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봉천!중국 사람들의 그 시끄럽고 요란하던 복잡한 거리도 밤이 들 어서 지금은 깊은 산 속같이 컴컴하고 공동묘지같이 고요하였습니다.그러지 않아도, 깊숙하고 충충스런 중국 사람들의 길가 상점집이 지금은 무서운 마귀의 집같이 컴컴한 땅 위에 무슨 엉큼한 물건을 품고 엎드린 것 같이 흉악해 보였습니다. 그 지옥같이 컴컴한 길로 꾸물꾸물 움직여 걷고 있는 이상한 검은 그림자 두 개!수군수군 이리 흘깃 저리 흘깃 연하여 사 면을 휘휘 들러보면서 느릿느릿 나아가는 검은 그림자 두 개……. 그것은 상호와 한기호였습니다. 벌써 봉천에 온 지도 사흘째나 되건마는 원래 처음 와 보는 곳이라,만나 는 사람마다 중국 사람뿐인데 그 큰 목소리로 쌈 싸우듯 왁자지껄 하게 던 지는 소리가 한마디 알아듣기는커녕 귀가 시끄러워 정신이 어리둥절할 지경 이므로 마음대로 활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는 길로 그 비밀 편지에 적혀 있던 ‘전중여관’ 이란 곳에 찾아가서, 시치미 뚝 떼고, 방 하나를 치우고 있으면서 아무리 눈치를 보았으나, 곡마 단 단장이 이곳에 오는 법도 없고 이 집주인이 출입할 때마다 뒤를 따라 보아도 수상한 것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대체 이놈들이 봉천으로 아니 오고, 아마 중도에서 어디로 딴 데로 가버 리지나 않을까?’ 생각할 때에 상호는 눈이 캄캄하였습니다.공연히 허방을 짚고 이렇게 먼 곳에까지 왔으니 곡마단 일행이 이곳에 와 있지 않고 딴 데로 갔으면,이 넓은 중국 땅에서 어디로 간 줄 알고 순자를 찾으러 간단 말인가……. 만사 는 다 어그러졌고 불쌍한 순자와는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었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상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 하였습니다. 옆에 있는 기호 역시, ‘일이 다 틀어졌구나!’ 하고 속으로는 낙심하였으나, 상호가 자꾸 우는 것을 보고 마음이 딱하여, “낙심하지 맙시다.여기까지 와서 낙심하면 될 수가 있겠소?여기서 며칠 기다려 보면, 그래도 무슨 눈치가 있겠지요.” 하고 위로를 하였습니다.그런데 이날 저녁 때 일이었습니다.상호와 기호가 여관 이층에서 저녁밥 을 먹고 마루 난간에 나와서 섰노라니까,아래층 주인의 방에 어저께도 왔 었던 절름발이 늙은 신사가 또 찾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머리와 수염이 허옇게 센 점잖은 노신사인데,한편 다리가 고무다리인지 굵다란 단장을 짚 고 절름절름하면서 지팡이로 지탱하여,걸음을 걷는 모양이었습니다. 상호는 늙은이거나 누구거나 이 집주인과 상종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주의 하여 살펴보아야 한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변소에 가는 체하고 일부러 내려 가서 주인 방 옆을 지나면서 이야기하는 말소리를 주의해 들으려 하였습니 다. 그러나 창 밖에 가깝게 가자 이때까지 젊은 사람같이 기운 찬 소리로 이야 기하던 것이 뚝 그치고, 밖에 발자취 소리가 멀리 지나가 버리기를 기다리 는 모양이었습니다. ‘옳지, 무언지 비밀한 의논인가 보구나.’ 생각하고, 상호는 하는 수 없이 그냥 지나 변소에 다녀서 다시 그 방 옆을 가깝게 스쳐 지났습니다. 말소리는 여전히 아까와 같이 또 뚝 그쳤습니다. ‘옳지, 분명히 비밀한 이야기다!’ 하고, 상호는 이층으로 올라와서 기호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어떻게 하면,그 늙은 절름발이 신사가 누구인 줄을 알아낼 수가 있을 까?’ 하고, 궁리궁리하였습니다. 심부름하는 계집 하인을 불러 물어 보니까,“가끔 놀러 오시는 바둑 잘 두는 노인이여요.” 할 뿐이었습니다.바둑 두는 늙은이면 이야기를 그렇게 비밀히 할 리 없을 터인데 하고,상호는 도리어 더 이상히 생각하였습니다. 안타깝게 머리를 썩이고 섰던 상호는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아까 그 계집 하인을 불러서 돈 50전을 먼저 주고,“이따가 그 늙은이가 주인의 방에서 나오거든 그때 얼른 차를 뜨겁게 끓 여서 찻잔에 담아,그 늙은이를 갖다가 대접해 주게.” 하였습니다.하인은 별로 의심하지도 않고 돈 50전만 감사하면서 그리 하마고 대답하였 습니다.그 후 두 시간이나 지나서 밤이 몹시 깊은 때에 절름발이 늙은 신 사는 주인의 방에서 지팡이를 짚고 거추장스럽게 절름거리면서 나왔습니다.계집 하인이 분주히 펄펄 끓는 차를 담아 들고 쫓아가서 구두를 신으려고 허리를 억지로 구부린 그에게 대접하였습니다.그때 분주히 상호가 뛰어 내려가서 급한 일이나 있는 듯 후닥닥 뛰어 나가 신발을 신는 체하다가 계집 하인에게로 쓰러지는 것처럼 하면서 차를 들고 서 있는 팔을 쳤습니다. “에그머니!” 하면서, 계집 하인이 들었던 찻잔을 떨어뜨리자,그 뜨거운 차가 절름발이 늙은 신사의 양발 신은 발에 쏟아졌습니다. “아, 앗, 뜨거!” 하고, 일본말로 소리치면서, 늙은 신사는 벌떡 일어서면서, 한 발로 딛고 한 발을 들어 흔들면서,쩔쩔 매었습니다. 그런데 차에 덴 발은 성하던 발 이고, 버티고 섰던 발은 절름발이었습니다.“잘못했습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하고, 상호는 굽실굽실 사죄하였습니다. 그리고는,곧 도로 이층으로 올라 와서, “여보, 기호 씨. 들어맞았소.그 놈이 분명히 곡마단 단장 녀석이오.” 천만 뜻밖에 그 늙은이가 곡마단 단장이라는 말에,한기호는 어떻게 반가 운지, 전기에 찔린 사람 같이 뛰어 달려들었습니다.“내가 일부러 그 놈의 발에 더운 차를 엎지른 것은 그놈이 정말 다리 병 신인가 가짜 병신인가,그것을 알려고 그랬소. 그래 엎질러 놓고 그 놈의 발과 얼굴을 주목해 보았더니,절름거리던 발을 힘 있게 버티고 섰던 것을 보니까, 거짓말 가짜 절름발이입니다. 그리고 ‘아, 뜨거!’ 하는 소리가 늙은이 소리가 아니고 아주 기운찬 젊은 소리입디다.그때 얼굴을 보니까 모두 곡마단 단장인 데 남의 눈을 속이고 넌지시 이 집주인과 만나느라고 그렇게 능청스럽게 절름발이 행세를 하는 모양이오.자, 어서 일어나시오. 그 놈의 뒤를 쫓아갑시다.” 두 사람은 몸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번개 같이 뛰어 여관 문을 나서서 여 전히 컴컴한 길로 절름절름 걸어가는 흉악한 곡마단 단장 놈의 뒤를 따라섰 습니다.그래 지금 이 컴컴한 마귀의 세상 같은 어두운 거리로 수군수군하 면서 움직여 걷는 두 그림자의 저 앞에는 또 하나 검은 그림자가 절름절름 걷고 있었습니다. “저 놈이 우리가 이렇게 조선에서 여기까지 쫓아와서 지금 저의 뒤를 밟 아 가는 줄 알까 모를까?” “글쎄, 알기만 하면 화닥닥 돌아서서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할는지 모르 지…….” “이 바닥에 저놈의 부하가 어디 어느 구석에 숨어 있는지 모르니까 위험 하오.” 두 사람은 수군수군 가슴을 조이면서 따라갑니다. 한참이나 가다가 기호가 별안간, “에쿠.” 하고,상호의 팔을 꽉 붙잡고, 뒤로 주춤하였습니다. 상호도 깜짝 놀라 주 춤하고 서서 보니 까,큰일 났습니다. 앞에 가던 단장 놈이 별안간 우뚝 서 더니, 휙 돌아서서 두 사람에게로 걸어옵니다.두 사람은 머리끝까지 오싹하였습니다. ─《어린이》5권 2호 (1927년 2월호). 20. 계교와 계교
중국 땅 봉천 시가의 어두운 밤!지옥 길 같이 캄캄하고 음침한 길로 숨을 죽이고 뒤를 밟아가던 상호와 기호는 앞에 가던 거짓 절름발이가 별안간 휘 쩍 돌아서는 것을 보고 가슴이 성큼하여 말뚝같이 우뚝 섰습니다. ‘마귀보다도 더 흉악스러운 곡마단 단장 놈이, 무슨 맘을 먹고 돌아섰을 까.’ 생각할 사이도 없이 그는 절름절름 우뚝 서 있는 두 사람 편으로 걸어왔습 니다. ‘큰일 났다!’싶어서 두 사람의 머리는 으쓱였습니다. 정신이 멍하였습니 다. 저놈 한 놈뿐만 같으면,그리 염려할 것 없이 힘대로 싸워 보자마는,만일 저놈이 달려들면서 군호를 하여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부하들이 뛰어 나오면 어찌할까……. 그런 것 저런 것을 믿는 것 없이는 저렇게 혼자서 가깝게 달 려들 리가 없는데……. 전기같이 이 생각 저 생각이 두 사람의 머리에 빛났다 꺼졌다 할 사이에,벌써 그 놈은 두 사람의 코앞까지 와서 우뚝 섰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쑥 내밀더니,“혹시 성냥을 가졌으면 하나 주십시오.” 하고, 능청스럽게 늙은이 소리로 묻습니다.어둠 속에서 자세히 보니, 딴은 그의 입에는 꼬부랑 골통대가 물려 있습니다.달려들지 않는 것만 다행히 여기고 기호가 성냥갑을 꺼내 주려고 양복 주 머니를 뒤적뒤적 하는데,상호가 한 손으로 기호의 팔을 왁 잡으면서 그 놈 을 향하여, “예,미안합니다마는 우리는 담배를 못 피우므로 성냥을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하였습니다. “흥,이거 밤길을 걷는 데는 담배를 피여 물어야 하는데, 성냥이 없어서 오늘도 못 피우겠군!” 하고, 혼잣소리를 하고, “실례하였소.” 하고는, 다시 돌아서서 절름절름 걸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두 사람은 그제 서야 마음을 휘 놓았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또 그 뒤를 밟아 가기 시작하였 습니다.“여보, 왜 아까 내가 성냥갑을 내주려는데 당신이 없다 하고 막아 버렸 소?” 하고, 기호가 상호에게 궁금히 물었습니다.“그놈이 정말 성냥이 없어서 우리더러 달라 할 리가 있나요. 우리에게 성 냥을 달래서,담뱃불 붙이는 체하고 성냥불로 우리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 고 그랬지요.” “하하하,나는 깜빡 모르고 있었소. 꺼내 주었더라면 큰일 날 뻔하였구 려,” “큰일 나구말구.그렇게 얼굴을 코앞에 들이대고, 불을 켜 들고 들여다보 면,우리 얼굴에 수염 만들어 붙인 것과 변장한 것이 모두 들킬 것 아니겠 소,” “글쎄 말이요. 나 때문에 혼날 뻔하였소!” 하고, 수군거리면서 뒤따르는 상호와 기호는 앞에 절름거리면서 가는 단장 놈이 어떻게 능청스럽게 보이고 흉측해 보이는지,총이라도 있으면 그냥 곧 쏘아 버리고 싶게 미웠습니다.
21. 이상한 암호
캄캄한 거리로 골목을 몇 번인지 꺾어서,절름발이는 어느 창고같이 생긴 이층집 문 앞에 우뚝 섰습니다.붉은 벽돌로 모양 없이 튼튼하게만 지은 집.어두운 밤이라서 그 무거운 문이 마치 감옥문같이 보였습니다.뒤에 따라가던 두 사람은 냉큼 길가 어두운 구석으로 기어들어 숨어서 그 의 동작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절름발이가 거기 서서 전후 좌우를 휘휘 둘러보더니,아무도 보는 이가 없 는 줄 알고 안심한 듯이 문 앞에 바싹 들어서자,대문은 안으로부터 열리고 그 안에서 한 사람이 내다보고 무어라 쑤군쑤군하는 것 같더니,절름발이도 안으로 쑥 들어가고 무거운 문은 다시 굳게 닫혔습니다.“저놈의 집이 까닭이 있는 집인 모양이군!” 하면서, 두 사람은 어두운 구석에서 뛰어나와 그 이상한 벽돌집을 두루 살 피기 시작하였습니다.대문 앞에까지 바싹 가서 성냥불이라도 켜 들고 문패며 번지수를 조사하고 싶었으나,그놈의 대문 한 겹 안쪽에 어떤 놈이 문지기 노릇을 하고 앉은 모양이니,신발 소리를 내거나 성냥 긋는 소리를 내기만 하면 당장 뛰어나 오겠으므로 그러지는 못하고 그 집 옆에 골목이 있는 것과 뒤로는 야트막한 중국집과 맞붙어 있는 것과 골목으로는 높은 담이 싸여 있는 것만을 조사하 였습니다. “이크, 또 와요. 또 한 놈이 오니 들어서요.” 기호가 속살거리는 소리에 상호도 그 옆 골목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서서 보니, 과연 양복 위에 외투 입은 한 놈이 그 집의 대문 앞에 우뚝 섰습니 다. 여기는 바로 그 집 벽 밑이라 아까보다는 훨씬 가까워서 그 놈의 손짓 하나 말소리 하나도 빼놓지 않고 듣고 보구 할 수가 있었습니다. 놈은 대문의 손잡이 위를 손등으로‘똑똑똑똑똑’천천히 꼭 일곱 번을 때 렸습니다. 그러니까 아까처럼 안으로부터 문이 열리고 한 놈이 고개를 쑥 내미는데, 그때 안으로부터 희미 하나마 등불 빛도 비쳐 나왔습니다. 외투 입고 온 놈은 이번에는 왼편 손을 주먹 쥐어 쑥 내밀더니, 오른편 손의 둘 째손가락과 가운데손가락과 문을 내밀어 왼편 주먹에 두 번 들었다 놓았다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내다보던 놈은 대문을 더 활짝 열고, 그놈을 들여보 내고, 다시 무겁게 닫혀 버렸습니다. “자세히 보았소?대문을 일곱 번 두들기고 왼손 주먹에 바른손 두 손가락 을 두 번 내민 것이 분명하지요?” “분명히 그랬소. 아마 그것이 그놈들의 암호인 모양이오.” “그러면, 그게 무슨 의미일까?” “어쨌든 암호까지 있는 것을 보면,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은 분명한 모양이 오.” “그야 물론이지요.” 무서운 집 어두운 담 밑에서 가슴을 울렁거리면서 소곤소곤 이야기 할 때,또 그 집문 앞에 와서 손잡이의 위를 똑똑똑 때리는 사람이 있어서,두 사 람은 숨을 죽이고 눈과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번에 온 것은 일본 옷 입은 여자 한 사람,중국 옷 입은 남자 한 사람이 었습니다.문이 열리고 안에서 문지기의 얼굴이 쑥 나오더니 여자를 보고 머리를 굽혀 인사하는 모양이었습니다.그러나 여자와 남자와는 역시 각각 왼손을 주먹 쥐어 내밀고,오른손 두 손가락을 그 위에 두번 내밀어 보이고 쑥 들어갔습니다.그것을 보면 아는 사람이거나 모르는 사람이거나,으레 그렇게 하고야 들 어가는 엄중한 규칙인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곡마단 단장과 그 부하들의 비 밀!그것은 대체 무슨 비밀이며, 왼손 주먹에 바른손 두 손가락은 무슨 의 미일까?사람은 가슴을 울렁거리면서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서서 궁리궁리하였습니 다.어쨌든지 그놈들이 단순한 곡마단 패가 아니고 이곳에 그들의 나쁜 패가 더 많이 있어서,모두 연락해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결단코 허투루 볼 패 는 아니고 무슨 무서운 비밀한 계획이 있는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22. 무서운 모험
머나먼 길, 국경을 넘어서 남의 나라 땅에까지 쫓아와서 어두운 밤!무섭 게 캄캄한 밤에 마귀 떼의 집도 이제는 찾았고 또 그 집 속에 지금 여러 연 놈이 모여드는 것까지 알아내었으나,그러면서도 손끝 하나 대여보지 못하 고 있는 생각을 하면 두 사람의 마음은 안타깝기 한량이 없었습니다.생각대로 하면 지금 당장에 담이라도 뛰어넘어 이놈의 집 속에 들어만 가 면 그 속에 불쌍한 순자가 갇혀 있든지 묶이어 있든지 찾아낼 수 가 있을 것이요, 또 그놈들의 비밀을 알아내고 어머니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 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아 그러나 이 집, 이 담 너머에는 그놈의 떼가 몇 십 명이 있는지 몇 백 명이 있는지 아는 도리가 없으니, 약하디 약한 두 몸이 섣불리 들어갈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떡할까요?” “글쎄요.” “이 집 속에 순자가 갇혀 있을 것 같은데요.그놈들이 모여서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지요.” “글쎄요, 우리가 이러고만 있어서는 안 되겠는데…….” 그들의 가슴은 타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떻게 할까?상호의 두 눈에는 순자 의 우는 얼굴과 사진에서 본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이 번갈아가며 나타나 보 였습니다.그러다가는 불쌍한 순자가 그 곡마단 단장의 그 지긋지긋한 채찍에 두들겨 맞아서 온몸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참혹한 정상이 눈에 자꾸 어른거렸습니 다. 그의 가슴은 떨리고, 그의 손은 저절로 주먹 쥐어졌습니다. ‘죽더라도 뛰어 들어가 보자.’ 고 엉뚱한 일을 뒷일 헤아릴 새도 없이 결심하였습니다. “내가 들어가 볼 터이니 당신은 여기서 기다려 보아 주시오.” 하고, 상호는 기호에게 떨리는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들어가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어쩌자고 그 속에를 들어간단 말씀이 오?” 기호는 걱정하면서 상호의 손을 쥐고 굳이 말리었습니다.“그 속에까지 들어갈 것이 아니라 문을 열거든 그 문지기 놈을 끌어내서 두들기고 물어 봅시다. 그것이 낫지 않아요?” 기호가 생각한 이 꾀는 잘 생각한 꾀였습니다.그러나 문을 열기만 하면 그놈이 혼자 지키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요,또 만일 혼자 지키고 있다 하더라도,그냥 잠자코 끌려 나올 리가 없는 것이니까 소리를 지르던지 또 무슨 군호로 저희 떼에게 통지를 하여 여러 놈이 나올 것이 분명한 것이었 습니다. 그러나 다행한 일인지 불행한 일인지 지금의 두 사람은 그런 것을 염염히 생각할 만큼 마음이 조용하지를 못하였습니다. 기호는 담 밑에 숨어서 망을 보고 있기로 하고 상호 혼자 그 마귀 같은 집 대문 앞에 올라섰습니다. 가슴이 두근두근 몹시도 울렁거리는 것을 참으면 서 대담스럽게 ‘똑똑똑똑’ 일곱 번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안으로부터 문을 열려고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었습니다. 상호의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쳤습니다. —《어린이》5권 3호 (1927년 3월호).
23. 문에서부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