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여덟 점이나 되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서로 맞춰 둔 것같이 한 사람 뒤를 한 사람이 잇고 그 사람이 채 자리도 잡기 전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었다.어느 결에 갈고리란 갈고리는 모자와 외투가 빈틈 없이 걸리었다."인제 기생 소리나 한 마디 들읍시다." 한동안 늘 하는 인사와 무미한 담화(談話)가 끝나고 잠깐 무료한 침묵이 있은 후 누가 이런 제의를 하였다."그것 좋지요." 다른 소리가 찬성을 한다."그래 볼까요?" 그런 일이면 내가 도맡지요, 하는 듯한 얼굴로 D는 말을 하였다.그의 쉰 듯한 소리는 뽀이는 불렀다. 퉁명스럽게 꾸짖는 듯이 뽀이에게 분부하기 시작 하였다.가야금이 들어왔다. 장구가 들어왔다. 갈강갈강한 뽀이는 가야금을 잊(忘)기도 하고,장구가 소리가 잘 아니 나기도 하여 D에게 톡톡히 꾸중을 모시었다.하건만 그 뽀이는 '그런 야단이야 밤마다 만납니다.’ 하는 듯이 그 하이칼라 한 머리를 긁 적 긁 적하고는 허리를 굽실굽실하며 연해 연방,"네, 네." 하고 시키는 대로 하였다. 먼저 춘심이가 가야금을 뜯기로 하였다.그는 나에게 등을 향하고 줄을 검사 하기 비롯하였다."저 계집애가 왜 돌아를 앉어!" 나는 화증을 내었다. 그대도록 나는 그의 얼굴을 보기나마 언제든지 계속하고 싶었다.줄을 고르고 저희들끼리 문의도 끝난 뒤,우는 듯한 구슬픈 가야금 가락을 맞추어 느리고 순한 춘심의 소리가 섞여 들리었다."가자가자 어서 가, 위수 건너 백로가……." 말소리는 뚝 끈치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은 그리로 몰리었다.그리고 제각기 고대 음률에 지식이 있어 그 잘잘못을 가릴 듯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그 지식의 발표로 어느 구절에 '좋다’하여야 옳을지 정신을 모르고 있는듯 싶었다."……기경선자(騎鯨仙子)간 연후 공추월지단단 자라 등 저 반달 실어라 우리 고향을 한께 가……." 노랫가락은 멋있게 슬쩍 넘어간다.'흥흥’하는 콧소리가 여기저기서 일어난다.나도 부지불식간에 '흥’하고 말았다. 그 노래는 마치 봄바람 모양으로나 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그 서슬에 얼어붙은 무엇이 스르르 풀리는듯 싶었다.그 무엇이 활개를 벌리고 우줄우줄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였다.그렇지 않으면 어깨가 우쭐우쭐할 리 있으랴!이럴수록 그 노래의 임자 가보고 싶었다. 그 표정이 어떨까?그 입술이!…….'저 맞은편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는 척하고 슬그머니 그의 정면에 가 앉을까?’ 절묘한 낙상(落想)이다!그러나 나의 몸은 무엇으로 동여 맨 것같이 꼼짝도 할 수 없었다.나의 눈은 박힌 듯이 그의 뒤 꼴에 어리고 있었다.앞으로 구부릴 적마다 반질하고 빛나는 그의 머리,연분홍 숙고사 저구리 밑에서 곰실곰실 움직이는 어깨의 윤곽, 늘었다 굽혔다 하는 팔,그 꾸김 꾸김 한 치마 주름…… 이 모든 것보담도 가야금 줄 위에서 남실남실 춤추는 보얀 손가락이 나의 넋을 사르고 말았다.보면 볼수록 그 모든 것에 미(美)가 더하고 매력이 더하였다.때때로 정신이 아찔해지며 모든 것이 한데 뒤범벅도 되었다.그 고사(庫紗)무늬가 서로 뭉켜지기도 하고 치마 주름이 한 데로 몰려지 기도 하였다.어슴푸레한 어둠 가운데서 보얀 손가락만 파뜩파뜩 하기도 하였다. 나종에는 모든 것이 아물아물해지며, 눈앞에 불꽃이 주렁주렁 흩어진다…….
3
요리상은 들어왔다. 우리는 그것을 가운데 놓고 둘러앉았다. 기생들은 술병을 들고 서 있었다.이윽고 비교적 나이 좀 많은 편에 두 노기(老妓)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춘심은!그는 잠깐 나의 안계(眼界)에서 사라졌다. 나는 얼른 좌석을 둘러보았다, 없다!웬일인가?그러다가 나는 마츰내 아모의 곁에도 아니 앉고 오히려 나의 등뒤에 서 있는 그를 발견하였다.그 때의 기쁨은 여간 몇 천원 잃었던 돈을 찾은 것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찾기는 찾았지만 내 곁에 앉을지 말지는 그래도 미지수이다. 감(())이 그저 떨어지기를 기다리랴.못 올라 따겠거든 나무를 흔들기라도 하여야 한다.그것조차 못할 지경이면 그 밑에 입이라도 벌리고 누워야 한다. 앉히려는 뜻만이라도 보여야 한다.나는 밍그적밍그적 몸을 한편으로 밀어 그 의 앉을 자리를 비워 놓았다. 그리고 이리로 앉아요?란 말을 풍긴 눈찌로 몇번 그를 슬쩍슬쩍 쳐다보았다. 남의 눈치는 빌어먹게도 못 알아준다.하다하다 못하여 나는 내 곁에 앉은 P에게 눈꿈쩍이를 하였다.이것은 정말 나의 피땀을 흘린 마음의 노력이었다. P는 춘심을 힐끗 쳐다보더니,"이리 앉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던졌다. 그 당장엔 그냥 뻣뻣이 서 있었다.이 짧은 찰나가 나에게는 얼마나 길었으랴!이윽고 소루룩 코에 앉히는 향기 실린 실바람을 느낄 제,그는 벌써 사뿐하고 나의 왼편 P의 오른편에 앉아 있었다.펄떡펄떡 고동하는 나의 가슴의 장단 맞춤으로 나의 한 옆을 스치는 그의 옷이 사르륵 하고 그윽한 소리를 내었다.그와 나는 서로 대일 듯 말 듯이 앉게 되었다. 이것은 우연인 듯 싶어도 우연이 아니다.이 많은 사람 가운데 하필 나의 곁을 취하랴. 여기 무슨 깊은 의미가 있어야 되리라.암만해도 나에게 마음이 있는가 보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등뒤에 서 있을 리도 없을 것이다.그도 나 모양으로 나를 알고 친하기를 마음 그윽이 갈망하고 있었으리라.이런 생각을 한 나는 말할 수 없는 환희를 느끼었다.자석에 끌리는 쇠끝 모양으로 우리 둘의 사이는 점점 다가들어 갔었다.그의 팔과 가장 스치기 쉬웁도록 나의 팔은 슬며시 나려 놓이었다.나의 손은 그 보드라운 살에 대이기 전에 먼저 그 보들보들한 옷자락에 더할 수 없는 쾌미(快味)를 맛보았다.나는 술잔을 비우고 또 비웠다. 아니 비우고 견딜 것인가.그 힘을 빌려야만 나에게로 날아오는 행복을 꼭 잡을 수 있다. 아니라,그의 보얀 손 이재 불 동하며 방울방울이 잇딸아 떨어진 이 술이야말로 행복 그것이 아니랴!적어도 행복의 구름을 걸러 내린 감로수(甘露水)가 아닐 수 없다.우리는 말만 하면 속에 잡아놓은 행복이 날아갈까 두려워하는 것같이 그는 묵묵히 부어 주고 나는 묵묵히 마시었다.나의 마음은 실실이 풀어졌다. 그리면서 한껏 긴장하고 있었다.평소 때와는 달라 술은 좀처럼 취해 오르지 않는다.정신은 잔을 거듭할수록 더욱 말뚱말뚱해 갈 뿐이었다.그의 손을 쥐자면 서도 그의 얼굴을 보자면서도 그와 말을 하자면서도 나는 헛되이 시선을 딴데로 돌리어,너절한 남의 말참예를 하고 있었다. 술은 벌써 열 잔이 넘어갔다.전 같으면 이미 정신 모르고 나뒹굴어졌으리라.하지만 웬일인지 오늘 밤에는 잔을 거듭할수록 정신은 더욱 말뚱말뚱하였다. 술은 열 잔이 넘어갔다.그제야 조금 얼큰한 듯하였다. 나는 담배 하나를 집어 들었다."성냥 없소?" 라고 나는 그에게 첫 말을 건네었다. 그것도 그의 담배 붙이는 것을 본 까닭 이었다.그는 성냥 한 개피를 그었다. 나는 으레 붙여줄 줄 알고 담배 문 입을 내밀었다.하나 그는 불을 붙여 주려고도 않고 그것을 나에게 준다. 나는 실망도 하고 섭섭도 하였다.하지만 붙여 달랄 용기는 없었다. 하릴없이 그것을 받았다. 실망한 빛이 나의 안색에 드러났으리라.그 다음 순간 에그 앵두빛 같은 입술이 방실 열리며, 나에게 무어라고 소근거렸는가!그는 마치 변명하는 듯이 방긋 웃으며,"불을 붙여 주면 아니 된데요." 이것은 더 의외이었다. "어째 그래?""저!……." 매우 말하기 어려운 듯이 망살거리다가 또 한 번 빙글 하고는 말을 이어"저!정이 갈린대요. 왜 저!첫날밤에 신부가 신랑의 담뱃불을 붙여 주면 소박 맞는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아요?" 꿀 같은 말이다!아모리 부끄럼 많은 도련님이라 한들 이에 미쳐서야 말문이 아니 터지랴!"그러면 나에게 소박 만날까 걱정이란 말이지?" 나는 뚫을 듯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다그쳐 물었다.그는 부끄러운 듯이 시선을 피하며 의미 있게 웃기만 한다. 그 아름다운 입술이란!모든 것을 잊고 열렬한 키스를 하고 싶었다.그것은 못하나마 나의 손만은 어느 결에 상 밑에서 그의 녹신녹신한 손을 꼭 쥐고 있었다.이 말 끝을 잃어서는 아니 된다. 무슨 말이든지 하여야 될 것 같다.하나 아까 생각 해 놓은 절묘한 언사는 다 어데로 갔는지?씻은 듯이 잊고 말았었다.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앵무새 모양으로 남의 늘 하는 말을 되풀이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름이 무엇?""춘심이야요.""고장이 어데?""○○이야요.""나도 ○○사람이야.""참말씀이야요?""그러면 거짓말 할까?""네에……." 하고 고개를 까딱까딱하였다. 그의 손가락이 살금살금 나의 손 안을 누르고있다.나는 또 술을 한 잔 마시었다."자꾸 술만 잡수셔서 어찌합니까?진지를 좀 드시지요." 담긴 밥이 그대로 남아 있는 밥 보시기를 가리키며 그는 잔상스럽게 권하였다. "나는 괜찮아. 참, 밥 좀 먹지?""싫어요." 그는 고개를 흔든다. 나는 밥 보시기를 그의 앞에 갖다 놓으며,"시장 할 것을 그래,좀 먹어요.""아니, 먹기 싫어요.""그러면 무엇 딴 것이라도 먹어야지.""아까 잔뜩 먹었어요." 우리는 벌써 사랑이 흠씬 든 애인끼리 하는 모양으로 서로 생각하며 서로 아끼고 있다.문득 여러 사람의 웃는 소리가 우레같이 나의 이막(耳膜)을 울린다. 나는 깜짝하며 고개를 들었다.모든 시선은 우리에게로 몰리었다. 모든 웃는 얼굴은 이리로 향하여 있다."미남자는 다른걸.""○○야 오죽이 이뻐야지.""아암, ○○보고 아니 반하면 눈 없는 기생이지!""둘의 얼굴이 한 판에 박아 놓은 듯이 같은걸.""저런 부부가 있었으면 좀 어울릴까?""별소릴 다 하네. 오늘밤에라도 되면 그뿐이지." 모든 사람은 웃음 섞어 이렇게 떠들었다.나의 얼굴은 모닥불을 담아 붓는 듯이 화끈화끈하였다. 그것은 부끄럼의 불 때문뿐이 아니다.빨간 행복의 불꽃도 방글방글 피고 있었음이라.그러나 나의 얼굴과 그의 얼굴이 같다 함에는 불복이었다.살거리가 흰 것은 서로 어금버금할는지 모르리라 마는나의 오목한 코끝과 알맞은 이마 넓이는 그의 그것들의 발 벗고 따를 바 아니다.말이 났으니 말이지, 나의 얼굴은 남에게 그리 뒤지지 아니리만치 못 생긴 것은 아니었다.더구나 나의 눈은 C의 말을 들으면 가을 물같이 맑은데 맥맥한 정파(情波)가 도는 듯한 것이었다."자네에게는 계집이 많이 따르리니." 한 것은 어느 친구의 나를 비평한 말이다.나도 어째 그럴 듯싶었다. 우선 오늘밤으로 말하면 나는 벌써 춘심이가 나에게 홀린 줄 알았다.저는 기생으로 예사로이 하는 것이라도 나에게는 의미심장한 것이었다.물론 나도 그에게 마음이 기울어졌으리라 하되 그것은 여성으로의 그의 아름다움에 끌림이요,그가 나보담 잘나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렇다 하고 여러 사람의 칭찬이 기쁘기는 하였다.그 기림이 춘 심으로 하여금 나의 잘난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점에 있어 더욱 기뻤다.나는 빙그레 득의양양한 웃음을 웃었다."둘이 한 곳에만 붙어 앉아 쓰나?춘심이. 이리도 좀 오게그려." 나와 맞은 편에 앉은 M이 그 험상궂은 상에 어울리지 않는 간악한 웃음을 띠며 그를 부른다.나는 어이없이 M을 바라보았다. 나의 눈은 감때 사나운 형이 제 작난감을 보자고 할 때 쳐다보는 어린 아우의 그것 모양으로 그것을 앗길까 하는 두려움과 또 그것을 빼앗지 말아 달라는 애원이 섞여 있었으리라. 그는 그리로 갔다. 하건만 나는 의연히 기뻤다. 그가 가도 그저 아니 간 까닭이다. 몸을 일으키는 그 찰나에 그 아름다운 얼굴을 나에게로 돌리며 눈웃음을 쳤다."잠시라도 나리 곁을 떠나가기는 참 싫어요. 그래도 기생 몸 되어 손님이 부르는데 아니 갈 수 없습니다. 눈 한번 깜짝할 동안만 참아 주셔요. 내가 곧 돌아올 터이니……." 그의 추파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였다."될 수 있는 대로 얼른 오게. 벌써 오나!" 나도 눈으로 이렇게 일렀다. M은 음흉한 웃음을 껄껄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아 이끌 사이도 없이 안반 같은 제 무릎 위에 올려 앉힌다. "저런!" 남에게 저렇게 쉬운 일이 나에게는 왜 그리 어려웁던가?"이것을 좀 보아, 어떤가?" M은 춘심의 어깨에 머리를 누이며 나를 보았다."어떻기는 무엇이 어때?" 나는 태연히 말을 하였다마는 나의 귀에도 그 소리가 억지로 지은 것 같이 울림을 어찌할 수 없었다. "오장이를 짊어지고도 분하지 않아?""아이고, 참 죽겠는걸." 이번에는 한 불 넘어 보았다. 그래도 자리 잡힌 소리는 아니었다.몹시 가슴이 울렁거린다. 암만 시치미를 따도 그가 남에게 안긴 것을 보기 싫었다.스스러운 생각이 무의식한 가운데에도,또 스스로 부정하면서도 마음어 데서 인지 움직이고 있었음이리라. 나는 툇마루로 나왔다.M의 노닥거리는 꼴도 보고 있기 무엇하였고 또 먹 은 술이 왼 몸에 불을 일으켜 선선한 공기도 마시고 싶었음이라.웃고 떠드는 소리가 가끔 흘러 듣기지만 거기는 딴 세상같이 고요하였다.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한참 서서 저도 모르게 무슨 생각을 하고있었다.이윽고 무심히 고개를 돌린 나는 무엇에 놀랜 듯이, 가슴이 꿈틀 하였다.나의 앞에 춘심이가 서 있다."어데를 가?" 나는 몇 해 못 만나던 절친한 친구와 길거리에서 뜻밖에 마주칠 때 모양으로 반갑게 소리를 쳤다.그러자마자 그의 가냘픈 허리는 벌써 나의 가슴에 착 안겨 있었다. 그 날씬날씬한 허리란!자릿자릿 눌리는 가슴이란!나는 잠깐 황홀하였다."집이 어데야?" 나는 슬며시 감았던 팔을 풀며 생각난 듯이 물어 보았다."그것은 왜 물으셔요?"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번연히 알겠거늘 왜 채쳐 물을까?나는 잠깐 할말이 없었다. 그는 제 일신에 관한 무슨 중대한 해결을 기다리는 것처럼 얼굴빛을 바루고 있다. "그것을 왜 물어!" 나는 혼잣말같이 중얼거리었다."왜 물으셔요?" 그는 대질러 묻는다."나, 놀러갈 터이야." 나는 간신히 이 말을 하였다."놀러는 왜 오셔요?" 그는 또 다그쳐 묻는다."자네 보고 싶어서." 하고 나는 다시금 그를 잡아다리었다."고만두셔요." 하고, 그는 몸을 빼치며 냉연하였다."그것은 또 웬말이야?" 나는 정말 웬 셈인지 알 수 없었다."그래, 나를 보고 싶으실까요?""그러면!""무얼, 지금뿐이지. 내일이면 씻은 듯이 잊으실걸 뭐." 하고,원(怨)하는 듯 한(恨)하는 듯 눈을 깔아 메친다. 나는 꿈을 처음으로 깨인 듯하였다. "무슨 그럴 리가 있나?" 나는 부드럽게 그를 위로하였다. 이 말은 결코 곁을 바르는 말이 아니었다.충장(衷腸)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흥, 그럴 리가 있나?나도 많이 속아 봤습니다." 그는 이 말을 남기고 돌아서더니 나를 떠나 한 걸음 두 걸음 생각 깊은 발길을 옮기었다.나는 무엇을 잃은 듯이 망연하였다. 별안간 그는 발길을 휙 돌이킨다.방긋 쏟아지는 듯한 웃음을 흘리고 선뜩 나의 앞에 들어서자 그 다음 순간에는 그의 향기롭고 보들보들한 두 팔이 나의 목을 잡고 있었다.그리고 그 부드러운 입술이 나의 귀를 스칠 듯말 듯 하며,"참말 나를 아니 잊으실 터이야요?" 라고 소곤거렸다. 나는 정신이 얼떨떨하였다. 한동안 말도 나오지 않았다."그래, 나를 아니 잊으실 터이야요?""잊을 리 없지.""정말?" 하고 물끄러미 쳐다보다가,"꼭 그리 하셔요." 란 말과 함께 나에게 달콤한 키스를 주었다."다옥정(茶屋町) ○○번지. 위선 이 번지를 잊지 마셔요." 나는 기계적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이 연회가 끝나거든, 우리 같이 가요, 꼭." 하고,가볍게 나의 등을 두드린 후 저 갈 데로 가버렸다. 나는 우두머니 그대로 있었다.미끈하고 그의 팔이 감기었던 목 언저리는 무슨 기름이 발라있는 듯싶었다.그리고 나의 입술은 무슨 버레가 기어다니는 것같이 근 실 근실하였다.나는 웃음을 띠고 방에 돌아왔다. 모든 사람이 나를 보고 웃는 듯싶었다.방바닥이고 천정이고 전등불이고 모다 나에게 웃음을 건네는 듯하였다.말끔 좋은 사람들 뿐이라 하였다. 이런 좋은 사람들에게 술 한 잔 아니 권할 수 없다 하였다.나는 차례로 술을 권하였다. 나도 그 돌려 주는 술잔을 사양치 않았다. 나는 잔뜩 술이 취하였다.그 뒤에 들어온 춘심은 인제나 의 것이 되고 말았다.세상 없는 사람이 불러도 나는 그를 놓지 않았다. 그가 기어이 가야 될 사정이면 둘이 같이 갔었다.나는 주정을 막 하였다. 간에 헛바람 든 사람 모양으로 연해연방 웃었다.술을 더 가져 오라고 뽀이를 야단도 쳤다. 할 줄 모르는 노래를 고함 치기도 하였다.그 너른 방을 좁다고 휘돌며 춤도 추었다. 내 마음대로 놀았다.남이야 싫어하든 미워하든 비웃든 욕하든 나는 조금도 관계치 않았다.사( 社) 의 윗사람이 몇 있었지만 그것들!다 초개(草芥)같이 보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