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동 354번지 외삼촌 댁 안방에서,지옥에서 극락으로 나온 것같이 마음 을 놓고 있는 순자와 상호는,외삼촌댁 아주머니가(서로 말도 못 통하니까 역시 한기호라는 학생이 통역을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장 속에서 내어준 사진을 보고 있었습니다.사진은 상호와 순자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 박힌 상호의 집 가족사진이었습니다.상호는 그래도 아버지의 무릎 위에 앉아서,의젓하 게 박혔는데 순자는 걸상에 앉으신 어머니 무릎 위에서 네 활개를 내뻗치고 입을 벌리고,울면서 박혀 있었습니다. 기억도 없는 부모의 얼굴을 열여섯, 열네 살에 처음 보는 설움!불쌍한 오 누이의 눈에서는 굵다란 눈물이 낙숫물같이 뚝뚝 사진 위에 떨어졌습니다.그 모양을 보는 외삼촌과 아주머니도 늙으신 눈에 눈물이 고여 넘었습니 다. “원수를 갚아야 한다!원수를 갚아야 한다. 너의 어머니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그러나 너희 아버지를 찾아가야 한다.중국으로 가셨는지, 미국으로 가셨는지,도무지 소식을 모르는 외롭게 헤매는 너의 아버지를 찾아야 한 다!너희 아버지도 지금쯤은 차차 늙기를 시작할 텐데……. 너희들 생사도 모르고, 지금 어디서 편히나 계신지. 하루 바삐 너의 아버지를 찾아야 한 다.” 말씀하는 외삼촌 노인도 울음에 떨리는 소리거니와,듣고 있는 두 오뉘의 눈에서는 그대로 눈물이 비 오듯 하였습니다. “오냐.이 원수는 죽어도 갚고야 죽는다.” 하고, 상호가 속으로 맹세하느라고,비 오듯 하는 눈물에 젖은 입술을 단단 히 깨물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아,바로 그때에 대문을 박차는 소리가 나더니 내다 볼 사이도 없 이 마당 앞에 우뚝우뚝 양복 입은 험상궂은 사람이 세 사람이나 들어섰습니 다.─《어린이》4권9호 (1926년 10월호).
15. 중국으로 중국으로
캄캄한 밤, 달도 없는 캄캄한 밤을 급행 기차는 지금 자꾸 북쪽으로 북쪽 으로 달아나고 있습니다.곡마단의 여러 일행과 그 일행에게 다시 잡혀 에워싸여 가는 순자를 태워 가지고 이 밤에 경성역을 떠난 이 급행열차는 지금 중국 봉천(奉天)을 향하 여 속력을 다하며 별로 쉬지도 않고, 달아나는 중입니다. 자정이 지났는지 안 지났는지 기차는 개성을 지나서‘뛰!’소리로 어둠을 헤치면서 달아나는데,찻간마다 가득 탄 손님들은 거의 모두가 앉은 채로 고개를 기울이고 코를 골고 있습니다.자정이 넘어서 그런지 차 속에 달린 전등도 아까보다는 몹시 컴컴하여졌습니다.보기도 싫은 곡마단 사람들에게 에워싸여서,단장 내외의 앞자리에 끼어 앉은 순자는 조 비비는 가슴 속을 누구에게 하소연할 곳이 없어,타는 불길 같이 쏟아져 나오는 한숨을 ‘후유!’ 쉬면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유리창 밖을 내다보고 내다보고 하였습니다.그러나 유리창 밖은 캄캄한 어둔 세상 으로, 차 안 모양만 거울 속 같이 비치어 보일 뿐이었습니다.순자는 두들겨 맞아 아픈 두 팔을 늘이어 긴 한숨과 함께 기지개를 펴면서 두 눈을 감았습니다.‘이대로 끌려가서 어떻게 되려노……?’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였습니다.어저께 낮에 서울 중학동 외삼촌 댁 안방에서 오빠와 함께 어릴 적 사진을 보면서 울던 일까지는 똑똑하게 생각이 나건마는,별안간 경찰서 형사들이 대문을 박차고 우루루 몰려 들어오던 때부터의 일은,암만하여도 나쁜 꿈을 꾸고 그때에 같이 잡혀간 외삼촌과 그 한기호라는 학생은 꿈속 일 같이만 생각되었습니다.그러나 지금 이렇게 자기 몸이 그 무서운 악마들에게 붙들 려 끌려가는 중인 것을 보면,꿈은 아니고 확실히 사실은 사실이구나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하면,어저께 낮에 형사 세 사람이 마루 끝에 들어 설 때에 오빠는 분명히 높다란 들창으로 얼른 뛰어넘어 갔었는데……, 그 후에 잡히지 아니하고 어디로 피신을 잘 하였는지 달아나다가 잡히지나 아 니하였는지,그리고 자기와 외삼촌 노인과 한기호라는 학생과 세 사람이 형 사들에게 끌려 경찰서로 걸어 갈 때의 울렁거리는 가슴,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리었습니다.자기는 여러 가지 조사를 받고 있다가 잃어버린 물건 이나 찾으러 오는 듯이 내 몸을 찾으러 온 곡마단장의 마누라와 그 부하의 손으로 넘겨 와서 이렇게 중국으로 끌려가지마는 어찌나 되었는지, 모든 것 이 궁금하였습니다. 곡마단 단장과 부하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으면, 남의 식구 꾀어냈다는 유 인죄로 감옥에 보낸다 하던데, 그 늙으신 외삼촌이 정말 감옥에 갇히셨으면 어떻게 하나, 머리가 센 늙은 몸은 우리 오뉘를 구해 내려고 그렇듯 애를 쓰시다가 결국 감옥에까지 가시게 되는가 생각할 때에 순자는 몸이 떨리고 눈물이 흘렀습니다. 오빠의 일 외삼촌의 일을 궁금해 하면서 붙들려 가는 가엾은 몸이 슬픈 생 각 무서운 생각에 가슴을 태우는 동안에 벌써 밤은 새어서 어느 틈에 평양 을 지난 지도 오래고, 지금은 조선의 끝 신의주 정거장을 지나서 큰 소리를 지르며 기차는 압록강 철교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아아, 인제는 중국이로구나!” 하고 중얼거리면서, 차창으로 내다보는 순자는 그만 소리를 내어 통곡도 하 고 싶고,양양히 흘러 내려가는 푸른 물결을 내려다볼 때는 그냥 몸을 솟구 쳐 풍덩 빠지고도 싶었습니다.
16. 외로운 활동
중학동 354번지로 형사의 한 떼가 상호와 순자를 잡으려고 달려들 때에,“이래도 잡히고 저래도 잡히기는 일반이다.” 생각하고,높은 들창에 손을 대자마자 곡마단에서 하던 버릇으로 소리도 안 내고 휙 뛰어 넘은 상호는 그 길로 그냥 줄달음질하여 서대문 밖으로 나아 갔습니다. 급한 대로 들키지 않으려고 서대문 밖으로 오기까지는 하였으나, 그러나 생후에 처음 와 본 길이라 북으로 가야할지 남으로 가야할지 단 한 걸음도 내디딜 길이 망연하였습니다.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니요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요 아무 죄 없는 몸이 곡 마단에서 빠져 나왔다고 이렇게까지 남의 눈을 속여 쫓겨 다니게 되는가 생 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신세가 슬프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까닭도 모르는 형사들이 사면 방에서 내 몸을 찾고 있을 것이니 눈물만 흘리고 있 을 수도 없었습니다. 서대문 밖 감옥 옆 금화산 중턱 잔디 위에 앉아서 상 호는 온종일 궁리하다 못하여 밑에 있는 일본 사람의 하숙집에 들어가 주인 을 청하고 며칠 동안을 파묻혀 숨어 있기로 하였습니다. 그 이튿날이었습니다. 순자와 외삼촌과 그 한기호가 어찌 되었을까, 반드시 잡혀갔을 줄 짐작은 하면서도, 그래도 궁금하고 갑갑해서 못 견뎠습니다. 새벽에라도 곧 중학동 집에 들어가 보려고 몇 번이나 모자를 쓰고 나섰으나, 자기를 마저 잡으려 고 밤중에 자로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형사들이 지키고 있을 것이 분명하여 서, 나섰다가는 도로 들어서고 도로 들어서고 하였건마는, 그래도 갑갑증이 나서 소식을 알려고 저녁 전깃불이 켜지기를 기다려 전처럼 얼굴에 수염을 붙이고 대담스럽게 중학동 거리를 걸어 들어섰습니다. 걸으면서도 이렇게 걸어가다가 들켜서 잡히면 어쩌나 생각을 하니, 외삼촌 댁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가슴은 크게 뛰놀고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모두 형사 같아서 몸이 오싹하였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아무 탈 없이 외삼촌댁에까지 당도하였습니다. 웬일인지 일 찍부터 닫혀 있는 대문을 밀어 열고 들어서려 할 때에 갑자기 상호의 가슴 은 성큼하였습니다. 혹시 이 대문 안에 형사들이 기다리고 있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난 까 닭이었습니다. 상호는 내밀었던 손을 움츠리고, 열까?말까?멈칫거렸습니다. 그런데, 그 때 천만뜻밖에 뒤에서 와락 달려들어 상호의 바른편 팔을 꽉 붙잡는 사람이 있었습니다.─《어린이》4권호 10호 (1926년 11월호).
17. 대문 앞에서
중학동 외삼촌 댁 대문 앞에서 동정을 엿보느라고 망설이는 상호에게 뜻밖 에 와락 달겨든 사람!분명히 경찰서의 형사에게 잡힌 것이라고, 상호는 가 슴이 덜컥 하였습니다.그러나 그는 형사가 아니고 외삼촌 노인과 한데 잡 혀갔을 통역 학생 한기호였습니다. “오!어떻게 안 잡혀 갔소?” 상호는 반갑고 놀라워서, 크게 소리쳐 물었습니다. “갑시다, 갑시다. 여기 있으면 위험하니,어디로 얼른 갑시다.” 그는 상호의 손을 잡아끌듯 하면서 나지막한 소리로,“이 근처가 온통 형사 천지요, 빨리 갑시다. 지금 당신을 잡으려고 발끈 뒤집혔으니,조심해 가야 됩니다.” 하면서, 자기가 먼저 앞서서 급히 걸었습니다.학생의 말은 한 마디 한 마 디가 무거운 쇠방망이로 상호의 가슴을 때리는 것 같았습니다.자기의 몸은 지금 거미줄에 얽힌 것 같아 까딱하면 독수리의 발톱에 새 새끼가 채이듯이 붙잡힐 것을 생각하니,한 발 한 걸음을 내어 딛기가 무시무시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점점 저 길로 지나가는 사람이 모두 자기를 노려보는 것 같 고,심지어 여편네 아이들까지 형사의 돈을 먹고 자기의 뒤를 일부러 따라 오는 것 같았습니다. 두근두근!상호는 아무 말도 내지 못하고, 학생의 뒤를 따라 잠자코 걸어 서, 광화문 앞을 지나,비각 앞 네거리까지 무사히 나왔습니다. “어디로 가면 안전할까?” 네거리까지 나와서 학생이 상호를 돌아다보고, 비로소 입을 열어 물 었습니다. “서대문 밖으로 가지…….” 상호는 서대문밖에 몰랐습니다. “아니, 그리 가면 위험하니 진고개로 갑시다.그리 가야 안전하겠소.”두 사람은 걸어서 진고개로 올라가며,소근소근 궁금하던 일을 이야기하였습니 다.상호가 들창으로 뛰어 도망한 후 순자와 학생과 외삼촌 노인은 다 같이 경 찰서로 붙잡혀 갔던 일,그 후로 순자는 곡마단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고 노 인은 검사국으로 넘어가고 학생은 증거가 없어서 놓여나온 일을 상호는 속 이 시원하게 알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모를 일은 순자가 곡마단의 손으 로 넘어가서 어찌 되었는지 곡마단 일행은 중국으로 갔는지 안 갔는지 그것 이었습니다. “곡마단 패들이 어찌 되었는지 그것을 알아볼 도리가 없을까?” 상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알아보기도 급하지만 섣불리 하다가는 도리어 잡히게 될 것이니,우리 저 산으로 올라가서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학생의 의견대로 두 사람은 좌우 옆을 흘낏흘낏 눈치 채어 가면서 좁다란 골목만 골라서 남산을 향하고 올라갔습니다.벌써 순자는 중국 땅에 가 있는 줄은 알지도 못하고…….
18. 이상한 편지
곡마단이 묵던 여관은 곡마단 일행이 떠난 후로 몹시 조용하여졌습니다.문 옆방에 앉아 있는 주인 내외는 심부름하는 심부름꾼들을 데리고,“그 수선스런 패들이 지금쯤은 중국에 가서 내렸겠다.” “아이고,그 밤낮 두들겨 맞기만 하던 처녀가 불쌍해 못 보겠어요.어디 가서든지 그렇게 두들겨 맞기만 하겠지요.” “그럼, 오죽하면 도망을 하려니 그랬겠니?불쌍한 일도 많지…….” 이런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습니다. 손님들은 각각 볼일 보러 나간 사이라,여관치고는 제법 한가한 때였습니다. 그때 어떤 말쑥한 청년 이 한 분 들어서더니,황급히 모자를 벗고, “여기 곡마단 일행…….” 하고, 말을 시작하다가 멈칫거렸습니다. 주인 여자가, “네.곡마단 단장은 그저께 밤차로 중국으로 간다고 떠났습니다.” 하자, “아니오. 떠난 줄은 압니다.내가 그 곡마단의 사무원이니까요. 그런데,단장이 이 여관에 잊어버리고 간 것이 평양까지 갔을 때에 생각이 나서, 그 것을 찾아오라 해서,내가 도로 온 것입니다.” 주인 여자는 그제야 까닭을 알고, “예, 그러십니까?그럼 올라오셔셔 찾아보십시오마는 방을 그날 곧 소제 를 하여도 아무 것도 없었는걸요.” “예,무슨 문서인데 남의 눈에 안 띄게 다락 구석에 깊이 두었었다니까, 찾아보면 있겠지요.” “그럼,올라오셔서 찾아보세요.” 싹싹하고 친절하게 안내하였습니다.젊은 손님은 따라 들어와서 단장 내외 가 있던 방의 다락 속을 뒤졌습니다.그러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웬일일까?분명히 다락에 넣었었다는데……. 없어졌으면 큰일 날 것인 데……. 응 큰일났군…….” “글쎄요. 없어졌으면 미안합니다.” “혹시 딴 데다가 두고 잊어버렸는지도 모르니,미안하지만 다다미 밑을 좀 보겠습니다.” 하고 그 젊은 소님은 방바닥에 깔린 다다미를 일일이 들어내고 보았습니다. “있군!예 있습니다. 이것입니다.” 하고, 젊은 손님은 방 한 구석 다다미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납작한 봉투를 집어 들고 기뻐하더니,부리나케 나가서 구두를 신으며, “실례입니다마는 기차 시간이 바빠서 치워 드리지 못하고 급히 갑니다.자, 이것을 그 하인에게 주십시오.” 하고, 돈 1원을 내놓고 급급히 나갔습니다.그 젊은 손님이 봉투를 들고 여관 문을 나가 여관 판장 옆을 돌아서자,거 기서 기다리고 있든 상호가, “어떻게 되었소?” 하고 물으면서 뛰어나왔습니다. “됐어. 됐어!” 하는 그 젊은 손님은, 통역 학생 한기호였습니다.두 사람은 걸음을 급히 하여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처음에 가서 시치미 딱 떼고 곡마단이……. 하고 우물쭈물하니까 주인 마누라가 먼저 곡마단은 그저께 저녁에 중국으로 갔다고 그럽디다.그래서 우선 중국으로 간 것은 분명히 알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계획 한대로 나는 곡마단 사람인데,잊어버린 것이 있어서 평양까지 갔다가 도로 왔다고,그 리고 뛰어 들어가서 다다미를 일일이 들고 조사하니까 이 봉투가 있기에 아 주 잊어버린 것이나 찾은 것처럼 이것이라고 하고 가지고 나왔지…….” 하 고, 한기호는 그 봉투를 꺼내 주었습니다.상호는 자기가 계획한 대로 들어 맞아 성공한 것을 기뻐하면서 바삐 봉투 편지를 보았습니다.편지는 중국 봉천에 있는 ‘전중여관’ 이라는 일본 여관 주인이 서울 있 는 곡마단 단장에게 보낸 편지였는데,속을 빼어 보니, 참말 수상스런 일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것은 두 꿰짝을 보내었으니 잘 받아서 처치하고, 어느 때 중국으로 오는 지 이번에…… 꼭 15,16짜리로 적어도 셋은 가지고 와야 한다.
고,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것 두 꿰짝은 무엇을 가리켜 한 말이고,15.16짜리 셋은 무슨 소리인지 도 도무지 얼른 짐작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그러나 어쨌든지 이 편지는 잘 가지고 있기로 하고, 오늘밤이라도 곧 중 국으로 갑시다.아까 이야기한 대로, 그럼 내가 가서 내 저금을 찾고 또 다 른 것도 준비해 가지고 오리다.당신은 서대문 밖 그 여관에 가서 기다리고 계시오.” 하고, 한기호가 먼저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날 밤, 중국 봉천을 향하고 경성역을 떠난 길다란 급행열차가 신촌역을 지날 때에,남의 눈을 피하는 청년 두 사람이 어둡고 조그만 정거장에서 슬 쩍 올라탔습니다.─《어린이》4권 11호 (1926년 12월호).
19. 봉천의 깊은 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