)한 장이 걸렸다.그것은 푸른 연기가 어린 듯한 산 윗머리를 흰 구름이 휘휘 둘렀는데 수풀우거진 곳에 푸른 '리본’같은 강이 흐르며 그 위로 몽롱한 달빛 안은 일엽편주(一葉扁舟)가 남녀 단둘을 싣고 소리 없이 떠나간다.그것으로 나는 고만 주인의 취미가 고상하고 풍아한 줄 짐작하였다."애써 오니 어째 없담!" 이윽고 나는 자탄 비슷하게 이런 말을 하였다. 농담같이 하랸 것이 어째 절망의 가락을 띠고 있었다. 벌린 입도 웃음을 이루지 못하였다."저어 형님한테 기별할까요?" 나를 살피기를 마지 않던 금심(琴心)은 ─ 이것이 그 동기(童妓)의 이름이다 ─ 인제 알았다, 하는 얼굴로, 우리에게 물었다."무얼 그럴 것은 없지." C는 거절하였다."아니 저어…… 형님이 가실 때 손님이 오시거든 알게 하라 하였어요.""어떤 손님이?" 나는 가슴을 뛰며 물었다. 그는 조금 망상 거리 다가,"저어 오늘 오실 손님이 계시니 그 손님이 오시거든 …….""나를 가리킴이 아니로군." 나는 번개같이 생각하였다."우리는 오늘 온다고 한 손님이 아니야. 온다고 하기는 그저께 밤이야." 나는 비웃었다."네, 그렇습니까?" 하고, 금심은 무안한 듯이 고개를 숙이다가 무엇이 생각난 것같이,"참, 저어 그저께 밤에 손님 두 분이 오신다고 식도원(食道園)에서 인력거꾼이 왔습니다." 나는 더욱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월관에서 놀았거늘 식도원이 또웬 말인가!"식도원에서!" 나는 부지불식간에 부르짖었다."우리는 명월관에서 놀았는데…… 그러면 딴 손님이던 게지." 금심은 놀라 나를 바라본다. 그 큼직하게 뜬 눈은 마치 이런 말을 하는듯 하였다. "어째 그럴까?우리 형님의 기다린 손님은 분명히 이분인데……. 그러면내가 잘못 들었던가?식도원 아니라 명월관이던가?""그래 손님이 왔던?" 나의 말은 급하였다."아니야요. 형님 혼자만 왔어요. 와서 손님 두 분이 아니 왔더냐고 묻습디다." 모를 일이다!C의 말을 들으면 나보담 먼저 나온 그는 문간에서 춘 심을 만났는데 춘심의 말이 준비가 다 있으니 나와 같이 오라고 신 신부 탁하였다한 다.(이 준비란 것은 곧 다른 기생을 C에게 붙여 주겠다는 뜻이라) 두 분 손님이라 함은 곧 나와 C를 지칭함이리라.그러하지만 식도원 운운은 풀 수 없는 의문이다."그 날 밤에 매우 우리를 기다린 모양이지." 돌아오면서 나는 C에게 물어 보았다."기다리긴 무엇을 기다려?" C는 이 천치야 하는 어조로,"무엇 보고 기다리겠소?오!얼굴이 어여쁘니까. 얼굴 뜯어먹고 사나, 논 팔고 밭 파는 놈이라야지, 서울 온 지 삼 년이나 되는 년이 나지미가 자녀 ××하나 뿐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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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맞은 옷 모양으로 풀 하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무슨 기막힌 일이 나본 듯이 모자와 두루막을 되는 대로 휙 집어던지고는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호올로 바느질을 하고 있던 안해는 잠깐 눈썹을 찡그리고 웃옷과 모자를 걸었다."진지 좀 아니 잡수렵니까?" 이윽고 안해는 나에게 물었다."아까, 나 저녁 먹었는데…….""어데 한 술이나 떴습니까…… 요사이는 도모지 진지를 못 잡수시니 무슨 까닭이야요?살이 나리시고…… 신색이 그릇되시고…… 왜 기운 하나 없어 보입니까?춘심인지 무엇인지 그로 하여 그럽니까?" 이런 말을 하며 안해는 근심스러운 가운데에도 비웃는 빛을 보이었다. 참말 술이 양에 넘친 탓인지 뜬 사랑에 멍든 탓인지 그 후부터 무슨 가시나 난 것같이 혀가 깔끔깔끔하며 밥이 달지 않았다.꿈자리조차 뒤 숭숭 하였다. 잠을 깨면 흔히 왼 요, 왼 이불이 축축하게 땀에 젖어 있었다. 물에 빠진 듯한 몸은 오한(惡寒)에 떨며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기도 하였다. "내 말이 옳지요?춘심이 때문이지요?" 하고 안해는 어서 그렇다 하라는 듯이 나를 들여다보다가 웃음의 가는 물결이 그 까만 눈썹 언저리를 흔들더니 고만 자지러져 웃으며,"그만 일에 진지를 못 잡술 게 무어야요?탈기(脫氣)할 게 무어야요?정 그러시거든 한번 가셔서 정을 풀면 그뿐이지." 나도 웃으며,"무슨 그것 때문에 그럴라구…….""안 그런 게 다 무어야요?""그렇다면 어찌할 터이요?""그러기에 가시란 밖에.""얻어도 샘을 아니 하겠소?" 나는 안해가 옛날 요조숙녀의 본을 받아 군자의 애물(愛物)을 투기치 않으리란 평일의 주장을 생각하며 한번 다져 보았다."그것은 당신께 달렸지, 양편을 다 좋게 하면 왜 샘을 하겠습니까?""그러면 샘을 아니 하겠다는 말이로군." 나는 또 한번 다지었다."샘이니 우물이니는 둘째 치고 제발 원을 풀고 진지를 많이 잡숫게 해요.낙심 천만한 모양은 차마 볼 수 없습니다." 하고 실인(室人)은 다시금 실소하였다."가라면 못 갈까?지금 당장 갈 테야." 그러나 지금 당장은커녕 그 이튿날도 나의 그림자는 다방골에 나타나지 않았다.기생집에 이틀 밤을 연거푸 감이 무엇도 하거니와 그가 나에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인 까닭이다.그 날 밤 둘이 놀던 일을 생각하면 그는 확실히 나에게 쏠리었다. 그러나, 춘심은 홀린 척도 하고 홀리기도 함을 위업(爲業)하는 기생이다.명월관 손님도 오라 하고 식도원 손님도 가자 하여야 되나니, 마치 그물을 여기도 치며 저기도 쳐서 고기의 걸리기만 기다리는 어부 모양으로 사나이를 낚는 것이 그의 장사일다.그러면 나에게 준 뜻 많은 추파와 꽃다운 언약도 말끔 그의 맛난 미끼 일는지 모르리라. 몇 칸 집을 깝살리게 하고 몇 뙈기 논을 날릴 수단일는지 모르리라. 하느님 마옵소서!그러나!그러나!그의 얼굴이 보고 싶다. 못 견디리만큼 보고 싶다. 소 루룩 코 안으로 기어들던 향긋한 실바람은 오히려 후각 어데인지 남아 있었다. 박하를 뿌린 듯한 나의 목은 문득문득 비단결 같은 팔을 느꼈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데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시문독본(時文讀本)에서 읽은 이 시조를 이따금 이따금 목을 빼서 청청스럽게 읊조렸다. 또 붓을 들면 이 글을 적기도 하였다.그리고 춘심이란 두 글자를 뚫을 듯이 들여다보며 정신을 잃었다. 그 두 글자가 굼실굼실 움직여 엄청나게 굵고 크게 되어 시커멓게 눈을 가리기도 하였다.봄 춘( 春) 자의 '삐침’과'파임’이 그의 가냘픈 팔이 되어 나의 허리에 감기도 하였다…….
6
그 이튿날이다. 아츰을 마치고 권연(卷煙) 한 개를 피워 문 나는 이리저리 마당을 거닐 때였다."편지 받으오." 하는 소리를 듣자 누런 복장이 얼른하며 하얀 네모난 종이가 중문 앞에 떨어진다. 그것은 엽서형 서양 봉투였다.매우 이상하다 하는 듯이 나는 겉봉을 앞뒤로 뒤치며 한참 보고 있었다. 그러다 사방을 둘러보기가 무섭게 얼른 호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또 꺼내었다.또 넣으려다 말고 손에 움켜쥔 채 어찌 할 줄 모르는 것처럼 왔다갔다하였다. 문득 미친 듯이 건넌방으로 뛰어들어 왔다. 그것은 춘심의 편지일다!앞장엔 한 자 한 획 틀림없이 우리 집 번지와 나의 이름을 적었고, 그 뒷장엔 '다옥정(茶屋町) ○○번지 김소정( 金小汀)으로부터’라고 쓰이었다.나는 번개같이 봉투 윗머리를 찢었다. 안에서 그림 엽서 한 장이 나온다. 굽이치는 물결 모양으로 검누른 머리를 좌우로 구불구불 늘어뜨리고,바람에 나부끼는 듯한 얄따란 한 오리 벼 자최가 아른아른하게 감긴 풍염한 두 팔과 앞가슴을 눈같이 드러내었는데,장미꽃 한 송이를 시름없이 든 손으로 턱을 고이고 눈물이 도는 듯한 추파에 님 생각이 어린 금발 미인의 그림이었다.그리고 이쁘게 언문 반초(諺文半草)를 날린 그 사연은 아주 간단하였다.항용이면 수신자의 주소 씨명을 쓸 자리 한복판에 두 줄로 '아모리 기다려도 아니 오시기로 두어 자 적사오니 속 보시지 마시압.’이라 하였고 그 밑칸 글월은 이러하였다.
보고 싶어 홍응. 왜 오시지 않습니까?기다리는 제 마음 행여나 아실는지?지정일변 아시겠소?어찌하면 좋을까요?
이 때의 기쁨이야 무에라 할는지!가슴에 무슨 경기구(輕氣球) 같은 것이 있어 나를 위로위로 치슬러 올리는 듯하였다. 길길이 뛰고 싶었다. 날고 싶었다. 모든 사람에게 이 기쁨을 말하고 싶었다.종로 네 거리에 뛰어나가오는 사람 가는 사람에게 춘심이가 나에게 편지한 것을 알려도 주고 싶었다. 밀장을 화닥닥 열었다.무슨 큰 일이나 난 듯이 안방에 있는 안해를 소리쳐 불렀다."이것을 좀 보아요. 이것을!" 안해가 방에 들어도 서기 전에 무슨 경급한 일을 말하는 사람 모양으로나 의 소리는 헐떡거렸다."춘심이가 나에게 편지를 했구려. 편지를!" 하고, 왼 얼굴이 웃음에 무너졌다.
그 날 해 지기가 바쁘게 나는 정서(情書) 준 이를 찾아 나섰다. 안 해는 일부러 저녁을 일찍이 걷어치고 또 청하는 대로 술조차 받아 주었다.나는 무념 무상으로 거의 달음박질하듯 걸음을 재게 하였다. 발이 공중으로 날며 땅에 닿지도 않았다. 그 집 골목에 휙 들어서자 갑자기 걸음이 누 그러지며 가슴이 방망이질하였다.'예까지 와 가지고’하고, 하마터면 뒤로 돌 발자욱을 앞으로 콱 내디디었다. 중문턱을 넘으매 머리는 모든 의식을 잃었다는듯이 힝하였다."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마츰 마당에 있던 금심은 나를 보자 반갑게 인사하였다."너의 형 있니?""잠깐 어데 나갔습니다." 하다가 나의 꼴이 애처로웠던지,"지금 곧 올 것입니다. 올라가셔요." 라고 말을 뒤붙였다. 그의 말마따나 얼마 아니 되어 춘심이가 돌아는 왔다.하건만 그의 태도는 의외이었다. 방문을 열고는 아랫목 보료 위에 엉성하게 앉은 나를 보고시답잖게 다만,"오셨어요?" 란 한 마디를 던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대면도 하기 싫어하는 것처럼 경 대 앞에 착 돌아앉는다. 한 번도 못 본 사람에게 하듯 서름서름하다.그 날 밤일은 고사하고 편지한 것조차 씻은 듯이 잊은 것 같다."오늘밤에 해동관(海東館)으로 부르지 않았어요?" 분지(粉紙)로써 얼굴을 요모조모 골고루 닦으며 나를 돌아도 아니 보고 그는 이렇게 묻는다."아니.""그러면 누구일까?…… 새로 한 시에 수유를 받았는데……. 나는 ' 나리’라고.""나는 그런 일이 없는걸." 요리점에서 호기 있게 불러보지 못하고 제 집으로 온 것이 구구한 듯도 싶었다. 창피도 하였다.바늘방석에나 앉은 듯이 무릎을 누일락 세울락 하며 팔을 짚어도 보고 떼어도 보았다. 왜 왔던고 후회까지 하였다. 고만 갈까 도 싶었다.그러나 이 답답한 상태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경대를 살짝 떠난 그는 나의 코밑에 바싹 다가앉았다. 나는 또 그 말할 수 없는 매력있는 향기를 느끼었다."왜 오시지 않았어요?흥." 하고, 한숨을 휘 쉬더니 나의 눈 속을 물끄더미 들여다보며,"편지 보셨어요?""응.""그 날 밤새도록 기다리니 어데 와야지." 춘심은 말을 이었다."그러면 그렇지, 무슨 두드러진 정이 있어 이 못난이를 찾을라고?기다리는 년이 미친년이지……. 잠 못 잔 것이 어떻게 앵한지 몰랐어요." 하고, 이 매정한 놈아 하는 것처럼 눈을 깔아 메친다."워낙 술이 취해서 여기 온다는 것이 친우들에게 끌리어 집으로 간 모양이야.아츰에 잠이 깨고야 알았어.""그저께 날 밤에 유일관에 갔다가 집에 오니 오셨다겠지요. 놀음에 왜 갔던고 싶었습니다. 오늘은 오시려니 하고 어제는 아모 데도 아니 갔지요. 거짓말?이 금심이한테 물어보셔요?거짓말인가……. 그래 생각다 못 해서 편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릿집에 갈 적마다 나를 만날 줄 알고 남 모르게 기뻐하던 것과 진답지 않은 딴 사람만 있고 그리운 내 얼굴을 못 볼 제 얼마나 상 심하였으며 얼마나 흥미 삭연(興味索然) 하던 것을 하소연하였다."속없는 사나이도 다 많지." 춘심은 또 다시 말을 이었다."수(誰)야 모(某)야 다 앉은 자리 정 가는 곳은 한 곳뿐이라, 이런 소리를 하지 않겠습니까?그러면 저희들끼리 네니 내니 하겠지요. 무슨 아리 알심이나 있는 듯이 눈을 끔벅끔벅하며 남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겠지요. 하하 하하……. 정 가는 곳은 이 곳뿐인데." 하고 나의 등을 가볍게 뚜드렸다."춘심 아씨 모시러 왔습니다." 꺽세인 차부의 목소리가 우리의 정담을 깨뜨렸다."어데서 왔는가?""해동관에서 왔어요." 춘심의 눈썹은 보일 듯 말 듯 찌푸리었다. 무엇을 한참 생각하더니 큰소리로,"거기 있게, 지금 갈 터이니." 라고 일렀다."술잔 값이나 주어 보내지." 나는 대담스럽게 이런 말을 하였다. 그만치 춘심을 보내기 싫었다."그럴 수 있어요?미리 수유 받은 것이 되어서 그럴 수도 없고……." 하면서 나의 손을 꼭 쥔다.""어쩌면 좋아!" 라고 안타깝게 속살거리고는 몸을 나에게 쓸어 붙이었다……."…… 무슨 탈을 하고 나 곧 올 터이니 기다리겠습니까?""그리 쉽게 올 수 있을라구.""집안에 우환이 있다 하고서 인사나 하고 선걸음에 돌아올 테야. 기다리고 계셔요.""글쎄.""글쎄가 아니라 꼭 기다리셔요.""기다리지. ""꼭 기다리셔요, 꼭 . 아홉 점 안으로는 기어이 올 터이니…….""그래, 아홉 점까지만 기다리지.""가시면 일후(日後)봐도 말도 안 할 테야.""아홉 점만 지나면 간다."
7
한번 간 춘심은 돌아올 줄 몰랐다. 바람이 문을 찌걱거리게 할 적마다 몇번을 오는가 오는가 하였는지 모르리라. 나는 누울락 앉을락 하였다. 일어서 거닐기도 하였다. 마디고 마딘 시간이건만 아홉 점이 지났다. 열 점이지 났다……. 온갖 의혹이 괴여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의 말과 속이 같을진대 여태껏 아니 올 리 없으리라. 그 정 맺힌 눈치도 그 안타까운 몸짓도 모두 허위 이 런가 가식이런가.나의 생각이란 염두에도 없고 어느 유야랑(유야랑)과 안기고 안으며 뺨도 비비고 입도 맞추면서 덧없이 깊어 가는 밤을 한( 恨) 하는지 누가 알리요!그런 줄 모르고 눈이 멀뚱멀뚱하게 오기를 고대하는 나야말로 숙맥(菽麥)일다!천치일다!내가 여기서 그의 돌아옴을 기다리는 모양으로 그는 거기서 나의 감을 기다리고 아니 있는지 누가 증명하랴!암만해도 오늘 낮 새로 한 점에 놀음 수유를 받으면서 잘 수유조차 아울러 받았을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 볼 때 왜 냉연하였으랴!냉연함은 충동이었고 나종의 꿀을 담아 붓는 듯한 언사와 표정은 지은 솜씨일다!"해동관에서 나를 부르지 않았어요?" 한 것은 노골적으로 나를 욕보이는 수작이었다. 격퇴하는 칼날이었다."쾌씸한 것 같으니 "나는 속으로 부르짖고,있지도 않은 위약자(違約者)를 노려나 보는 듯이 미닫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조그만 더 기다리십시오. 곧 올 것인데……. 지금 열 점 아닙니까?반시( 半時) 만 더 기다려요." 곁에 있던 금심은 따라 일어나 나의 앞을 막으며 간청하였다. 그와 나는 벌써 꽤 친숙하게 되었다."고만 갈 테야,아홉 점까지 기다리란 것을 열 점까지 기다렸으면 무던하지." 하고 나는 그의 팔을 가볍게 잡아 앞으로 밀치었다."안 되어요. 안 되어요. 가시다니. 꼭 못 가시게 하라던데……." 하고 금심은 응석하는 듯이 뒤에 매어 달리며 모자를 벗기려고 애를 쓴다."밤 새도록 아니 올걸 뭐." 나는 모자를 한 손으로 단단히 붙잡고 웃으며 이런 말을 하였다."안 오기는 왜 안 와요. 두고 보시오. 곧 아니 오는가. 가시면 제가 야단을 맞아요." 하고 애원하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잠깐만 더 기다려요. 십분만, 오 분만……네?네?" 나는 돌아다보고 빙그레 웃으며,"그래, 너의 형이 나를 꼭 잡으라 하던?" 하고 물어 보았다."꼭 못 가시게 하라고…….""정말?""정말이고 말고요.""가 볼일이 있는데……." 입으론 이런 말을 하였지만 이미 갈 뜻은 없었다. 춘심이가 진정으로 나의 기다림을 바랐거니, 어찌 그의 뜻을 저버리랴!"볼일이 무슨 볼일입니까?" 금심은 나의 마음을 알아챈 듯이 중얼거리자 민속하게 나의 모자를 벗겨 들었다. 그가 개가(凱歌)를 부르며 웃고 쓰러지자 나도 빙그레 주저앉았다.춘심은 새로 두 점이 넘어 돌아왔다. 그때껏 나는 견딜성 있게도 거기 있었나니 그렁저렁 열두 점이 넘고 새로 한 점이 넘으매 기다린 것이 아까워도 갈 수 없었음이다.치맛자락의 사르륵 소리를 듣자 나는 짐짓 한 잠 이나든 것같이 눈이 감았다. 밀장은 소리 없이 열리었다. 사람의 넋을 사르는 듯한,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는 듯한 향내가 떠돌았다. 저도 모를 사이에 나는 깊이 호흡을 하고있었다.그리고 무슨 강렬한 광선에 쏘일 때처럼 감은 눈이 환하며 눈꺼풀이 부신 듯이 떨리었다."아이고, 아니 갔구먼!" 하는 속살거림이 들리었다. 그 음향 가운데는 무한한 감사와 무한한 환희 가품 겨 있었다. 감은 눈으로도 가만가만히 다가드는 그의 외씨 같은 발을 볼수 있었다. 그는 금심을 고이 깨워 일으키자 가는 소리로 물었다."주무시나?""주무시긴 누가 주무셔요?왜 인제야 와요?" 금심의 잠꼬대 같은 소리가 대답을 하였다. 나는 눈을 떴다. 춘심은 벌써 내 곁에 앉아 있었다."미안한 말을, 어찌 다 할는지." 그는 말을 꺼내었다."암만 오려니 어데 사람을 놓아야지요. 손님도 안면 있는 이 같으면 사정도 보건만 아는 이란 단지 하나뿐이고 모두 모르는 분이겠지요. 집에 일이 있다니 사람을 놓습니까,몸이 아프다니 사람을 놓습니까. 하다하다 못 해 배가 아프다고 엉구럭을 부리니까 영신환이랑 인단이랑 들여오라겠지요. 속이 상해서 죽을 뻔하였습니다. 오죽이 지루하셨겠습니까?" 하다가 문득 금심을 향 하며,"왜 자리를 아니 깔아 드렸니?좀 편안히 주무시게나 하지." 하고는,"나는 가신 줄 알았어요. 이 못난이를 웬걸 기다리실라고 하였어요. 이런 줄은 모르고 오죽 괘씸히 생각하셨겠나 하였어요. 밤을 새워도 편지로 사과나 할까 하였어요. 그런데 와 보니……." 하고 기쁨을 못 이기는 듯이 말끝을 웃음으로 마치었다. 나는 부시시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선잠을 깬 사람같이 말 한 마디 할수 없었다.그 열렸다 닫혔다 하는 입술과 그럴 적마다 화판(花瓣)이 벌어지며 진주 같은 화심(花心)이 나타나는 모양으로 반짝반짝 드러나는 하얀 이빨과 찡그렸다 폈다 하는 그린 듯한 눈썹과 그 밑에서 흐리다가 빛나다 가하는 까만 눈을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금침은 펼쳐졌다. 하건만 나는 화석이기나 한 것같이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어째 무시무시한 증(症)이 들었다. 이불 속이 곧 지옥인 듯이 들어갈 정이 없었다. 고만 집으로 갔으면 하였다."고만 자십시다. 매우 곤하실 터인데……." 저편도 아주 감개무량한 듯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앉아 있다가 슬픈 음성으로 침묵을 깨뜨렸다."응.""어린애 모양으로 '응’……." 하고 춘심은 소리쳐 웃으며 별안간 나를 부둥켜 안는다. 나는 마녀에게나 덮 친 듯이 머리끝이 쭈뼛하였다. 둘이 그림자는 이불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우들우들 떨면서 두 번 아니오리라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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