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봉천!중국 사람들의 그 시끄럽고 요란하던 복잡한 거리도 밤이 들 어서 지금은 깊은 산 속같이 컴컴하고 공동묘지같이 고요하였습니다. 그러지 않아도,깊숙하고 충충스런 중국 사람들의 길가 상점집이 지금은 무서운 마귀의 집같이 컴컴한 땅 위에 무슨 엉큼한 물건을 품고 엎드린 것 같이 흉악해 보였습니다.그 지옥같이 컴컴한 길로 꾸물꾸물 움직여 걷고 있는 이상한 검은 그림자 두 개!수군수군 이리 흘깃 저리 흘깃 연하여 사 면을 휘휘 들러보면서 느릿느릿 나아가는 검은 그림자 두 개……. 그것은 상호와 한기호였습니다. 벌써 봉천에 온 지도 사흘째나 되건마는 원래 처음 와 보는 곳이라,만나 는 사람마다 중국 사람뿐인데 그 큰 목소리로 쌈 싸우듯 왁자지껄 하게 던 지는 소리가 한마디 알아듣기는커녕 귀가 시끄러워 정신이 어리둥절할 지경 이므로 마음대로 활동할 수가 없었습니다.오는 길로 그 비밀 편지에 적혀 있던 ‘전중여관’ 이란 곳에 찾아가서, 시치미 뚝 떼고, 방 하나를 치우고 있으면서 아무리 눈치를 보았으나,곡마 단 단장이 이곳에 오는 법도 없고 이 집주인이 출입할 때마다 뒤를 따라 보아도 수상한 것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대체 이놈들이 봉천으로 아니 오고, 아마 중도에서 어디로 딴 데로 가버 리지나 않을까?’ 생각할 때에 상호는 눈이 캄캄하였습니다. 공연히 허방을 짚고 이렇게 먼 곳에까지 왔으니 곡마단 일행이 이곳에 와 있지 않고 딴 데로 갔으면, 이 넓은 중국 땅에서 어디로 간 줄 알고 순자를 찾으러 간단 말인가……. 만사 는 다 어그러졌고 불쌍한 순자와는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었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상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 하였습니다. 옆에 있는 기호 역시, ‘일이 다 틀어졌구나!’ 하고 속으로는 낙심하였으나, 상호가 자꾸 우는 것을 보고 마음이 딱하여, “낙심하지 맙시다. 여기까지 와서 낙심하면 될 수가 있겠소?여기서 며칠 기다려 보면, 그래도 무슨 눈치가 있겠지요.” 하고 위로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날 저녁 때 일이었습니다.상호와 기호가 여관 이층에서 저녁밥 을 먹고 마루 난간에 나와서 섰노라니까, 아래층 주인의 방에 어저께도 왔 었던 절름발이 늙은 신사가 또 찾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머리와 수염이 허옇게 센 점잖은 노신사인데, 한편 다리가 고무다리인지 굵다란 단장을 짚 고 절름절름하면서 지팡이로 지탱하여, 걸음을 걷는 모양이었습니다.상호는 늙은이거나 누구거나 이 집주인과 상종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주의 하여 살펴보아야 한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변소에 가는 체하고 일부러 내려 가서 주인 방 옆을 지나면서 이야기하는 말소리를 주의해 들으려 하였습니 다.그러나 창 밖에 가깝게 가자 이때까지 젊은 사람같이 기운 찬 소리로 이야 기하던 것이 뚝 그치고, 밖에 발자취 소리가 멀리 지나가 버리기를 기다리 는 모양이었습니다. ‘옳지,무언지 비밀한 의논인가 보구나.’ 생각하고, 상호는 하는 수 없이 그냥 지나 변소에 다녀서 다시 그 방 옆을 가깝게 스쳐 지났습니다.말소리는 여전히 아까와 같이 또 뚝 그쳤습니다. ‘옳지, 분명히 비밀한 이야기다!’ 하고, 상호는 이층으로 올라와서 기호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어떻게 하면, 그 늙은 절름발이 신사가 누구인 줄을 알아낼 수가 있을 까?’ 하고, 궁리궁리하였습니다. 심부름하는 계집 하인을 불러 물어 보니까, “가끔 놀러 오시는 바둑 잘 두는 노인이여요.” 할 뿐이었습니다.바둑 두는 늙은이면 이야기를 그렇게 비밀히 할 리 없을 터인데 하고, 상호는 도리어 더 이상히 생각하였습니다. 안타깝게 머리를 썩이고 섰던 상호는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아까 그 계집 하인을 불러서 돈 50전을 먼저 주고, “이따가 그 늙은이가 주인의 방에서 나오거든 그때 얼른 차를 뜨겁게 끓 여서 찻잔에 담아, 그 늙은이를 갖다가 대접해 주게.” 하였습니다. 하인은 별로 의심하지도 않고 돈 50전만 감사하면서 그리 하마고 대답하였 습니다.그 후 두 시간이나 지나서 밤이 몹시 깊은 때에 절름발이 늙은 신 사는 주인의 방에서 지팡이를 짚고 거추장스럽게 절름거리면서 나왔습니다.계집 하인이 분주히 펄펄 끓는 차를 담아 들고 쫓아가서 구두를 신으려고 허리를 억지로 구부린 그에게 대접하였습니다.그때 분주히 상호가 뛰어 내려가서 급한 일이나 있는 듯 후닥닥 뛰어 나가 신발을 신는 체하다가 계집 하인에게로 쓰러지는 것처럼 하면서 차를 들고 서 있는 팔을 쳤습니다. “에그머니!” 하면서, 계집 하인이 들었던 찻잔을 떨어뜨리자, 그 뜨거운 차가 절름발이 늙은 신사의 양발 신은 발에 쏟아졌습니다. “아, 앗, 뜨거!” 하고, 일본말로 소리치면서, 늙은 신사는 벌떡 일어서면서, 한 발로 딛고 한 발을 들어 흔들면서, 쩔쩔 매었습니다. 그런데 차에 덴 발은 성하던 발 이고,버티고 섰던 발은 절름발이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하고, 상호는 굽실굽실 사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곧 도로 이층으로 올라 와서, “여보, 기호 씨.들어맞았소. 그 놈이 분명히 곡마단 단장 녀석이오.” 천만 뜻밖에 그 늙은이가 곡마단 단장이라는 말에, 한기호는 어떻게 반가 운지, 전기에 찔린 사람 같이 뛰어 달려들었습니다.“내가 일부러 그 놈의 발에 더운 차를 엎지른 것은 그놈이 정말 다리 병 신인가 가짜 병신인가, 그것을 알려고 그랬소. 그래 엎질러 놓고 그 놈의 발과 얼굴을 주목해 보았더니,절름거리던 발을 힘 있게 버티고 섰던 것을 보니까, 거짓말 가짜 절름발이입니다. 그리고 ‘아, 뜨거!’ 하는 소리가 늙은이 소리가 아니고 아주 기운찬 젊은 소리입디다. 그때 얼굴을 보니까 모두 곡마단 단장인 데 남의 눈을 속이고 넌지시 이 집주인과 만나느라고 그렇게 능청스럽게 절름발이 행세를 하는 모양이오.자, 어서 일어나시오. 그 놈의 뒤를 쫓아갑시다.” 두 사람은 몸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번개 같이 뛰어 여관 문을 나서서 여 전히 컴컴한 길로 절름절름 걸어가는 흉악한 곡마단 단장 놈의 뒤를 따라섰 습니다.그래 지금 이 컴컴한 마귀의 세상 같은 어두운 거리로 수군수군하 면서 움직여 걷는 두 그림자의 저 앞에는 또 하나 검은 그림자가 절름절름 걷고 있었습니다.“저 놈이 우리가 이렇게 조선에서 여기까지 쫓아와서 지금 저의 뒤를 밟 아 가는 줄 알까 모를까?” “글쎄, 알기만 하면 화닥닥 돌아서서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할는지 모르 지…….” “이 바닥에 저놈의 부하가 어디 어느 구석에 숨어 있는지 모르니까 위험 하오.” 두 사람은 수군수군 가슴을 조이면서 따라갑니다. 한참이나 가다가 기호가 별안간, “에쿠.” 하고, 상호의 팔을 꽉 붙잡고, 뒤로 주춤하였습니다. 상호도 깜짝 놀라 주 춤하고 서서 보니 까, 큰일 났습니다. 앞에 가던 단장 놈이 별안간 우뚝 서 더니,휙 돌아서서 두 사람에게로 걸어옵니다. 두 사람은 머리끝까지 오싹하였습니다. ─《어린이》5권 2호 (1927년 2월호). 20. 계교와 계교
중국 땅 봉천 시가의 어두운 밤!지옥 길 같이 캄캄하고 음침한 길로 숨을 죽이고 뒤를 밟아가던 상호와 기호는 앞에 가던 거짓 절름발이가 별안간 휘 쩍 돌아서는 것을 보고 가슴이 성큼하여 말뚝같이 우뚝 섰습니다.‘마귀보다도 더 흉악스러운 곡마단 단장 놈이, 무슨 맘을 먹고 돌아섰을 까.’ 생각할 사이도 없이 그는 절름절름 우뚝 서 있는 두 사람 편으로 걸어왔습 니다. ‘큰일 났다!’싶어서 두 사람의 머리는 으쓱였습니다. 정신이 멍하였습니 다. 저놈 한 놈뿐만 같으면, 그리 염려할 것 없이 힘대로 싸워 보자마는,만일 저놈이 달려들면서 군호를 하여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부하들이 뛰어 나오면 어찌할까……. 그런 것 저런 것을 믿는 것 없이는 저렇게 혼자서 가깝게 달 려들 리가 없는데……. 전기같이 이 생각 저 생각이 두 사람의 머리에 빛났다 꺼졌다 할 사이에, 벌써 그 놈은 두 사람의 코앞까지 와서 우뚝 섰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쑥 내밀더니,“혹시 성냥을 가졌으면 하나 주십시오.” 하고, 능청스럽게 늙은이 소리로 묻습니다. 어둠 속에서 자세히 보니, 딴은 그의 입에는 꼬부랑 골통대가 물려 있습니다.달려들지 않는 것만 다행히 여기고 기호가 성냥갑을 꺼내 주려고 양복 주 머니를 뒤적뒤적 하는데, 상호가 한 손으로 기호의 팔을 왁 잡으면서 그 놈 을 향하여, “예,미안합니다마는 우리는 담배를 못 피우므로 성냥을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하였습니다. “흥, 이거 밤길을 걷는 데는 담배를 피여 물어야 하는데, 성냥이 없어서 오늘도 못 피우겠군!” 하고, 혼잣소리를 하고, “실례하였소.” 하고는, 다시 돌아서서 절름절름 걸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그제 서야 마음을 휘 놓았습니다.그리고 천천히 또 그 뒤를 밟아 가기 시작하였 습니다. “여보, 왜 아까 내가 성냥갑을 내주려는데 당신이 없다 하고 막아 버렸 소?” 하고, 기호가 상호에게 궁금히 물었습니다. “그놈이 정말 성냥이 없어서 우리더러 달라 할 리가 있나요. 우리에게 성 냥을 달래서,담뱃불 붙이는 체하고 성냥불로 우리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 고 그랬지요.” “하하하, 나는 깜빡 모르고 있었소. 꺼내 주었더라면 큰일 날 뻔하였구 려,” “큰일 나구말구.그렇게 얼굴을 코앞에 들이대고, 불을 켜 들고 들여다보 면, 우리 얼굴에 수염 만들어 붙인 것과 변장한 것이 모두 들킬 것 아니겠 소,” “글쎄 말이요. 나 때문에 혼날 뻔하였소!” 하고, 수군거리면서 뒤따르는 상호와 기호는 앞에 절름거리면서 가는 단장 놈이 어떻게 능청스럽게 보이고 흉측해 보이는지, 총이라도 있으면 그냥 곧 쏘아 버리고 싶게 미웠습니다.
21. 이상한 암호
캄캄한 거리로 골목을 몇 번인지 꺾어서, 절름발이는 어느 창고같이 생긴 이층집 문 앞에 우뚝 섰습니다. 붉은 벽돌로 모양 없이 튼튼하게만 지은 집.어두운 밤이라서 그 무거운 문이 마치 감옥문같이 보였습니다. 뒤에 따라가던 두 사람은 냉큼 길가 어두운 구석으로 기어들어 숨어서 그 의 동작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절름발이가 거기 서서 전후 좌우를 휘휘 둘러보더니, 아무도 보는 이가 없 는 줄 알고 안심한 듯이 문 앞에 바싹 들어서자,대문은 안으로부터 열리고 그 안에서 한 사람이 내다보고 무어라 쑤군쑤군하는 것 같더니, 절름발이도 안으로 쑥 들어가고 무거운 문은 다시 굳게 닫혔습니다. “저놈의 집이 까닭이 있는 집인 모양이군!” 하면서, 두 사람은 어두운 구석에서 뛰어나와 그 이상한 벽돌집을 두루 살 피기 시작하였습니다. 대문 앞에까지 바싹 가서 성냥불이라도 켜 들고 문패며 번지수를 조사하고 싶었으나,그놈의 대문 한 겹 안쪽에 어떤 놈이 문지기 노릇을 하고 앉은 모양이니,신발 소리를 내거나 성냥 긋는 소리를 내기만 하면 당장 뛰어나 오겠으므로 그러지는 못하고 그 집 옆에 골목이 있는 것과 뒤로는 야트막한 중국집과 맞붙어 있는 것과 골목으로는 높은 담이 싸여 있는 것만을 조사하 였습니다.“이크, 또 와요. 또 한 놈이 오니 들어서요.” 기호가 속살거리는 소리에 상호도 그 옆 골목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서서 보니,과연 양복 위에 외투 입은 한 놈이 그 집의 대문 앞에 우뚝 섰습니 다.여기는 바로 그 집 벽 밑이라 아까보다는 훨씬 가까워서 그 놈의 손짓 하나 말소리 하나도 빼놓지 않고 듣고 보구 할 수가 있었습니다.놈은 대문의 손잡이 위를 손등으로‘똑똑똑똑똑’천천히 꼭 일곱 번을 때 렸습니다. 그러니까 아까처럼 안으로부터 문이 열리고 한 놈이 고개를 쑥 내미는데,그때 안으로부터 희미 하나마 등불 빛도 비쳐 나왔습니다. 외투 입고 온 놈은 이번에는 왼편 손을 주먹 쥐어 쑥 내밀더니,오른편 손의 둘 째손가락과 가운데손가락과 문을 내밀어 왼편 주먹에 두 번 들었다 놓았다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내다보던 놈은 대문을 더 활짝 열고, 그놈을 들여보 내고, 다시 무겁게 닫혀 버렸습니다. “자세히 보았소?대문을 일곱 번 두들기고 왼손 주먹에 바른손 두 손가락 을 두 번 내민 것이 분명하지요?” “분명히 그랬소. 아마 그것이 그놈들의 암호인 모양이오.” “그러면, 그게 무슨 의미일까?” “어쨌든 암호까지 있는 것을 보면,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은 분명한 모양이 오.” “그야 물론이지요.” 무서운 집 어두운 담 밑에서 가슴을 울렁거리면서 소곤소곤 이야기 할 때,또 그 집문 앞에 와서 손잡이의 위를 똑똑똑 때리는 사람이 있어서, 두 사 람은 숨을 죽이고 눈과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번에 온 것은 일본 옷 입은 여자 한 사람,중국 옷 입은 남자 한 사람이 었습니다. 문이 열리고 안에서 문지기의 얼굴이 쑥 나오더니 여자를 보고 머리를 굽혀 인사하는 모양이었습니다.그러나 여자와 남자와는 역시 각각 왼손을 주먹 쥐어 내밀고, 오른손 두 손가락을 그 위에 두번 내밀어 보이고 쑥 들어갔습니다. 그것을 보면 아는 사람이거나 모르는 사람이거나,으레 그렇게 하고야 들 어가는 엄중한 규칙인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곡마단 단장과 그 부하들의 비 밀!그것은 대체 무슨 비밀이며, 왼손 주먹에 바른손 두 손가락은 무슨 의 미일까?사람은 가슴을 울렁거리면서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서서 궁리궁리하였습니 다. 어쨌든지 그놈들이 단순한 곡마단 패가 아니고 이곳에 그들의 나쁜 패가 더 많이 있어서,모두 연락해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결단코 허투루 볼 패 는 아니고 무슨 무서운 비밀한 계획이 있는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22. 무서운 모험
머나먼 길, 국경을 넘어서 남의 나라 땅에까지 쫓아와서 어두운 밤!무섭 게 캄캄한 밤에 마귀 떼의 집도 이제는 찾았고 또 그 집 속에 지금 여러 연 놈이 모여드는 것까지 알아내었으나,그러면서도 손끝 하나 대여보지 못하 고 있는 생각을 하면 두 사람의 마음은 안타깝기 한량이 없었습니다.생각대로 하면 지금 당장에 담이라도 뛰어넘어 이놈의 집 속에 들어만 가 면 그 속에 불쌍한 순자가 갇혀 있든지 묶이어 있든지 찾아낼 수 가 있을 것이요,또 그놈들의 비밀을 알아내고 어머니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 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아 그러나 이 집,이 담 너머에는 그놈의 떼가 몇 십 명이 있는지 몇 백 명이 있는지 아는 도리가 없으니, 약하디 약한 두 몸이 섣불리 들어갈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떡할까요?” “글쎄요.” “이 집 속에 순자가 갇혀 있을 것 같은데요. 그놈들이 모여서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지요.” “글쎄요, 우리가 이러고만 있어서는 안 되겠는데…….” 그들의 가슴은 타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떻게 할까?상호의 두 눈에는 순자 의 우는 얼굴과 사진에서 본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이 번갈아가며 나타나 보 였습니다.그러다가는 불쌍한 순자가 그 곡마단 단장의 그 지긋지긋한 채찍에 두들겨 맞아서 온몸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참혹한 정상이 눈에 자꾸 어른거렸습니 다. 그의 가슴은 떨리고,그의 손은 저절로 주먹 쥐어졌습니다. ‘죽더라도 뛰어 들어가 보자.’ 고 엉뚱한 일을 뒷일 헤아릴 새도 없이 결심하였습니다.“내가 들어가 볼 터이니 당신은 여기서 기다려 보아 주시오.” 하고, 상호는 기호에게 떨리는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들어가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어쩌자고 그 속에를 들어간단 말씀이 오?” 기호는 걱정하면서 상호의 손을 쥐고 굳이 말리었습니다. “그 속에까지 들어갈 것이 아니라 문을 열거든 그 문지기 놈을 끌어내서 두들기고 물어 봅시다. 그것이 낫지 않아요?” 기호가 생각한 이 꾀는 잘 생각한 꾀였습니다. 그러나 문을 열기만 하면 그놈이 혼자 지키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요, 또 만일 혼자 지키고 있다 하더라도,그냥 잠자코 끌려 나올 리가 없는 것이니까 소리를 지르던지 또 무슨 군호로 저희 떼에게 통지를 하여 여러 놈이 나올 것이 분명한 것이었 습니다.그러나 다행한 일인지 불행한 일인지 지금의 두 사람은 그런 것을 염염히 생각할 만큼 마음이 조용하지를 못하였습니다.기호는 담 밑에 숨어서 망을 보고 있기로 하고 상호 혼자 그 마귀 같은 집 대문 앞에 올라섰습니다.가슴이 두근두근 몹시도 울렁거리는 것을 참으면 서 대담스럽게 ‘똑똑똑똑’ 일곱 번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안으로부터 문을 열려고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었습니다.상호의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쳤습니다. —《어린이》5권 3호 (1927년 3월호).
23. 문에서부터
어둔 깊은 밤!지옥길같이 무섭고 어두운 중국 봉천의 깊은 밤!상호는 이때까지 벽 밑에 숨어 서서, 악한들이 들어갈 때마다 하는 짓을 보고 배워 가진 암호 한 가지만 믿고,순자를 구해 낼 욕심에 전후 위험을 생각할 사이도 없이 뛰어가서 그 마귀의 굴 같은 괴상한 벽돌집의 무거운 대문을 똑똑똑 일곱 번을 두드렸습니다.그러나 안에서는 문지기 놈이 일곱 번 치는 암호가 틀리지 않는 것을 믿고 문을 여느라고 덜컥덜컥 소리가 들 리므로,이제는 악한과 얼굴을 마주치케 될 것을 생각하고 갑자기 가슴이 울렁거렸습니다. 일곱 번 두드리는 암호가 맞아 문을 열기는 하지마는 얼굴을 마주 대하면 당장에 탈이 날 것이니,이 급한 경우에 어째야 좋을까 하여 저편 벽 밑에 몸을 움츠리고 서 있는 기호는 상호보다 더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었습니다.덜그럭덜그럭 마귀굴의 그 무겁디 무거운 문이 열리고 컴컴한 속에서 귀신 대가리같이 시꺼먼 얼굴이 쑥 나왔습니다.들키느냐 죽느냐 하는 판이라 벽 밑에서 보고 있는 기호도 몸이 움찔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슴이 덜덜 떨리었 습니다.상호는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억지로 참으면서 두 손을 내밀어 왼손 주 먹 위에 오른손 두 손가락을 얹어 두 번째의 암호를 해 보이려 하다가 별안 간 튀어 나가는 총알같이 휘딱 뛰어서 뒤로 댓 걸음 물러서 별렀습니다.내다보던 문지기 놈은 무언지 눈앞에 섰던 놈이 전기에 찔린 것같이 휘딱 하고 없어지므로, 이상히 여기어 등불을 들고 쫓아 나왔습니다.나와서는 등불을 쳐들고 이리저리 바쁘게 찾는데 그때 물러서서 벽돌집에 박쥐같이 착 붙어 있던 상호가, 다시 번개같이 날아서 달려들어 그 놈을 얼싸안고 엎 드렸습니다.그러고는 몸과 두 다리로 그놈의 몸을 누르고 손으로 주둥이를 내리막아 눌렀습니다. 원래 어려서부터 곡마단 왜광대로 길러진 상호의 솜씨라 어떻게 번갯불같 이 날쌔게 들이쳤는지,별안간 습격을 당한 문지기는 미처 정신 차릴 사이 도 없이 엎혀 눌려 가지고 사지를 버둥버둥하였습니다.그러자 그 꼴을 보 고 있던 기호가 뛰어나와서 둘이서 그놈을 끊는 물에 삶아 낸 것같이 기운 을 죽여 가지고, 우선 저편 기호가 숨어 있던 어두운 벽 밑으로 끌고 갔습 니다.
24. 무서운 칠칠단의 떼
문지기 놈의 사지를 묶어서 바깥벽 밑 기호에게 맡겨 두고, 상호는 대담스 럽게 그 무섭고 캄캄한 마굴문 안으로 들어가서 문지기 자리에 앉았습니다.곧장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기는 하지마는, 어디로 해서 어느 방으로 들 어가는 줄도 모르고,그 안에 몇 백 명이나 있는지 영문을 몰라서 우선 여 기 앉아서 동정을 살펴보아 가지고 들어갈 작정이었습니다.그 집 속은 꽤 깊은 모양이어서 조금도 사람의 말소리는 가늘게도 들리지 않고, 가끔 가끔 여러 사람의 손뼉 치는 소리가 퍽 멀리서 가늘게 들려올 뿐이었습니다.이 무서운 마굴 속에 들어와서 여러 놈들의 손뼉 소리를 들으니, 그 집의 깊고 우중충한 것으로든지 무시무시한 것으로든지 마치 멋모르고 지옥 속에 기어들어온 것 같아서,새삼스럽게 겁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바깥일은 기호가 잘 맡아보려니 하고 믿고,상호는 안쪽 손뼉 소리 나는 그쪽으로 귀를 기울이면서 가만가만 한 걸음 한 걸음 더듬어 가 보았 습니다. 기침 소리만 조금 나도 탈이 날 듯하여 숨을 죽이고,엉금엉금 발을 떼어 놓는데, 그때에 언뜻 사람 소리가 났습니다. ‘인제는 틀렸구나!’ 쭈뼛하여 가랑이를 벌린 채 제웅 같이 우뚝 섰습니다. 고개도 까닥 못하고 섰노라니까, 저 등 뒤편에서 어떤 놈이 왔는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 습니다.상호는 이제야 조금 제 정신을 차리고 마음이 놓였으나, 들어오는 놈이 어 떤 놈인지 얼굴을 맞닥뜨려 가지고 어떻게 새삼스럽게 가슴이 뛰놀기 시작 하였습니다.똑똑 두드리는 것을 헤어보지는 않았으나, 물론 일곱 번을 쳤으려니 하고 상호는 사뿐사뿐히 걸어가서 덜컥덜컥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고 보니까,거 기 키가 9척 같은 얼른 보기에도 중국사람 같아 보이는 놈이 서서 상호 앞 에 왼손 주먹을 내밀고 그 위에 오른손 두 손가락을 얹어 보이므로,상호는 얼굴을 숙인 채 시치미를 뚝 떼고 문을 활짝 열고 그놈을 안으로 들였습니 다.그놈은 별로 눈치를 채지 못한 모양인지 그냥 뚜벅뚜벅 걸어서 어두운 구 석을 큰 한길같이 안으로 들어가는지라,상호는 문을 잠그는 것도 잊어버리 고 대담하게 얼른 키 큰 놈의 뒤를 따라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놈은 아무 의심도 안 하는지 의심하면서도 무슨 흉계로인지,문지기(상 호)가 뒤에 서서 들어가는 것을 태연히 알면서 아무 말 없이 그냥 걸어가고 상호는 어두운 속이라 뒤에 바짝 붙어서듯 따라 들어갔습니다.
25. 무서운 죄악 내용
희미하게 불빛이 비치기는 하나마, 으슥하고 컴컴한 방을 셋이나 뚫고 지 나서 또 아래로 내려가는 캄캄한 층계를 셋이나 더듬어 내려가니까,바로 그 옆방에 모여 있는지 사람들의 소리가 귀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상호의 가슴은 덜컥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도로 돌아설 재주도 없어서,상호는 들키면 잡히고 잡히면 죽을 셈치고 그냥 따라 들어섰습니다. 앞에 선 키 큰 놈이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상호도 들어서 보았더니 거기는 마치 학교 교실 둘을 잇대어 놓은 것만큼 크고 넓은 방에 전등을 다섯 군데 나 달리어 밝기가 낮 같은 데 무슨 회의인지 30여 명 되는 사람들이 저마다 걸상에 걸터앉아서 단장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고, 아까까지 절름발이 짓을 하면서 걸어오던 능청스럽고도 흉악한 단장은 일어서서 한참 연설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모여 앉은 사람 중에는 중국옷을 입은 사람이 10여 명 되고 나머지는 모두 양복을 입었는데, 그 중에는 단장의 마누라까지 합쳐서 여자가 다섯 사람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단장의 연설이 뚝 그치고 무슨 호령이나 한 듯이 모든 사람의 얼굴과 눈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로 쏠리었습니다. 어찌 되나 싶어서 상호의 가슴에서는 갑자기 두방망이질을 치는데, 키 큰 중국놈은 차려를 하 고 서서 단장의 얼굴을 노려보면서, 체조하듯 힘을 들여 왼손 주먹에 오른 손 두 손가락을 얹고 섰는지라, 겁나는 중에도 상호는 그대로 흉내를 내고 섰습니다. 한참이나 서로 마주 본 후에 단장이 고개를 끄덕하니까, 키 큰 놈은 이제 야 한편 끝 걸상에 앉는지라 상호도 그대로 그의 옆 걸상에 앉았습니다. 모여 앉은 사람 중에는 단장의 신임을 받는 사무원이 너덧 사람 섞여 앉아 있는 모양이었으나, 상호가 코 밑에 수염을 붙이고 있고 77의 암호까지 익 숙하게 하니까 먼 곳에 갔다 온 자기네 부하로 안 모양인지, 아무 딴 눈치 없이 단장의 연설은 계속되었습니다.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이번에는 조선 경성에 들렀을 떼에 두 남매의 도망 질 사건이 생겨서 잘못하면 우리들의 본색이 탄로되겠으므로, 얼른 경성을 떠나고 조선 땅 밖으로 나오는 것이 편하겠다 생각하고 부랴 부랴 짐을 거 두어 가지고 도망해 오듯 온 것이오.” 상호는 그것이 자기 남매의 이야기인 것을 알고, 정신을 바짝 차리어 한마 디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두 귀를 바짝 기울이고 앞으로 다가앉았습니다. “그런데 그 오라비란 놈은 이내 잡지 못하였고 누이동생만 잡아가지고 왔 는데, 그러는 통에 곡마단 벌이도 못하였거니와 가지고 갔던 아편을 전부다 처치해 버리지 못하고 간신히 3분의 1밖에 못 치웠는데 그 수입이 1천 3백 원!나머지는 도로 가져왔고 또 조선 계집애 겨우 열세살 먹은 것 하나밖에 는 걸리지 않아서 그것 하나만 숨겨 가지고 왔을 뿐이오.그러니까 통틀어 말하면 이번 조선에 들렀던 일은 성공하지 못한 셈이오. 그러나 그것은 사 정상 경성에서 도망해 오듯 급히 오느라고 그리된 것이니깐 하는 수 없는 일인 줄 아오.그런즉 3분의 2 그냥 가지고 온 아편은 여기 있는 여러 사람 이 활동하여 여기서 팔아야겠고,새로 잡아온 조선 어린이는 나이가 열세 살이나 되고 인물이 제법 똑똑하니까 적어도 1백 50원 이상은 수입이 될 것 같소.그런데 새로이 한마디 하여야 할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번에 경 성에서 저희 외삼촌을 만나서 도망한 것을 도로 잡아 가지고 온 나미꼬(순 자의 일본 이름)는 이제는 암만 해도 오래 붙어 있을 리 없고 또 저희 오라 비 놈이 자꾸 빼어 가려고 애를 쓸 것이니까,곡마단에서는 한시바삐 그 애 가 하는 재주를 다른 애에게 가르쳐 가지고 얼른 나미꼬를 팔아버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여러 사람도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 좋겠고,또 어느 때고 오라비 놈이 이곳까지 쫓아올는지도 모르는 것이니까, 여러 사람 들은 각각 주의하는 것이 좋을 줄 아오.” 이 놀라운 연설을 듣고 있는 상호는 얼굴이 핼쓱해 벌벌 떨며 앉아 있었습 니다. 아아, 놀라운 비밀!흉악한 죄상!그놈들 칠칠단의 무서운 내용에 몸 서리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곡마단은 겉 문패에 지나지 목하고 아편을 가져다 넌지시 장사하고,또 조 선의 계집애를 꼬이거나 훔치거나 하여서는 중국 놈에게 팔아먹고……. 아 아, 어떻게 중치를 하였으면 그 원수를 시원히 갚을 것이겠습니까?상호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떨리었습니다. 더구나, 나중에 이야기한 “순자를 잃어버리기 전에 미리 팔아넘겨 버리겠다.” 는 말에 상호의 마음은 그냥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지르고 미쳐 날뛸 것만 같 았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순자가 보이지 아니하니 우선 순자를 어디다 어떻게 감 춰 두었는지,그것을 안 후에 할 일이라 억지로 억지로 진정을 하면서 상호 는 힘써 눈치를 채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큰일 났습니다.상호 옆에 앉았던 그 무섭고 징글징글한 키 큰 중 국 놈이 다가오더니, 손목을 확 붙잡았습니다. 상호는 깜짝 놀라 이제는 죽었구나!하고 가슴 속에 부르짖으면서도 그래 도 어떻게 이놈을 또 속일까 하고 꾀를 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은 아주 틀렸습니다. 그때에 방문이 덜컥 열리더니,천만뜻밖에도 진짜 문지기 놈 (사지가 묶여 매어 길 밖 기호 군에게 붙들려 있을 놈)이 어떻게 살아 왔는 지 얼굴을 수그리면서 황급히 뛰어 들어와 상호에게로 다가왔습니다. “이제는 틀렸다!” 하고, 낙심이 될 때 상호의 핼쑥하던 얼굴은 목이 부러진 것같이 푹 수그러 졌습니다. ─《어린이》5권 5호 (1927년 5ㆍ6월호).
26. 이상한 보고
지옥 나라같이 무서운 칠칠단의 본굴 속에 들어와서 그들의 비밀회의에 참 례해 앉은 것도 겁나기 짝이 없는 대담한 모험이거든,별안간에 옆에 앉았 던 중국 놈이 손목을 칵 잡고 달려들며 밖에서 두들겨 묶어서 기호에게 맡 겨둔 문지기 놈까지 달려 들어와 놓았으니,그때의 상호의 놀라운 가슴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이제는 자기가 칠칠단원이 아닌 것이 드러날 것은 물론이요, 문간에서 문 지기를 두들겨서 묶어 놓고 들어온 것까지 드러나고,자기가 저놈들이 원수 같이 여기면서 찾고 있는 상호 당장인 것까지 들켜나게 되었으니,뭇 고양 이 떼에게 외로이 에워싸인 작은 쥐같이 되어 도저히 살아날 길이 없는 것 을 알 때에 상호의 고개는 제꺽 부러진 것같이 그냥 폭 수그러졌습니다.들 키고 잡히고 묶이고 죽도록 두들겨 맞고 그럴 생각을 하면, 몸이 그냥 아스 러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도피할 꾀가 없는 지라‘이제는 되는대로 되어라!’ 하고 상호는 아주 두 눈을 딱 감고 늘어져 버렸습니다. 문지가 단원이 황급히 뛰 어 들어온 것을 보고, 단장은 물론이요,30여 명 단원은 눈이 둥글하여 호 령이나 내린 것처럼 일시에 우뚝 일어섰습니다. 그리고는 불안에 놀란 눈을 그의 한 몸으로만 쏘았습니다.문지기는 상호의 옆에 우뚝서더니 두 팔을 번쩍 들었습니다. 들어서는 왼 손은 주먹을 쥐고 오른손은 두 가락만 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팔과 팔을 ×표로 엇질렀습니다.그렇게 하기를 두 번하고는, 곧 뛰어서 황급한 걸음 으로 도로 나아가 쿵쿵쿵쿵 층계로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무슨 급한 일을 보고하는 것 같았습니다.문지기가 그렇게 하고 나가자, 모든 단원의 얼굴은 더욱 놀란 짐승의 얼굴 같이 되었습니다. “준비를 하여라!” 하고 단장의 무거운 소리가 내리자, 그들은 우수수 흩어져서 모자를 찾아 쓰는 놈, 단장을 찾아 잡는 놈, 호주머니에서 수염을 꺼내서 코에 붙이는 놈,누렇고 커다란 안경을 꺼내 쓰는 놈, 제각각 저마다의 준비를 하느라 고, 꽤 수선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입들은 꼭꼭 다물어 말 한 마디 하지 않고,수족만 움직이면서 간 혹 할 말이 있으면 가만가만한 소리로 남의 귀에 대고 말했습니다. 상호는 이 이상한 광경을 보자 조금 기운을 차렸습니다.그리고 당장 급한 경우를 면한 것을 더욱이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머리에는 갑자기 여러 가지로 이상한 생각이 서로 엉클어지게 되었습니다. 첫째 어찌하여 문지기 놈이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까?기호의 손에 묶이어 있을 그놈이 기호를 어떻게 해 놓고 들어왔을까 하는 궁금한 생각이요,둘 째는 여기까지 쫓아 들어온 그놈이 어찌하여 자기를 보고도 달려들어 여러 놈에게 이르지 않고 못 본 체하고 저의 할 보고만 하고 그냥 나갔을까 하는 생각이요,셋째는 그놈이 들어와서 두팔을 들어 단장에게 보고를 할 때에 모르고 그랬는지 알고 그랬는지, 자기의 왼발 발등을 밟고 섰었던 것입니 다. 무슨일로 발등을 밟았을까……, 이런 여러 가지 궁금한 생각이 어지러운 물결같이 핑핑 돌 때에, 그때에 별안간에 방 한 구석 따르릉……하고, 초인 종이 우는소리가 요란히 들렸습니다. 그 소리에 파랗게 질린 단원들이 눈이 동글하여 자리를 일어섰습니다.
27. 땅속의 비밀 출입구
무슨 통지인지 종소리가 요란히 나자 단장도 눈이 둥글하여 옆에 가져다 놓았던 모자를 집어쓰더니 지팡이를 짚고, “자아,문간에 위험한 일이 생긴 모양이니 어서 빨리 뒷길로 헤어져 나아 가도록 하라.” 하고는, 말끝도 채 맺지도 못하고 자기의 등 뒤편에 있는 문을 열고 그리로 들어갔습니다.단장의 뒤를 따라 30여 명 단원도 모두 한 번씩 방 속을 휘휘 둘러보면서 그리로 들어갔습니다. 맨 끝에 섰는 상호는 새삼스레 망설였습니다.어느 곳으로 어째서 가는 것인지 영문도 모르고 따라가자니 어두운 그 속 에 발을 내밀기가 무시무시하고,아니 따라가자니 당장 무슨 위험스런 일을 닥뜨리고 있는 이 집에 혼자 있을 수도 없거니와 그놈들이 지금 어디로 가 는지 따라가지 않으면 순자를 어디다 감추어 두었는지 알아낼 수도 없을 것 이라,여기까지 애쓰고 들어온 고생이 중도에 허사 가 되고 말 것이었습니다. ‘에라, 죽어도 한번 죽지, 별 수가 있겠니!’ ‘순자를 찾아야 한다. 순자의 있는 곳을 찾아내야 된다.’ 가슴 속에 부르짖으면서 상호는 그들의 뒤를 따라섰습니다. 거기는 한 칸 통의 조그마한 방이었습니다.광 속과 같이 물건, 궤짝, 깨 어진 헌 책상, 못 쓰게 된 침대, 그 따위 물건들이 쓰레기통 속같이 어지럽 게 쌓여 있는데,저편 맞은쪽 벽에 방장 같은 헌 휘장이 쳐 있고 그 휘장 뒷벽에 큰 구멍이 뚫려 있어서 그놈들은 차례차례 휘장을 들고 그 구멍 속 으로 기어 나가고 있었습니다.마음을 결단하고 뒤에 따라선 상호는 그 구 멍이 무슨 구멍인지 그 구멍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그들의 하는 대로 맨 나중에 휘장을 젖히고 캄캄한 구멍 속으로 고개와 허리를 꼬 부리고 들어갔습니다. “인제는 아무 급한 일이 있어도 우리는 안전하다.” “그럼,이 구멍까지 나서기만 하면 그만이지.” 하면서, 놈들은 마음 놓고 천천히 기어가고 있었습니다. 캄캄한 좁은 구멍은 한이 없이 길었습니다.한참이나 기어가서 조금 널찍 한 방 속 같은 헛간이 있기에 이제는 그 구멍이 끝났나 보다 하였더니,거 기서 한숨을 돌려 가지고 다시 또 계속하여 저편 쪽 구멍으로 기어가기 시 작하였습니다. 아까 그 집 그 방이 땅속으로 층계를 셋이나 지나 내려가 삼층 밑 방 이었 으니,지금 이 길다란 구멍은 땅속으로 삼층이나 되게 깊은 곳에 이렇게 길 게 뚫려 있는 것이라, 그리로 기어가면서도 속으로 상초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궐련을 두 개쯤은 피움직한 오랜 동안 캄캄한 기다란 구멍을 지나서 그들은 다시 전등 켠 밝은 방에 나섰습니다.위험한 일이 닥뜨려 왔 다는 급한 통지에 놀라 그들은 툭하면 이렇게 귀신도 모르는 땅속 길로 기 어서 딴 동네로 옮겨오는 것이었습니다.그러니 누구인들 그들의 이렇게 땅 속 깊이 삼층이나 되게 깊은 곳에 깊을 내놓고 다니는 줄을 알 수 있겠습니 까?“다 왔느냐?” 하고, 단장이 거기 가서 물으니까, “예, 다 왔습니다.” 하고 여러 놈이 대답하였습니다. “자,여기서는 한꺼번에 우르르 나가지 말고 둘씩 셋씩 동안을 띄어 슬금 슬금 나가야 한다.” “예, 나가는 법도 다 잘들 압니다.” “자, 그러면 얼른 이 집 털보를 불러 오너라.” 한 놈이 층계 위로 쿵쿵쿵 뛰어 올라가더니, 한참만에야 털보를 데리고 내 려왔습니다. 털보는 단장을 보더니 허리를 굽실하면서, “별안간에 웬일이십니까?또 무엇이 쳐들어왔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무엇이 왔는지 위험하다는 보고가 있고 나중에는 도망하라는 종소리까지 났으니까 무슨 큰 변이 나기는 나는 모양이지……. 그런데 이 집에는 위층 이 어떻게 되었나?아직 손님들이 많은가?” “예, 아직 열한 시 조금 지났을 뿐이니까요. 술 먹는 손들이 세 팬지 네 패인지 있습니다.“그러면 다들 둘씩 셋씩 음식 먹고 나가는 것처럼 동안 동안 띄어서 헤어 져 나가되, 나까무라하고 왕 서방하고 키다리하고 세 사람은 곧 여관으로 가서 순자를 데리고 이리로 와서,광 옆의 방에 넣어 두고 털보와 함께 잘 지키고 있거라. 이런 위험한 일이 생기는 때는 암만해도 순자가 도망할까 봐 염려다.” “예!” 여러 놈 틈에 끼어서 이 말을 듣는 상호의 귀는 쫑긋하였습니다. 순자!순 자!순자라는 소리에 그의 가슴은 갑자기 뛰놀았습니다. “자아, 그러면, 둘씩 셋씩 나가거라!” 단장의 명령에 단원은 흩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28. 마굴을 빠져 나와
단원이 한 반쯤 나갔을 때에 상호는 중국 놈 한 사람과 짝을 지어 나가게 명령받았습니다. 될 수 있으면 순자를 데리러 가는 세 놈과 함께 나가 그들 의 뒤를 따르려 하였으나,그들은 세 사람이 한 패가 되어 나간 지 오래되 었고, 그 후 곧 그 다음 차례에도 못 나가게 되고 한 사오십 분이나 떨어져 서 이제야 중국 놈 한 놈과 나가게 명령이 내리니, 상호는 삼층이나 층계로 올라가면서 어찌해야 순자를 만나게 될꼬!하고 그 생각만 하였습니다. 삼층이나 올라와 보니, 그제야 거기가 땅 위였습니다. 좁다란 복도를 지나 고 조그만 방을 셋이나 지나서니까,거기는 길가 널따란 방이 술청으로 되 어 십여 개 따로따로 떨어져 놓여 있는 식탁에 여기저기 서너명씩 손님이 둘러앉아서 술을 먹고 있었습니다.이 흉악한 놈들의 겉으로는 이렇게 천연스럽게 요릿집을 꾸며서 장사를 하 면서 속으로는 단원들의 소굴로 통하는 땅속 길을 파 놓고 드나 드는구나!생각할 때에 상호는 새로이 무서운 것을 느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호는 순자를 만나는 것, 만나서 뺏어가지고 도망할 것 외 에는 아무것도 생각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어째야 할꼬?어째야 할꼬?하면서 무심히 중국 놈의 뒤를 따라가는 상호 는 앞서 나가던 중국 놈이 벌써 문 밖의 한길에까지 나갔건마는 고개를 숙 이고 생각에 골몰하느라고 걸음걸이에는 정신이 없었습니다.그때 별안간에 상호의 지나가는 옆에 상에 혼자 앉았던 손님이 한 발을 쑥 내밀자, 상호는 그 발에 걸리어 엎드러질 뻔하였습니다. “앗, 이거 실례하였습니다.” 앉았던 손님이 벌떡 일어나더니 사과의 말을 하면서 엎드러질 뻔한 상호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극히 작은 소리로, “나요, 나요.” 하고 급하게 속살거렸습니다. 상호가 보니까 천만 뜻밖에 그는 기호였습니 다. “웬일이오?” 하고, 기쁜 김에 손을 흔들며 물으니까, “앉으시오. 크게 말 말고 여기 앉으시오.” 하고, 기호는 눈짓을 하여 상호를 그 식탁 앞에 앉히었습니다.“이리로 그놈들이 도망을 하게 시킨 것은 내가 한 짓이요.” 역시 작은 소리로 속살거렸습니다. “응, 당신이 시킨 짓이라니?” “아까 저쪽 집에서 문지기처럼 변장을 하고 들어갔던 것이 나야요. 그래 내가 눈치 채라고 당신의 발을 꼭 밟지 않았나요?” “옳지, 옳지……. 나는 그 문지기가 왜 나한테 덤비지 않고 발등만 밟았 을까 하고, 지금까지도 궁금히 여겼었지…….” “당신이 안으로 들어간 후에 나는 그놈을 묶어서 데리고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당신이 도로 나오지를 않으므로 어떻게 염려하였는지 몰라요. 그 러니 어떻게 소식을 알아보는 재주가 있어야지……. 당신이 혼자 그 속에 들어가서 붙들리기나 하였으면 당장에 생명이 위태할 듯싶어서 마음이 조 비비듯하여 무슨 꾀를 생각하다 못하여,주머니에 있던 돈 5원 짜리를 꺼내 서 묶어 가지고 있는 문지기 놈에게 주고 살살 꾀었지요. 그러니까 그 놈이 원래 돈만 아는 중국 놈이라,5원 짜리를 보더니 회가 동하는 모양이야. 묻 는 대로 대답을 잘 합디다. 그래 문을 지키고 있다가 급한 일이 생기면 뛰 어 들어가서,두 팔을 엇갈라 질러서 보고하는 것과 그 다음에 정 급하면 초인종을 누르면, 다 땅속 길로 도망하는 법인 것도 다 배웠지요.그래 그 땅속 길로 도망하면 이쪽의 요릿집으로 빠져 나오는 것까지 알고는 그놈과 옷을 바꾸어 입었지요.그리고 회중전등을 켜 들고 얼굴을 대강 그놈처럼 꾸며 가지고 들어갔던 것이어요.” “참 잘 하였소이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모를 것을…….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해도 관계없나요?” “아무 염려 마시오. 여기는 보통 요릿집으로 꾸민 것이니까 아무나 들 어와서 술을 먹는 데니까요. 이야기를 크게만 하지 않으면 그만이야요.” “옳지, 옳지…….” “그래 변장을 하고 들어가 보니까, 꼭 붙들려서 고생을 당하는 줄 알았던 당신이 거기 무사히 앉아서 참례하고 있는 것을 보고,우선 안심하고 위험 하다는 보고만 얼른 하고 도로 뛰어나왔지요. 그래야지 거기 오래 있으면 서투르게 변장한 것이라 탄로가 날까 봐서요.” “밤이라 그런지 얼른 보고는 모르겠습디다.” “그래 나중에 초인종까지 눌러 놓고는 이제는 모두 땅속 길로 해서 요릿 집으로 헤어져 나오려니 하고 다시 옷을 바꾸어 입고 이리로 뛰어 와서 술 먹는 체하고 당신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앉아있는 중이예요” “참말 잘 하였소. 그런데, 그 정말 문지기 놈은 지금 어디 두었소?” “그놈은 역시 묶어 놓은 채로 그 벽돌집 대문 안에 항상 제가 앉아 있는 문지기 자리에 눕혀 놓았지요.” “옷을 벗기고 나서, 다시 묶었구료?” “그럼 어떡하나요!고생스러워도 잠깐만 묶여 있으라고 했지요. 나중에 돈을 또 주마고 했지요.” 상호는 기호가 항상 자기만큼 재주와 꾀가 적은 줄 알고 갑갑하게 여기다 가, 오늘 그 일을 보고,참말로 마음속에서 기뻐하였습니다. 그만하면 든든 한 일꾼으로 믿을 수 있게 된 것이 제일 기뻤습니다. “그런데, 순자 씨는 어찌 되었나요?그 속에서 못 만나셨나요?” 하고, 이번에는 기호가 물었습니다. “못 봤어요. 그런데 지금 저놈들이 순자를 여기다가 갖다가 감추어 둔다 고 세 놈이 데리러 갔어요. 곧 올 것입니다.” “그럼 그놈들을 쫓아갈 걸 그랬습니다 그려.”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나오는 차례가 그렇게 되야지요. 그래 놓치고 만 걸요.”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여기서 기다려 보지요. 이리로 데리러 올 것이니까.” “그렇지만 여기서는 만난다 해도 빼어 갈 수가 없을 테니까요.까딱 하기 만 하면 저쪽편 안에서 몇 명이 쏟아져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그럼 어쩔까요?큰 탈이로구려.” “여기서 만나면 빼앗지도 못하고 탈이어요.” “그러니 어쩌면……” 하다가 상호가 말을 뚝 그치고 벌떡 일어나 기호의 어깨를 꾹 찌르면서, “쉿!” 하였습니다. 기호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이켜 상호가 보는 쪽 을 보니까, 일은 벌써 닥뜨렸습니다. 한길로 난 문이 열리고 세 놈의 남자가 먼저 들어서는데, 그 뒤에 단장의 마누라가 순자를 데리고 따라 들어옵니다. 아아, 순자!순자!불쌍한 순자!얼마나 두들겨 맞고 얼마나 고생을 하였 지 병자같이 파랗게 마른 저 순자의 참혹한 얼굴!두 사람의 눈에는 벌겋게 핏발이 서고 몸이 부르르 떨렸습니다. 그리고 상호의 눈에는 눈물이 솟았습 니다. ─《어린이》5권 6호 (1927년 하기 방학호).
29. 나다 !상호다
실상은 칠칠단의 비밀한 소굴이면서, 겉으로는 뭇 손님을 드나들게 하는 간편 요리점!무서운 요리점!삼층 지하실까지 있는 이 마귀의 집속에 얼마 나 악한이 엎드려 있는지 그것도 알 수 없거니와,깊은 밤이건마는 대낮같 이 휘황한 전등 밑에 이 상 저 상에 앉아서 술과 요리를 먹으며 앉아 있는 놈들도 어느 놈이 정말 손님인지 어느 놈이 악한 패들인지 몰라서,생각만 하여도 몸이 떨리는 괴상한 요리점에 대담스럽게 앉아서 상호와 기호가 순 자를 구해 낼 의논을 하는데, 그때 단장 마누라와 단원 세 놈이 불쌍하게 파리한 순자를 에워싸고,요리점 앞문으로부터 들어왔습니다(물론, 단장의 명령을 받아 순자를 이 집 속에다 감추어 두려고 데리고 온 것이었습니다). 아아, 순자 순자!불쌍한 순자!얼마나 두들겨 맞고 얼마나 고생을 하였는 지 병든 사람같이 파랗게 마른 저 순자의 얼굴!두 사람은 눈에는 뻘겋게 핏발이 서고 몸이 부르르 떨렸습니다. 그 놈의 떼가 열 명인거나 백 명이거나 상관하지 말고,와락 와락 달려들 어 번개같이 순자의 몸을 뺏어 가지고 총알같이 도망을 하였으면 얼마나 얼 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러나 그것은 지금 경우에 꿈에도 바랄 수 없는 일 이고,섣불리 덤비었다가는 무슨 봉변을 하게 될는지 모르는 터라 두 사람 은 울렁거리는 가슴 떨리는 주먹을 그대로 쥐고 보고 서있는 수밖에 없었습 니다.일어서 있던 상호는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앉으면서 즉시로 주머니에 서 명함지 하나를 꺼내고 목에 걸린 줄에 매어 달린 연필로 급하게 참말 급 하게, 나다. 상호다. 염려 말고 있거라. 오늘밤으로 기호씨와 함께 구하러 오마 !
이렇게 휘갈겨 써서는 읽어 볼 사이도 없이 손아귀에 웅크려 쥐고 다시 일 어섰습니다.그 동안에 단장의 마누라는 순자를 데리고 요리조리 휘휘 둘러보면서 요리 점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는 문 쪽으로 가다가, 털보 주인 영감과 인사를 하 고 있었습니다.마치 남 보기에 오래간만에 찾아오는 손님처럼 꾸미느라고 일부러 길다랗게 하는 인사였습니다. 상호는 갑자기 술이 무척 취한 걸음걸이로, “께흡, 으응 오늘은 몹시 취한다.” 하고,취한 소리로 중얼중얼거리면서 비틀비틀 단장 마누라 섰는 곳으로 갔 습니다. 가서는 처음 발견한 듯이 물끄러미 그의 모가지와 등덜미를 들여다 보다가, “흥. 참말 미인인걸.우리 미인 나하고 인사 좀 합시다 그려, 께흡.” 하 면서, 엎어지는 것처럼 두 팔을 벌리고 단장 마누라를 안으려고 덤비었습니 다. “에그머니, 망측해라!” 일본말로 소리치면서 단장 마누라는 급히 몸을 피하였으나, 상호는 벌써 그의 왼편 손을 잡고 비틀비틀 순자의 앞에 쓰러져서 매달리게 되었습니다.요릿집이라 이러한 술주정은 흔히 있는 터이니까 남들은 모두 그리 대단히 여기지 않고 재미있게 구경만 하고 있는데,그 중에 주인 털보와 부하 세 명만은 벌떡벌떡 일어서서 가깝게 다가섰습니다. 단장 부인의 몸에 여차하기만 하면 달려들려는 준비였습니다.그러나 그러 나 단장 마누라는 자기가 잡힌 손을 뿌리치기에만 애를 쓰느라고 상호의 뒷 손이 순자의 손과 마주 닿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다른 부하 놈들은 단장 마누라의 몸에만 주의하고 섰느라고, 번개같이 빠른 그 동작을 보지 못하였 습니다. “술을 잡수면 혼자 얌전하게 잡숫지, 이게 무슨 실례의 짓이오?” 단장 마누라는 참다 참다 못하여 이렇게 제법 점잖게 꾸짖는 소리를 하고 잡힌 손을 뿌리쳤습니다. 그때는 벌써 순자의 손에 명함지를 쥐어 준 뒤라, 상호도 처음 정신을 차린 체하고 벌떡 일어서서,
“아이구, 실례했습니다. 술이 취해서 요리점 보이인 줄 알고 그랬습니 다.” 능청스럽게 비틀거리면서 사죄 인사를 하고, 비틀비틀 자기 자리로 도로 돌 아왔습니다.와서는 기호의 넓적다리를 넌지시 꾹꾹 찔러 재촉해 가지고, 돈 몇 푼을 술값으로 내어 놓아 두고, 역시 비틀걸음으로 걸어 나아갔습니 다.
30. 귀신 같은 계책
바깥은 선선한 깊은 밤중이었습니다. 거의 새벽 가까운 밤중이었습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상호는 기호에게, “나는 여기 서서 요릿집 속을 살피고 있을 터이니,그 동안에 당신은 여 관으로 가서 여관 밑층 주인의 방 앞에 매달린 그 새장을 떼어 가지고 속히 오시오. 요릿집 문을 닫기 전에 속히 오셔야겠으니,가다가 인력거라도 잡 아타고 속히 갔다 오시오.” 하였습니다. 기호 역시 상호의 계책을 얼마쯤은 짐작하는 터이고, 더구나 지금은 어물어물 시간을 지체할 때가 아니라,두말없이 뛰어가서 인력거꾼 을 깨워 일으켜 가지고 여관으로 달려갔습니다. 기호를 보내놓고 상호는 그 요릿집 앞 어두운 벽 밑을 오락가락하면서 유 리창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털보 주인이 두어 번 안으로 들어 갔다가는 즉시 다시 나오고 술 먹던 손님 중에는 한 패 세 사람이 나갔으나, 그 대신 또 새로운 패 세 사람 한패,다섯 사람 한 패가 모두들 얼근히 취해 가지고 전후하여 새로 들어와 각각 자리를 잡아 가지고 앉아서 술을 먹는데,세 사 람 패의 상에서는 유성기를 갖다 놓고 요란한 중국 소리를 틀고 있었습니 다. 대체 중국의 이 따위 간편 요릿집이란, 밤이 새도록 내처 문을 안 닫고 장사를 하는 모양이요,손님들도 날이 새거나 해가 돋거나 마음 놓고 느긋 이 먹는 것이 보통인 모양이었습니다.그러는 중에 어쩐 일인지 요릿집 저쪽으로부터 단장 마누라가 나오더니 거 기서 술 먹고 앉았던 키다리 녀석을 데리고 밖으로 나아가 저편 어두운 길 로 걸어갔습니다. 그러자,인력거가 뚜루루루 요릿집 앞에까지 와서 우뚝 섰습니다. 깜짝 놀 라 돌아다보니까, 그는 기호였습니다.돈을 달라는 대로 주어 인력거는 돌 려보내고 기호는 상호에게 새장을 쥐어 주면서, “주인 녀석은 잠이 든 모양이더구먼.하인 년이 자지 않고 있어서 물래 뛰어 오느라고 혼이 났었소.” 하였습니다. “그랬겠지요. 자, 이제 또 들어갑시다.” 하고,상호는 기호를 앞세우고 새장을 든 채 또 요릿집으로 비틀거리면서 들어갔습니다. “께흡!암만해도 술이 덜 취해서 그냥 갈 수가 있습니까?또 먹으러 왔지 께흡!” 한편 상 아래에 쓰러지는 듯이 자리잡고 앉아서 술과 두어 접시의 요리를 청하여 먹으면서 상호는 자주 기호의 귀에다 대고 소근소근 비밀한 이야기 를 한참이나 하였습니다.시간이 늦어 갈수록 술기운이 온 방안에 넘쳐지는 것 같아서 손님들의 콧 노래도 점점 높아지고, 유성기 소리도 점점 요란한 무도곡 같은 것이 돌아 가기 시작하였습니다.그러니까 술 먹다 일어서서 비틀비틀 하면서 유성기 에 맞춰 무도를 한다고 떠드는 주정꾼도 생겼습니다. 그때였습니다.상호는 넌지시 새장 문을 열어서 그 속에 있던 새를 한 마 리 내놓았습니다. 노랗고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몹시도 시원하다는 듯이 요 리점 천장으로 후루룩 날기 시작하였습니다.상호와 기호는 실수하여 놓친 것처럼 꾸미느라고 벌떡벌떡 일어서서, “에그머니, 에그머니.” “잡아라!잡아라!” 떠들면서 이리저리 새를 쫓아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술 먹는 패들은 ‘야, 이것 심심치 않은 구경이 생겼다’ 고 곧 손뼉들을 치면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그러나 그 새가 자기네의 앉은 머리 위로 날다가 전기 등을 건드려 놓아서 전등이 흔들거리고,전등 위에 오래 오래 앉았던 숱한 먼지가 재 쏟아지듯 이 요리 접시와 술잔 위에 쏟아졌습니다.그러니까 그 밑에 웃고 앉았던 패들도 골이 나서 모두 일어서서 새를 잡으 려고 쫓아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이번에는 새가 여러 사람에게 쫓겨 다니 느라고 미쳐 날뛰느라고 이리저리 나르면서 똥을 찍찍 깔겼습니다. 그러니까 보이와 털보까지 쫓아와서 새를 잡으려고 총채를 들고,혹은 비 를 들고 쫓아다니기 시작하여 온통 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유리창이나 문을 열어 놓았으면 그리로 새가 날아 나가고 아무 일도 없으련마는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이 이리로 우르르 저리로 우르르 몰려다니느라고‘쿵 쾅쾅 쿵쾅쾅!’안에서 듣기에 바깥 요릿청에 난리가 난 것 같으므로 이상하 게 생각하고 안에 있던 놈도 눈이 휘둥그레하여 쫓아 나왔습니다.그 틈에이렇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상호는 안문을 열고 후닥닥 뛰어 들어갔습니 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새를 쫓아다니느라고 아무도 그것을 안 사람은 없었습 니다.한참이나 새를 잡느라고 소동하는 중에 몸이 날씬한 손님 하나가 모 자를 벗어 들고 후려갈겨서 구석으로 몰아가지고 모자로 사뭇 눌러서 시원 스럽게 잡았습니다.쫓아다니던 모든 사람이 시원해 하면서 ‘휘’ 하고 숨을 돌려 쉬었습니 다. “야, 요놈이 그렇게 여러 사람을 미치게 하였담!” 하면서, 잡은 새를 들여다보고 신기해하기도 하고 얄미워하기도 하다가 잃 어버린 임자에게 주려고 임자를 찾았으나,이상한 일인지 그들이 앉았던 상 에는 새장과 음식 접시가 놓였을 뿐이고, 두 사람이 모두 그림자도 없었습 니다. 기호는 상호가 안으로 들어간 것을 보고,조금 후에 밖으로 사라져 나갔으니, 상호가 이 집안에서 순자를 구하면 삼층 밑 그 지하실로 도망하 여 저편 동네 창고집으로 빠져나올 약속이므로,자기는 바깥 한길로 돌아 그 창고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 계책이었습니다. 그런 줄은 꿈에도 모르는 요릿집 놈들과 손님들은‘웬일일까, 웬일일까?’ 하고 이상해 하면서 새장을 가운데다 놓고 궁금한 짐작으로만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31. 땅속의 비밀 길로
교묘한 계책으로 바깥을 수라장으로 만들어 놓고 그 틈을 타서 대담하게 마굴 속에 뛰어 들어간 상호는 들어서기는 하였으나,갑자기 가슴이 울렁거 리고 다리가 떨리는 것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안에 아직도 몇 놈이나 있는지 모르겠고,바깥에서 또 어느 때 우르르 쫓아 들어 올지도 모르는 노 릇이 되어서 더욱 가슴이 울렁거렸습니다. 그러나 기왕 들어선 걸음이라 잡히면 잡히는 그때까지 해 보는 수밖에 없 다고,상호는 층계 아래로 허둥허둥 내려가면서 이 방 저 방 미친 사람같이 후딱후딱 들여다보면서 급한 소리로, “순자야, 순자야!” 하고, 불러 보았습니다. 마음은 조 비비듯 하면서 급급히 부르건마는 아무 데서도 대답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상호는 점점 마음이 조 비비듯 하였습니다. 삼층 밑바닥에까지 내려가면 서, “순자야, 순자야!” 불렀습니다. 삼층 밑 방 그 옆방으로 가면, 저편 동네 창고 집으로 도망해 가는 땅 속 길이 있는 방인데, 거기서 한 번 더, “순자야, 순자야!” 하고 불렀습니다. “앗!” 그때에 상호의 귀에 들린 것!그것이 분명히, “예, 예.” 하는 소리였습니다. 순자 역시 아까 뜻밖에 주정꾼이 손에 쥐어 주는 종이를 받아 두었다가 방 에 들어와서 펴 보니,반가운 오빠의 소식이라 오빠가 자기를 구하러 중국 까지 쫓아와 준 것이 고맙기도 하였거니와,오늘밤에 기호와 함께 구원하러 오겠다는 소리에 이때껏 잠을 안 자고 바깥 동정에 귀를 밝히고 있었던 것 입니다. 어떻게도 반가운지 앞뒤 무서운 것 다 잊어버리고,상호는 와락 그 방문으로 달려들었으나, 큰일이 났습니다. 방문은 꼭 잠겨 있습니다. “방문이 잠겼다, 방문이 잠겼다!” 하고, 상호는 울상이 되어서 소리쳤습니다. 어디선지 사람 오는 발소리가 나는 듯 나는 듯하고, 가슴에서는 불덩이들이 춤을 추는 것 같은데, 원수의 문이 꼭 잠겨 있어서 까딱을 아니 하니 어찌합니까?상호는 하도 급하여 발을 동동 구르면서 어디서 누가 쫓아오지나 않는가 귀를 밝히는데, 바로 그때 안으로부터 방문이 덜컥 열리었습니다. 그리고 그리로 순자가, “오빠!” 하고, 뛰어나왔습니다. 들여다보니 그 방 속에서 털보 주인의 중국 마누라 가 방문을 안으로 잠그고 순자를 지키고 있었는데,밤이 깊으니까 세상을 모르고 깊이 잠이 들어 있었으므로, 순자가 그의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열고 나온 것이었습니다. 상호와 순자는 인사고 무어고 여부가 없었습니다. 상호는 순자의 손을 잡 고, “자, 어서 어서!” 하고, 잡아당기면서 그 방의 저 편 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는 땅 속 길에 구멍이 뚫려 있으므로 상호는, “아무 염려 말고 내 뒤만 따라 오너라.” 하고,자기가 앞에서 휘장을 헤치고 좁다란 구멍으로 머리와 허리를 굽히 고, 기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순자도 오빠를 따라가는 기쁨에 무서운 것도 괴로운 것도 다 모르고,오빠의 뒤를 따라 부지런히 기어갔습니다. 퍽 어두운 캄캄한 구멍 길을 기어가면서, 상호의 가슴은 몹시도 두근 거렸 습니다. ‘지금쯤 일이 발각되어 뒤에서 쫓아오지나 않을까……. 혹시 기호더러 저 쪽 창고 집 문 앞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라고는 하였으나, 그 안에 창고집 속에 그놈의 패들이 모여 있다가 우리를 발견하면 어쩌나…….’ 겁은 자꾸 뒤를 이어 생겨서 가슴에 두방망이질은 그칠 줄을 모르는데 큰 일 났습니다.이 좁다란 땅속 길로 자기 남매가 기어 나가는 저편 안쪽에서 누구지 이리로 향하고 기어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멈칫 나가던 것을 중지하고 몸을 웅크린 상호는,어두운 속에서도 머리가 아찔하고 온몸에 얼음물을 끼얹은 것같이 저리었습니다. 공교롭기도 하지 요, 이 땅 속 길에서 머리를 맞부딪히게 되니, 이 노릇을 어찌 하겠습니까?─《어린이》5권 7호 (1927년 9∙10월 합호).
32. 단장!단장!
그렇지 않아도 뒤쪽에서 놈들이 쫓아올 것이 분명하고, 앞에는 그 창고에 칠칠단 놈들이 모여 있어서 야단이 날 듯하여 가슴이 두근거리는데,삼층 밑 땅 속에 뚫린 좁다란 굴속으로 도망하는 터라, 달리 도망할 길이 없어서 그냥 순자를 데리고 기어 나가다가 뜻밖에 저쪽으로부터 오는 놈의 머리와 머리가 맞닥뜨리어 온몸이 오싹하였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틀렸다!’ 하고, 상호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급하게 된 때에도 제일 마음이 크기는 오직 순자뿐이었습니다.상호는 움찔하면서 몸을 뒤로 웅크리고 뒤로 손을 내밀어 더듬어서 순자의 손을 꼭 쥐었습니다. 그 손은 몸과 함께 부들부들 떨리었습니다.그때 별안간 얼굴 앞에 환하게 불이 켜졌습니다. 저쪽 놈이 불을 켠 것이 었습니다. 이제는 꼭 죽었구나 생각하면서 얼굴을 들어 불빛에 저편을 보았 습니다. “앗!” 정말 큰일 났습니다. 거기 불을 들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 도 아닌 악마 같은 단장의 얼굴이었습니다. “앗!” 상호의 입에서는 저절로 부르짖는 소리가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정신도 잃 어버릴 지경이었습니다. “요놈아!어서 이리 나오너라.” 귀신같이 호령하면서, 한 손으로는 상호의 등덜미를 잡고 오던 쪽으로 도 로 나갔습니다. 뒤에 따라오던 순자는 혼자 돌아서서 도망할 수도 없고,어 리둥절한 마음에도 이제는 죽더라도 오빠하고 같이 죽겠다고 끌려가는 오빠 의 팔을 단단히 붙들고 따라 끌려 나갔습니다. “요놈의 자식아, 어떻게 생겨서 그렇게 앙큼하냐?조선에서 네가 도망을 하였으면 하였지, 계집애까지 빼어 가려고 여기까지 수염을 붙이고 쫓아와 서 이렇게 대담한 짓을 해?” 하고, 칭칭 묶어 놓은 상호를 구둣발로 걷어차고는, 달려들어 코 밑에 만들 어 붙인 수염을 잡아 뜯었습니다. “요 앙큼한 놈의 자식!어디 견디어 봐라!” 하고, 다시 발길로 걷어차서 단번에 쓰러뜨렸습니다. 굵은 줄에 묶인 채로 순자 옆에 쓰러 진 상호 입에서는 시뻘건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구 두에 채여 입술이 터진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순자는 소리쳐 울었습니 다. “저놈 배 위에 7호 돌을 얹어 놔라!” 명령이 떨어지자 부하 두 놈은 큰 궤짝만한 돌덩이를 둘이서 억지로 들어 다가 묶이어 신음하는 상호의 가슴과 배 위에 걸쳐 눌러 놓았습니다. “내일 오정 때까지만 눌러 두어라.그러면 저절로 죽을 것이다.” 순자는 몸을 묶인 채 그냥 몸부림치면서 울었습니다. 잠시 후 단장은 부하 에게 명령하여 순자를 층계 밑 구석방에 데려다가 가두어 놓게 한 후, 곡마 단에서 말을 갈기는 길다린 채찍으로 후려갈기기 시작하였습니다.
33. 그리운 고국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