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 준 독삼탕(獨蔘湯)을 마시고 문간에서 발발 떠는 그와 작별한 나는 인적 없는 쓸쓸한 거리로 나왔다. 식전꼭두는 치웠다. 몹시 치웠다. 치움 그것 이었다.쓰라리는 발은 자욱자욱이 얼어붙는 듯하였다. 귀가 떨어지는것 같다. 발갛게 단 쇠가 얼굴에 척척 달라붙는 것 같다.앞으로 휙하고 닥치는 매운 바람은 나의 몸을 썩은 나뭇가지나 무엇처럼 지끈지끈 부수며 세포 속속들이 불어 들어가는 듯싶었다.'다시는 이런 짓을 아니하리라.’ 나는 다시곰 생각하였다. 어머님은 고종 사촌 혼인 구경 겸 소풍 겸 동래에 나려가시고 집에 계시지 않았다. 할머님만 속이면 그뿐이다.어젯밤은 여러 친구에게 끌리어 청량사( 淸凉寺)에 나갔다가 술이 취해서 못 왔다는 것을 돌차간(咄嗟間)에 생각 해내었다.아랫목에 쪼그리고 앉아 계시던 할머님은 샐쭉한 입을 두 가장자리를 동 글게 호로형(壺蘆形)으로 여시며,"못 된 데만 아니 갔으면, 못된 데만 아니 갔으면."하고 소근거리셨다. "늦게 졸고 보니 전차가 끈쳤겠지요. 어데 올 수 있습니까?하는 수 없 이 자고 왔습니다." 하고 거짓말을 꾸며댄 후 나는 우리 방으로 건너왔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머리를 빗고 있던 안해도 빙그레 웃으며,"인제 속이 시원하지요?" 하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빛은 피로 물들인 것 같았다. 나는 고만 나무 둥치같이 곤한 잠에 떨어지고 말았다.오종(午種) 가까이 되어 간신히 안해에게 깨이어 일어난 나는 냉수로 세수(洗嗽)를 하면서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사(社)에 들어가기는 갔으되 머리가 뿌연 안개에 깔린 듯이 몽롱하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저 자고만 싶었다. 저녁 숟가락을 놓자마자 또 다시 죽은 듯이 잠이 들고 말았다.그 이튿날 잠을 깨자 제일 먼저 해결해야 될 것은 그것을 어째 치를까 하는 문제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돈이 필요하다.그렇다고 주머니에서 잘 각거리는 몇 푼 동전으로는 될 수 없는 일이다.많지 않은 월급이라도 또박또박 타기나 하였으면 그믐을 하로밖에 아니 지낸 때이니 그것 수세할 것이야 남았으련만 곤란이 도극(到極)한 ○○사(社)는 사원 월급 지불은커녕 신 문 박을 종이도 못 사서 쩔쩔매는 판이다.집으로 말하여도 아들의 방탕에 이바지 할 재정은 없었다. 그러나 몇 십 원 장만할 거리는 나에게 있었나니 그것은 유산으로 물려받은 미국제 18금 시계였다.오랜 것이라 모양이 이쁘지 않은 대신 투박하고 튼튼하며 달리아 꽃도 앞 뒤 뚜껑에 아로새겼고 기계에 보석조차 박힌 값진 물건이었다."이것만 잡히면, 4,50원이야 얻겠지." 춘심이 집에 가던 날이나 이제나 힘 미덥게 생각하였다. 난생 처음으로 전당포를 찾아다녔다. 조심 많은 흰옷 입은 취리(取利)꾼들은 이 속모를 물건을 퇴각하기에 서슴지 않았다.어느 일본 질옥(質屋)에서 35 원에 잡히는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 문제는 전달할 수단이었다. 봉투에 넣어 우편으로 보내고 아주 끈을 떼어버리려 하였다.양심의 반성도 맹렬하였거니와 한 번 겪어 보니 그 탐탐스럽지도 않았음이라. 그러나 야릇한 염려가 나로 하여금 주저 하게하였다.봉투에 넣어 보내는 것은 많은 금액에만 쓰는 격식인 것 같았다. 더구나 그리함은 그와 나의 사이를 이도(利刀)로 싹 비어 버리는 것 같다. 그는 실망하리라.실망한 그만치 나를 욕하리라. 영구히 그를 대할 낯이 없으리라 하매 어째 차마 못할 일인 듯싶었다.끊는 데도 톱으로 슬근슬근 나무 썰 듯 누그러운 방법이 없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였다.'그것은 꾸며대는 소리일다!정말 끊으려면 저야 실망을 하든 욕을 하든 대 할 낯이 없든, 꺼릴 것이 무엇이냐?!그런 염려를 하는 것은 끊으려면 서아니 끊으려는 것이다!’ 나는 마음 어데인지 이런 가책을 느꼈다.'끊고 아니 끊는 문제보담도 네가 침닉(沈溺)이 될까 아니 될까가 더 중대한 문제일 것이다. 빠지지만 않으면 그뿐이 아니냐?슬근슬근 정을 붙여 둔 들 너에게 해로울 것이야 무엇 있나?울적하고 무료할 제 일시의 위안 거리는 꽤 될 것이다.’ 다른 소리가 또 이렇게 변명하는 듯하였다. 마츰내 이런 결론을 얻었다.'이왕이면 한번 보기나 하자,그 역시 사람이니 너무 매몰스럽게 함은 내 도리가 아니다.’ 맨숭맨숭한 정신으로야 직접으로 돈을 건넬 수 없었다.어느 요리점에 다리고 가서 자미있게 놀다가 그도 취하고 나도 취한 후 그의 품속에 슬그머니 넣어주리라 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안해는 극렬히 반대하였다.안해의 태도는 하롯밤 사이에 돌변 하였다. 그의 주장을 의지하면 그런 짓은 성공도 하고 재산도 넉넉한 뒤에 할 일이었다. 하롯밤이면 무던하지 이틀 밤부터는 과한 짓이었다.참말 끈을 떼려 할진댄 춘심을 아니 보는 것이 상책인 동시에 돈을 봉투에 넣어 보냄이 지당한 일이었다. 그리고 돈도 다 줄 것이 아니니 20 원이면 넉넉하였다.10 원은 내가 쓰고 5 원은 자기가 써야 되겠노라 하였다."무슨 짝에 35 원템이나 주어요?만날 용돈이 없어 허덕지덕하면서. 나도 한 5 원 있어야 되겠어요. 먹고 싶은 것 좀 사서 먹을 터이야요." 안해는 이렇게 말을 마치었다.태기 있는 지 삼사 개월 되는 그는 불가 항의 힘으로 도미국이 먹고 싶었다. 물 많은 배(梨[이])가 먹고 싶었다. 나는이 요구를 아니 들을 수 없었다.그리고는 돈만 치르고 열 점이 아니 넘어 돌아올 것을 재삼 타이른 후 나는 춘심의 집으로 왔다."오늘은 오실 줄 알고 아모 데도 아니 갔지." 춘심은 웃는 낯으로 나를 맞으며 이런 말을 하였다. 그는 못 알아보리만큼 어여뻤다. 끊으리 말리 한 것이 죄송할 지경이었다.그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식도원으로 나는 춘심을 끌고 왔다. 우리는 한동안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다. 이야기도 하고 웃기도 하였다. 포옹도 하고 키스도 하였다.홀연 춘심은 내 손을 잡아다리어 제 바지를 만져 보이며,"퍽도 뻣뻣하지요. 따뜻하라고 서양목(西洋木)으로 바지를 해 입었더니만…….""툭툭한 게 좋구먼." 나는 무심한 듯이 대답을 하였으나 춘심의 그 말에 무슨 깊은 뜻이 있는것 같았다.사치만 일삼는 시체(時體) 기생과 다른 저의 질소(質素)를 자랑 함 일까?또는 명주(明紬)바지를 해 달란 말인가?마츰 그 때에 그는 게으르게 기지개를 켠다. 누구에게 절이나 할 것처럼 깍지 낀 손을 내어밀었다. 나는 반지 하나 없는 그의 손가락을 보았다.명월관 지점에서 처음 만나던 때에 나는 그의 손가락에 적어도 두어 개 반지가 끼인 것을 보았다. 나는아까 의심조차 한꺼번에 푼 듯싶었다."흥, 내가 반지를 해 줄까 하고. " 나는 속으로 '요년!’싶었다. 그러면서 해 주고도 싶었다. 묵연( 黙然) 의 욕망을 못 채워 주는 것이 남아(男兒)로 치욕인 듯도 하였다.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었다.더 많은 것을 바라는 의사 표시를 보기 전에 한시바삐 주려던 돈을 주었으면 하였다. 그러나 요리 값이 얼마인지 알 수 없어 주저주저 하고 있었다."고만 가요." 그는 후끈후끈 단 뺨을 나의 어깨에 쓰러뜨리며, 나의 마음을 안 듯이 소 근거 렸 다. 요리 값은 8 원 얼마이었다. 나는 남은 돈 20 원을 쥔 주먹을 내어 밀며,"저어…… 이 것 담배용에나 보태 써라." 라고 나는 목에 걸린 소리로 머뭇머뭇하였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며,"싫어요, 싫어요." 하고 부르짖었다."얼마 아니 된다마는 정으로 받으렴. 돈이 아니고 정이다.""기생은 돈 주어야 정 붙는 줄 언제부터 알았소?흥 돈!돈!기 생년 은정을 정으로 못 찾고 돈으로 찾는담!" 하고, 춘심은 한숨을 내어쉬었다. 나는 어쩔 줄 몰랐다."흥, 돈이 정, 정이 돈!기생년의 팔자란!" 춘심은 또 한번 괴로운 한숨을 토하였다. 애닯은 슬픔에 쌓인 그 뜨거운 입김이 마치 나의 심장을 스치는 듯하였다. 그도 사람이다, 여성이다. 시들고 곯아졌을지언정,뜯기고 짓밟히었을지언정, 그의 가슴에도 사랑의 움은 있으리라. 지금 그 말은 인몰(湮沒)해 가는 사랑의 애끊는 신음이리라.나는 마치 그 사랑을 파악하려는 것처럼 그를 휩싸 안았다. 나는 그의 가슴에 온 미( 溫味) 와 고동을 느꼈다. 마치 그의 사랑이 나에게 이렇게 속살거리는 듯 하였다."나는 다 식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봄날과 같이 따뜻합니다. 나의 숨은아주 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맥이 뜁니다. 오오!나를 덥혀 주셔요!북 돋워 주셔요!그 말에 응하는 것처럼 나의 목소리도 소근거렸다."덥혀 주고 말고. 북돋워 주고 말고. 아아 불쌍한 사랑의 넋이여!" 우리는 십 분 동안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떨어진 뒤에도 우리는 어깨를 겨누고 같이 걸었다. 돌아온 데는 물론 그의 집이다!그러나 나는 그의 만 토 포켓 안에 지폐 두 장을 넣고 말았다.
9
내일 단성사 ○○권번(券番) ─ 춘심의 다니는 조합 ─ 온 습회( 溫習會)에서 다시 만남을 기약하고 나는 아츰 늦게야 그의 집을 떠났다. 그만큼 대담스럽게 도 되었다.그만치 애련도 깊었다. 5분 전에 잠깐 어데 나갔다 오는 사람같이 신추럽게 돌아왔다. 비난과 책망을 미연에 막기 위하여 엄연히 긴장한 얼굴로 건넌방에 들어왔다. 안 해는 없었다.그 대신 나의 책상 위에 무슨 글발이 있었다. 그것은 안해의 필적 이었다.─
전일에는 이 몸을 사랑하시옵더니 인제는 이 몸을 버리시니 슬프고 애닯은 심사 둘 데 없사와 이 세상을 떠나려 하나이다.이 몸이야 죽사온들 아까울 것 없건마는 다만 뱃속에 든 어린 것 불쌍코 가련하옵니다. 두루막은 다리어 장 안에 넣어 두었으니 이 몸 보는 듯이 입으시기 바라나이다.길이 못 뵈올 것을 생각하온즉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사외다. 다행히 모진 목숨이 끊어지지 않사오면 다시 뵈옵고 첩첩이 쌓인 섧은 사정을 하소연 할까 하옵니다.
나는 매우 감동되었다. 정말 유언장을 본 것 같이 가슴이 찌르르 하였다. 눈물이 핑 돌았다. 물론 거짓이고 희롱인 줄이야 모름이 아니로되 거짓 이 면서도 거짓이 아닌 듯싶었다. 혹 사실이나 아닐는지!"할멈!아씨 어데로 가셨나?" 나는 마루로 뛰어나가며 허전허전하는 소리를 떨었다."몰라요!왜 방에 아니 계셔요?" 밥을 먹는 듯한 할멈은 제 방에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실이나 아닐까?나는 안방으로 건넌방으로 주방으로 뒷간으로 허둥거리며 찾아다녔다……. 안해의 그림자는 볼 수 없다!"아씨 어데 가셨어?어서 알으켜 달라니까그래." 나는 광 속에 들어갔다 나오며 다시금 부르짖었다. 대답은 없고 히히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곧 행랑방 문을 열어 보았다."아씨가 여기 계실라고요." 할아범은 왼 얼굴에 주름을 밀며 태평건곤(泰平乾坤)으로 빙그레 하였다. 마츰내 나는 다락 속에 숨은 안해를 발견하였다."여기 있구먼." 나는 죽은 이가 살아온 것처럼 반갑게 부르짖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때도 이만치 기쁘지 않았으리라. 안해는 웃으며 나려왔다."다락이 저승이야?" 우리가 건넌방으로 단둘이 들어 왔을 제 나는 웃으며 그를 조롱하였다. 은닉자도 방글방글 웃고만 있었다."그것이 무슨 짓이람?유언을 써 놓았으면 죽을 것이지 왜 다락 속에 들어 앉았담?""왜 모진 목숨이 끊기지 않으면 다시 만나자 하지 않았어요?" 하고 안해는 해죽 웃었다."이번은 그랬지만 한 번만 더 가 보아요. 정말 아니 죽나." 안해의 얼굴빛은 갑자기 바뀌어졌다. 슬픔의 그림자에 그의 얼굴은 그늘 지고 말았다."참 그렇게 날 속일 줄은 몰랐습니다. 돈만 주고 열 점 안으로 오 신다해 놓고 아니 오시는 데가 어데 있습니까……?이제나 오실까 저제나 오실까 암만 기다리니 어데 오셔야지요. 새로 한 점을 치고, 두 점을 치고, 석 점을 치겠지요. 그제야 아니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자려고 해도 잠은 아니오고 그년을 쓸어안고 있는 꼴만 보이겠지요……. 참말 애닯고 슬퍼서 견딜수 없었습니다. 고만 죽고 몰랐으면 하였습니다. 그래 요 앞 우물에 빠질까 하였습니다.내가 한 것에 왜 남의 손을 대이랴 하고 밤중에 일어나 당신의 두루 막을 다렸습니다. 내 손에 옷 얻어 입기도 이것이 마지막이다 하니……." 말을 마치지 못하여 그의 코가 연분홍색을 띠워 실룩실룩 경련하기 시작 하였다. 그러자마자 두 줄기 눈물이 흰 선을 그리며 뺨으로 흘렀다.뒤미처 투명한 액체는 흐르고 또 흐른다. 이것을 보고야 아모리 춘심의 지 주 망( 蜘 蛛網)에 감긴 나인들 어찌 그의 고충을 살피지 못하랴.실행은 안 했지 만사( 死) 를 생각한 것은 해보담도 명백한 일이다. 그런 생각이 든 것만큼 그의 속은 쓰렸으리라, 아팠으리라."울기는 왜, 울기는 왜?" 라고 나는 위로하였다. 그러나 나의 눈도 젖기 비롯하였다. 속눈썹에 뜨거운 눈물이 몰림을 느꼈다."또 가시렵니까, 또 가시렵니까?" 이윽고 안해는 울음에 껄떡이며 다그쳤다."또 갈 리 있나, 또 갈 리 있나." 말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맹서하였다. 그러나 춘심과 만나자고 기약한 때는 왔다!그 이튿날 저녁이다. 단성사에 갈까 말까……. 이것은 해결키 어려운 문제였다. 암만해도 가고 싶다. 가도 무방할 핑계를 얻으려고 애를 썼다. 단성사는 춘심의 집이 아니다. 공공의 구경터다. 춘심을 보러 가는 게 아니라,구경하러 가는 것이다. 또 이번 흥행은 ○○○양악대(洋樂隊)에 기부하기 위하여 우리 사(社)에서 주최한 것이니가 보아야 할 의무가 있다.누구가 나를 보더라도 춘심을 만나려고 오지 못할 데를 왔단 말은 아니할 것이다. 아니 가는 것이 도리어 남으로 하여금 이상하게 여기게 할 것이다.또 춘심을 만날 기회는 이 후라도 많을지니 보아도 수류 운공(水流雲空)할 시련이 필요하다. 보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정을 끊기 위해서 반드시 가 보아야 되리라.이유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혼자 가기가 무엇하던 차, 마츰 C가 구경 가자고 왔다. 나는 즐거이 따라 나섰다.여덟 점 가까이 되었을 때라 위층에 아래층에 할 것 없이 관람석은 입추의 여지도 없었다. 휘황한 불빛도 담배 연기와 사람의 입김에 흐리 멍텅 하였다.나는 압박과 질식을 느끼었다. 나의 눈은 부인석에서 춘심을 찾고 있었다. 눈코는 분석할 수 없고, 분면( 粉面) 의 윤곽만 총총히 인형같이 꽂혀 있다.모다 춘심이 같으면서 모다 아니었다."저 무대 뒤로 들어갑시다. 거기는 난로도 있고 차도 있으니, 그리고 구경 하기도 좋을 터이지." 하고 C는 나를 그리로 끌었다.거기에는 푸른 것, 붉은 것, 누런 것, 가지가지 의상이 눈을 현란케 하며, 모다 비슷비슷한 기생이 우물우물하였다. 특별히 못생긴 것도 없고 특별히 잘난 것도 없었다.향기는 고만두고 썩어가는 몸과 마음의 송장 냄새가 그곳 일면에 자욱하였다. 나는 일종의 공포 와 구역을 느꼈다. 그야말로 계집 냄새가 날 지경이었다.그 가운데에도 춘 심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이러다 춘심을 만나면 어찌할꼬?" 나는 문득 생각하였다. 만나면 또 알 수 없는 매력에 끌리지나 않을까?아니 끌린다 하자. 그러면 보아서 무엇할 것인가?멀리서 그도 나를 보고나도 그를 본다. 보고 흩어진다. 싱거운 일이로다!싱겁게 아니 하려면 돌아가는 길에 술잔이나 나누어야 되리라. 적어도 인력거나 태워 보내야 된다. 그러하거늘 나의 주머니에는 벌써 쇠천 샐 닢도 없다. 만나면 큰일이다!"고만 가요." 나는 C한테 턱없는 요구를 하였다."왔다가 구경도 아니 하고 가잔 말이야?" 춘심이와 막 마주칠까 하는 공겁심(恐怯心)이 머리를 쳐들었다. 마음이 조마조마하여 견딜 수 없다. 몇 번 C를 졸랐건만 그는 내 말에 귀도 기울이려 하지 아니하였다."가고 싶거든 혼자 가구려." C는 마츰내 성가신 듯이 말을 던지고 어느 기생과 이야기하기에 골몰 하였다. 나는 하릴없이 또 머뭇머뭇하였다.그럴 사이에 어째 건너편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회색 만토에 까만 하부다에 수건을 두른 춘심이가 어느 결엔 지 거기 와 있다!다행히 나는 저를 보았건만, 저는 나를 못 알아본 모양 이었다. 나는 불시에 돌아섰다. 무대로 드나드는 왼편 문은 잠겨 있다. 나가려면 춘심의 곁을 지나야 되겠다!이야말로 진퇴 유곡일다!그래도 되든 말든 두 판 집고 한 번 나가나 보자. 나는 그리로 향하고 급히 걸었다. 일평생에 관계되는 중대한 일을 단행할 때처럼 나는 더할 수 없이 흥분하였다. 그는 나를 보았다!둘의 거리는 한 자도 아니 된다. 마츰 지나치는 사람은 많고 그 곳은 좁았다. 나는 춘심에게 외면을 하고 사람 틈바구니에 휩쓸 리어 쏜살같이 난관을 넘으려 하였다.나 좀 보아요 하는 듯이 그는 살금살금 나의 외투 자락을 잡아다리었다. 그 찰나에 나의 발길이 머뭇 하려다 뒷 사람에게 밀리어 휙 빠져 나왔다. 문간을 나섰다.안심의 숨을 내쉴 겨를도 없이 후회가 뒤미쳤다. 범치 못할 죄악을 범한 듯 하였다. 얼른 본 춘심의 얼굴은 전보담 십 배 백 배 더 아름다웠던 것 같았다. 그 가야금 병창을 못 견디리만큼 듣고 싶었다. 도로 들어갈까?문지기 보기가 부끄러워 그럴 수 없다. 발이 뒤로 당길 듯 당길 듯하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옮겨졌다. 가슴은 미친 바람에 뒤집히는 바다 모양으로 울렁거 리었다.머리는 벼락에 맞은 듯하였다. 어느 때 시작된 지 모르는 빗줄 이 얼굴을 따렸건만 찬 줄도 몰랐다. 분화산 모양으로 왼 몸이 뭉을뭉을 타는듯 하였다. 무슨 까닭인지, 나로는 알 수 없다. 심리학자는 설명하고 싶은대로 하여라!
10
며칠 동안 발을 끊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무슨 힘이 나를 끎을 어찌 할수 없었다. 그 힘은 어데 얼마나 달아나나 보자고 그가 나를 매놓은 실과 같았다.달아나면 달아나는 대로 그 실은 풀리었다 하되 잠깐만 걸음을 멈추면 그 실은 차츰차츰 감기어 뒤로 이끌었다. 어느 때는 머리 올같이 가늘고 가늘게 되어 이것이 터진다,고만 이리 와요, 이리 와요, 살근살근 달래며 마음이 간질간질하게 잡아다리기도 하였다. 어느 때는 쇠사슬 모양으로 굵고 튼튼하게 되어 이리 안 올 테야, 이리 안 올 테야,위협하는 듯이 쭉쭉 집어채기도 하였다. 이편에서 버티는 힘이 부족하면 휙 따라가는 수도 있다. 하로는 그 집 골목까지 따라간 일이 있다. 그 집 대문을 보자 '에, 뜨거라.’하고 나의 넋은 달음박질하였다. 바른길로 일없이 진고개를 올라갔다. 늘 하는 모양으로 책사(冊肆)에서 책사로 돌아다니다가 저물게야 수표교( 水標橋) 로 빠져 돌아오는 길이었다.대관원(大觀園)에서 어떤 젊은 신사가 기생 하나를 다리고 나온 것을 보았다. 나의 마음은 다시금 동요하였나니 그 기생의 걸음걸음이며 뒷 모양이 하릴없는 춘심이었음이라.나는 걸음을 재게 하였다 느리게 하였다 하며 요모조모 살피기를 마지않았다. 그 나붓이 늘어진 귀밑 머리조차 천연 춘 심이었다. 그럴 즈음에 그 기생은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마치 내가 뒤 따라옴을아는 것처럼. 얼골이 같을 뿐만 아니라 사죄하는 듯한 웃음조차 건네는 듯도 하였다. 나는 그 자리에 사라지는가 의심하였다.그러나 내가 쏜살같 이그의 곁을 스치며 모든 것을 꿰뚫어 보려는 일별(一瞥)로 그가 춘심이 아님을 간파하였다. 온전히 나의 착각임을 깨달았다.나는 이런 일을 금방(金房) 은방(銀房) 앞에서, 전차 정류장에서 한두 번 겪지 않았다. 마치 나의 눈에 춘심이란 색안경이 끼여 도처에 춘심을 발견 하는 것 같았다.홀로 시각(視覺)뿐만 아니다. 나의 관능이란 관능은 모다 그러하였다. 그 고소한 머릿기름 냄새를 안해의 머리에서 맡기도 하였다. 그 야릇한 향기를 나의 소매에서 느끼기도 하였다.그의 소리, 살, 냄새는 벌써 그의 전유물이 아니고 낱낱이 나의 속 깊이 잠겨 있는 듯하였다.이 모든 것들이 환원작용으로 본임자와 어우러지라고 발버둥을 하고 있거늘 그래도 끈을 떼었거니 하고 있었다. 정말 떼어졌을까?보라!어느 연회에서 다시금 만난 우리는 어찌 되었는가!처음은 서로 눈인사만 교환하였다. 그리고 피차 모르는 사람 모양으로 시침을 따고 있었다. 하건만 연회가 끝나고 요리점 문 밖을 나왔을 제 그의 손은 나의 손을 힘 있게 쥐었다. "어쩌면 그렇게 매정하십니까?" 그는 말을 꺼내었다. 얼마든지 비난을 하라는 것처럼 나는 빙글빙글 웃고만 있었다."돌아서신 줄은 나도 알았지만, 그렇게 아니 오실 줄을 몰랐어요…….그 이튿날 만토 속에 돈 20 원 든 것을 보고 남자란 다 마찬가지이다, 이 걸로 정을 끊는구나 하였지요…….""아니 무엇, 그런 것은 아니야. 저어…….""남의 말을 좀 들어요……. 이것이 들어 남의 좋은 사이를 갈랐구나 하고 그 지폐 두 장을 쪽쪽 찢어버리고 싶었어요. 이다지도 남의 마음 쓰는 것을 모르는가 하니 야속해 견딜 수 없었어요. 어쩌면 내 마음을 알아 줄까……, 편지 로나 세세 사정(細細私情) 그려 볼까……, 별별 생각을 다하다가 에라 치워라, 매몰스러운 사나이에게 내 속을 왜 빼앗기리 하고 한 발이나 되게 쓰던 편지를 갈가리 찢어 버렸지요." 하고는 그 때의 괴로운 한숨을 모아 두었다가 인제 쉰다는 듯이 길이 길이 숨을 내어쉬었다."요사이 조금 바빠서……." 라고, 일종 프라이드를 느끼면서 나는 중얼거렸다."그런 말 말아요." 춘심은 성난 듯이 잡았던 손을 뿌리치며,"마음에 있으면 꿈에라도 보인다고, 아모리 바쁘기로서니 잠시 잠깐 다녀갈 틈이야 없단 말입니까?내가 미친년이지, 내가 미친년이야. 나 같은것이 정이니 무엇이니 하는 게 개밥에 도토리지…….""가고야 싶지마는 어데 가겠던. 영업에 방해만 될 뿐이니…….""내가 장사를 합니까?영업이 무슨 영업이란 말씀이오?그런 이면 치레를 하는 것부터 마음에 없어서 그러는 것이지요, 짜장 보고 싶어 보시오. 그런 생각이 나기나 하는가. 참 사나이라 다릅니다그려. 나는 암만 잊으려 해도어데 잊혀집디까?왜 만났던고, 왜 친했던고, 하로도 몇 번을 후회를 하였는지 몰랐어요. 정이란 사람이 맨든 것이지만 인력으로 못할 것은 정 입디 다." 그의 손은 다시금 나의 손을 쥐었다. 문득 깨달으니 나는 벌써 그의 집 마당에 서 있었다.
11
마음의 방축(防築)은 고만 터지고 말았다. 유혹의 흐름은 거리낌없이 밀리었다.이 물결 가운데는 싸늘한 이지(理智)와 뜨거운 감정이 서로 부딪고서로 쳤건만 이지는 흔히 쩔쩔 끓는 열수(熱水)에 넣은 얼음 조각 모양으로 사라졌다.모든 것을 잊고 나는 종종 춘심을 방문하였다. 그 역시 언제든지 나를 환영하는 것 같았다."왜 그처럼 아니 오셔요?" 그는 중문간에서 마당으로 삐죽이 나타나는 나를 보자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부르짖는 것이 항례(恒例)이었다."아까 왜 만나지 않았어?" 어느 때는 내가 이렇게 대답할 경우도 있었다."참 그랬지요. 나는 또 깜빡 잊었지. 금방 보고도 금방 아니 본 것 같 애요." 하고 둘이 웃는 수도 있었다.그리고는 밖이야 햇발이 따뜻하든 달빛이 밝든 밀장은 합문(合門)이 되었다. 사랑은 낙원을 지을 수 있다. 진세의 아모 런 경치와 아모런 풍정도 이에 미칠 것이 무엇이랴!거울같이 마주만 앉으면 그뿐이다!말은 말 끝을 좇고 웃음은 웃음 뒤를 이었다. 피차의 처지를 설명 하자 오뇌도 하고 번민도 한다. 그러나 사랑으로 하여 하는 오뇌요 번민이라. 딴 일로 말미암은 그것보담 달랐다. 그것은 하고 싶어하는 때문이다."그런 생각을 다 하면 무엇합니까?한시라도 재미있게 놀면 그뿐이지." 찰나주의자인 그는 이렇게 끝을 맺고 가야금을 뜯기도 하였다. 이러다 돌아오는 날은 만족과 행복을 느꼈다.물린 것은 아니지만 며칠 아니 보아 도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 갔다가 못 만나면 하로도 두세 번을 가고 싶었다.저나 내나 무슨 고장이 생겨서 곧 아니 헤어질 수 없게 된 때도 그러하였다. 어머님이 밤 열 점 반 차로 동래(東萊)에서 돌아오시던 날이었다.정거장 나가는 길에 나는 춘심의 집에 들렀다. 금심이가 있기 때문에 키스 한 번, 포옹 한 번 못하고는 나는 몸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었다."왜 벌써 가셔요?" 금심은 나에게 매어달리며 모자 집으려는 팔을 막았다."아니, 집에 가 보아야 될 일이 있다."라고 대답하였다. 웬일인지 말소리가 내 귀에도 허전허전하는 것 같았다.어째 춘심에게는 가야만 될 사정을 말할 수 없는 것 같았다."이애, 고만두어라. 오긴 어려워도 가긴 잘 가지. 만 날 천 날 간다, 간다." 라고,춘심은 새모록하게 긁어 잡아당기었다. 모자는 썼건만 그 음향이 전기 같이 나에게 끼치어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잠깐 답답한 침묵에 왼 방안 공기가 응결되는 듯싶었다.금심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만 있다. 춘심은 차마 가는 뒤 꼴을 못 보겠다고 하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시키시마(敷島[부도])’의 권연을 빼어 입으로 그 담배를 불어 빼고 흰 종이를 볼록볼록하게 맨들고 있다.차라리 가지 말라고 나의 소매를 잡아 당겼던들 이렇게 가기 어렵지 않으련만!"아이고, 좀 붙잡으셔요." 민망하였던지 금심이가 마츰내 침묵을 깨뜨렸다."고만두어라. 양류(楊柳)가 천만사(千萬絲)인들 가는 님 어이하리." 라고 춘심은 노래 부르는 어조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건만 나를 쳐다본 애 끊는 정이 서린 추파는 무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을 주었다.다만 한 시간이라도 반 시간이라도 더 놀았으면 하였다. 그러나 기차 대일 정각은 이미 임박하였다. 뒷마루까지 나오는 수밖에 없었건만 그와 작별치 않고는 차마 나려설 수가 없다.나는 닫혔던 미닫이를 다시금 열었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 오직 한 번이라도 나를 보아나 주었으면!"그냥 가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는걸." 나는 진정을 농담으로 엄벙하였다. 그는 얼골을 들었다. 하염없이 웃으며,"아모리 무정한 님인들 작별이야 안 할 수 없지." 하고 일어서 나온다. 사람 눈 없는 어슴푸레한 마루에서 둘의 그림자는 하나가 되었다."밖에 볼일이 무슨 볼일이오?" 그는 물었다. 그 소리는 성난 듯도 하고 우는 듯도 하였다."어머님이 오늘밤에 오신대. 시방 정거장에 나가는 길이야.""진작 그런 말씀을 하실 게지.그러면 어서 나가셔야 되겠구려." 하면서도 나를 놓지는 않았다. 더욱더욱 그의 몸이 달라붙음을 느끼었다. 나의 다리가 마루 끝을 나려서렬 적마다 무릎으로 막았다.입으로 가지 말라는 것보담 그 몸짓의 말이 더욱 웅변이었다. 이윽고 나는 구두를 신었다. 그도 나를 따랐다. 중문과 대문 어름에서 우리의 그림자는 또 한번 합하였다. "어서 가셔요.""응.""나는 어찌할꼬?""일찍이 좀 자려무나." 나는 그가 녹주홍등(綠酒紅燈)에 시달리며 밤마다 밤마다 잘 잠을 못 자는 것을 생각하고 이런 말을 하였다."어데 잠이나 오나요?어슴푸레하게 달은 비치고……." 그 날은 봄의 기운이 벌써 뚜렷한 밤이었다. 담회색 구름은 연기같이 흐르고 있다. 그 속으로 윤곽조차 확실치 않은 달 그림자가 희미(稀微)한 광선을 흩고 있다.무에라고 말할 수 없는 봄 향기에 채운 이 공기, 이 정적, 이 박명(薄明),,더구나 베일에 감긴 처녀의 나체 같은 어스름 달 ─ 이 모든 것들에게는 비밀의 정열의 발효(醱酵)를 느낄 수 있었다. 봄 마음( 春心)으로는 잠도 아니 올 밤이다.나도 한참 황홀하였다."참 가셔야지, 차 시간 늦을라."하고 그는 문득 감았던 팔을 풀었다."자아, 가십시다." 하면서 그는 양인(洋人)이 하듯 내 팔을 얼싸끼고 게을한 발자욱을 옮겼다. 그러면서,"이러고 멀리멀리 갔으면." 이라고 꿈꾸는 듯이 말을 하였다.문간 전등 밑에서 우리는 떨어졌다."어서 들어가." 나는 한 마디를 던지고 돌아섰다. 두어 걸음 가다가 뒤를 돌아오니 그는 그대로 서 있다. 두 눈이 이상하게 빛나는 것 같다.내 마음 탓인지 모르되 분명히 눈물이 도는 듯하였다. 몇 걸음 가다가 또 돌아보았다. 반만 대 문안 어둠 속으로 사라진 그의 초연(悄然)히 돌아선 꼴이 눈에 띄었다.그것 이아주 사라지자 청승궂게 부르는 노래 한 가락이 나의 뒤를 따라왔다."욕망이난망(欲忘而難忘)이요, 불사이자사(不思而自思)로다. 갈 거 ( 去) 자 설워 마라,보낼 송(送) 자 나도 있다." 이런 뒤로는 정이 더욱 깊어진 듯하였다.
12
어데에서 술이 좀 취한 나는 열 점 가까이 되어 웬걸 있을라고 하면서도, 이 말 무지로 그의 잠긴 중문을 뚜드리며 불러본 일이 있었다."놀음 가고 없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굵다란 남자의 소리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하릴없이 발을 돌리 랼 때였다."네에!" 이번에는 새된 여자의 목청이 들리었다. 금심의 소리리라. 짤짤 끄는 신소리를 들을 겨를도 없이 중문은 열리었다. 시난고난이 드러누워 있는 춘심을 보았다.핏기 하나 없는 샛노란 얼골에도 나를 반기는 웃음은 움직였다. 그리고 신음하는 소리를 떨었다."아이고 오셔요, 오셔요……. 나는 어제부터 이렇게 아파요……. 이럴 때 오셨으면, 오셨으면 하던 차이여요." 나는 가엾어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그의 머리를 짚으며,"어데가 그렇게 아프담?……. 나는 없단 말을 듣고 곧 가려고 하였지……." 라고 하였다."아버지께서 모르시고 그런 것이야요. 목소리가 당신 같길래, 금 심이더러, '나가 보아라, 아마 ○○○씬가 보다.’ 하였어요." 제 아픈 것은 둘째이고 딴 것이 매우 마음이 키이는 것같이 변명하였다."나는 그런 줄 알았어. 그런데 어데가 저렇게 아퍼?""무얼 몸살이 좀 낫는가 보아. 그것이야 어쨌든 요사이 왜 그리 안 왔습니까?어데가 아프면 당신 생각이 열 곱 스무 곱 더 나서 짜장 견딜 수 없습니다……. 암만한들 제 마음을 아시겠소……." 그의 말마따나 나는 며칠 동안 그를 멀리 하였나니, 그것은 빈손으로 오기가 뻔뻔스럽고 추근추근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나만 오면 딴 이의 부르는 것을 따는 것이 민망도 하였음이다. 더구나 홀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고통을 아니 느끼고 올 수 없었음이다.그러나 어째 와서만 보면 나의 예상은 노상 틀리었다. 그의 일거 일동과 일빈일소(一嚬一笑) 어느 것에 나를 비난하는 무엇을 찾기 어려웠다. 오늘 역시 그러하였다."고맙군, 고마워. 그렇게 나를 생각해 주니……." 나는 참말 감사 안 할 수 없었다."늘 저러겠다……. 참말이다?고마울 게 무엇이야요?어데 나리가 생각하라서 생각합니까?절로 생각해지니, 생각하는 게지…….""이랬든 저랬든 고마우이. 이것은 참 참말이다.""그래 참말이야요?나리가 참말이라니 나도 참말을 좀 하리까?나는 화류장에 노는 계집이올시다. 노는 계집이라 이 손님하고도 놀고 저 손님하고도 놉니다. 요릿집에서 요릿집으로 불리어 다닙니다. 번화하게 웃고 지냅니다.그래도 때때로 외로운 생각이 들어요. 곧 울고 싶어요. 시쳇말로 나지 미가 많으면 많을수록 어째 쓸쓸해서 견딜 수 없어요.요새 문자로 꼭 한 사람에게 연애를 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하로도 열두 번이나 나겠지요." 그는 폐부에서 짜낸다는 어조로 이렇게 늘어놓았다. 왼통 허위는 아닌 고백이 리라.참된 사랑을 할 수 없음은 위에 없는 심적 비극일 것이다. 환락의 맨 밑에는 비애가 가루누워 있음도 혹 사실일 것이다. 술에 물커지고 육( 肉)에 해어진,백공천창(百孔千瘡) 뚫린 넋의 신음을 나는 듣는 듯싶었다. 춘심은 말을 이었다."나리를 알게 되자, 어째 전일에, 생각하던 대로 된 것 같아요.……그런 데 웬일인지 더욱 애닯고 슬퍼서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 전 슬픔은 여기에 대면 아모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리를 보면 웃음은 나오면서도 가슴 이 메어지는 듯하여요,고만 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나리를 아삭아삭 물어 뜯고 싶겠지요. 그러나 물어뜯기는 건 제 가슴이지요. 독한 벌레에게 쏘인 것처럼 쓰리고 아팠어요. 이것이 무슨 까닭인지?……" 이 피를 뿜는 듯한 언언구구(言言句句)가 단 쇠끝 모양으로 나의 가슴에 들어 박혔다. 따끈따끈한 고통을 느끼면서 신랄한 쾌감을 맛보았다. 나도 그를 지근지근 물어주고 싶었다.물지는 못할망정 나의 입술은 그의 입술을 열렬하게 빨고 있었다. 그 위에 핀 키스의 꽃을 뿌리째 뽑아버리려는 것처럼…….이윽고 뜨뜻한 무엇이 나의 얼굴에 축축하게 젖음을 느끼었다. 나는 낯을 떼었다. 그는 울고 있다.다이아몬드 알갱이 같은 눈물 방울이 번쩍이는 그의 속눈썹에 송송 솟는 것을 보았다. 나는 다시금 그를 움켜 안았다……."놓아 주셔요, 놓아 주셔요." 하고 얼굴을 돌리며 눈물을 씻는다."헤프게도……. 웃지나 말아 주셔요. 속없는 년이라고 웃지나 말아 주셔요……. 얼 없는 사나이의 우는 꼴을 볼 때 미쳤다 울기는 왜 울어하고 속으로 웃은 일이 있습니다. 그 품앗이로 오늘은 내가 울고 나리가 웃겠지요!" 하고 울음을 물어 멈추려고 한동안 애를 쓰다가 암만해도 못 참겠다는 듯이 흑 흑 흐느끼며,"나같이 못난 것 생각 마시고 부모 봉양이나 잘 하셔요. 처자나 잘 기르셔요.아까운 청춘에 이런 데 다니시지 마시고 만 사람이 우러러보게 잘 되십시오. 나는 진정으로 나리께 바라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나도 이를 악물고 나리를 잊겠습니다…… 아아,우리가 왜 알게 되었던가…… 다시 오시지말아 주셔요. 내 눈에 보이지 말아 주셔요. 나에게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딸 자식 하나만 바라는 불쌍한 아버지가 있습니다.그의 노경을 편안히 지낼 만한 거리를 아니 장만하고는 내 몸이라도 내 몸이 아닙니다. 어제도 딴 년처럼 사나이 삿갓 못 씌운다고 야단을 만났습니다.……. 내 한 몸만 같으면……." 말끝은 오열에 멈춰지고 말았다. 마츰 그 때이었다. 중문 흔드는 소리가 요란히 들렸다. 춘심이 다리러 또 인력거가 왔다. 옆 방에 있는 금심은 나갔다 들어왔다. 춘심은 눈물을 숨기었다."저어…… 김 승지 영감이, 식도원에서…….""아파서 못 간다 하려무나." 금심이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위협하는 듯한 차부의 소리가 가루질렀다."그러지 말고 가셔요. 김 승지 영감이 부르셔요. 또 올걸입시오. ""아픈데 어찌 간단 말인가?""꼭 모시고 오래요. 괜히 남 걸음 시키지 마시고.""우연만하면 가 보게그려." 나는 곁에서 말 참여를 하였다. 이 김 승지란 자는 나의 가장 위험한 경쟁자이었다.춘심의 말에 의지 하면 궐자(厥者)는 일 년 전부터 자기에게 마음을 두어 가용(家用)도 대주고 세간도 장만해 주었으되 상관(?)은 없었다. 궐은 서울에서 굴지( 屈指) 하는 부호의 장자이니 재산은 유여하지만 그 인물에 이르러서는 영(零)이었다.그 검고 얽은 얼굴이란 보기만 하여도 지긋지긋하되 돈 하나로 말미암아 괄시 할 수 없는 손님이었다.빚 6 천 원 갚아 주고 5 천 원짜리 집 사 준다는 조건 밑에 궐은 춘심을 떼어들이려고 하는 중이었다. 금력으론 싸울 수 없다.인격이나 사랑으로 대항하려는 나는 궐이 부른 줄 알면 피해 주는 것 이항 례 이었고 가기 싫다는 것을 가 보라고 권한 적도 있었다.그러나 궐자로 말미암아 우연의 길운과 초자연의 기행(奇行)을 믿게 되어 습득 횡령( 襲得橫領)을 꿈꾼 것만 여기 자백해 두자. 춘심은 버티고 가지 않았다.얼마 아니 되어 궐자가 친히 왔다. 금심이가 미닫이를 열자 춘심은 일어 앉으며 인사하였다."어데가 그리 아프담?""어째 몸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에키, 몸살이 난 게로군. 그런 줄 모르고 나는 식도원에서 요리를 시켜놓고 불렀지. 시킨 요리를 퇴할 수도 없고 또 혼자야 먹을 수 있나?그래이리 가져 오라 하였지.""아이고 그렇습니까?퍽도 미안합니다. 좀 올라오시지요.""손님이 계신데……. 나 곧 갈 터이야." 나의 피는 혈관에서 불을 피우며 미쳐 날뛰었다. 어떻게 생긴 놈인지 상 판이라도 보고 싶었다.그리고 춘심의 앞에서 보기 좋게 모욕해 주고 싶은 잔인한 생각이 불같이 일어났다. 그래서 나의 관대와 아량을 보이는 듯이,"아니, 관계없습니다. 들어오시지요." 라고 하였다."네 고맙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간다고 하면서도 가지 않았다. 궐과 나는 한참 버티고 있었다. 그럴 사이에 요리상 온다는 것이 나의 용기를 꺾었다.그것 오기 전에 나는 이 자리를 아니 떠날 수 없었다."더 노시다가 가시지요?" 춘심은 미안해 못 견디는 듯이 말을 하였다."신진대사(新陳代謝)라니 먼저 온 사람은 가야지." 라고 점잖은 말을 하고 나왔다.마루에 걸어앉은 이 경쟁자를 해치고 싶은나는 전신을 떨었다."꼭 내가 가야 들어가시겠습니까?" 하고 나는 눈살로 궐자를 쏘며 웃음 속에 도전의 칼날을 빛내었다."이것 안되었습니다. 매우 미안합니다." 하고 궐자도 홍소하며 눈이 불을 흘리었다.궐의 얼굴은 마치 이글이글 타는 숯불 위에 놓여 있는 불고기 덩이 같았다. 모르면 모르되 나의 얼굴빛도 그러하였으리라. 어찌하였든 나는 밀리어 나왔다. 패배하고 말았다.분해서 견딜 수 없다. 다시 들어가 아까는 내가 나갔으니, 인제는 노형이 나가시오하고도 싶었다.그것보다 딴 사람을 들여보내 들부수는 것이 나으리라 하고나는 미친 듯이 달음박질하였다. C의 여관 문을 두드렸다. C는 없었다.나는 밤이 깊어 가는 줄을 모르고 다방골 근처를 빙빙 돌며 헛되이 보복 수단을 강구하고 있었다.그런 창피를 당했으면 다시는 그의 집에 아니 갈 것이련만 나는 마치 흉 한에게 빼앗기었던 애인의 안부를 살피려는 것처럼 그 이튿날도 춘심을 방문 하였다. 이만치 나는 춘심에게 정신을 잃게 되었다.
13
나는 임질(淋疾)에 걸리고 말았다. 공교하게 그 몹쓸 병은 옮았을 그때로 나타나지 않고 이튿날 후에야 증세가 드러났다. 거의 행보를 못 하리만큼 남 몰래 아팠다.춘심으로 하여 이런 고통을 겪건만 조금도 그가 괘씸치 않았다. 나의 머리는 아주 이지적이었다. 그야 무슨 죄이랴.짐승 같은 남자하나가 그의 정조를 유린하고 그의 육체를 다독(茶毒)하였다. 저도 모를 사이에 그 독균은 또 다른 남자에게로 옮겨갔다.저주할 것은 이 사회이고 한( 恨) 할 것은 내 자신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집에 가기는 싫었다. 한 사 나흘 후이리라.내가 사(社)에서 돌아오니 마당에 이불이 널리고 농짝이 들어내어 있었다. 그날은 춘기 대청결(春期 大淸潔)이었다. 어머님이 나를 보고 웃으시면서,"건넌방에 가 보아라.춘심의 부고가 와 있다." 라고 하셨다. 어머님도 물론 그 일을 아셨다. 처음은 야단도 치셨지만 엎친물을 담을 수 없고, 어머님 오기 전,안해가 거짓 유언을 쓴 뒤로부터는 춘 심의 집에 간대도 왼 밤을 새운 일은 없으므로 그들은 모다 나에게 알면서 속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조금 뜨끔하면서도 웃으며, "공연히 거짓말 말으셔요. 부고가 무슨 부고야요?""아니, 가 보아. 내가 거짓말인가?"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말씀대로 하였다. 이것이 웬일인가!전일에 얻어 온 춘심의 사진이 갈기갈기 찢기어 있다!그의 참혹히 죽은 사체나 본것처럼 간담이 서늘하였다. 칼로 에이어 내는 듯한 슬픔을 느끼었다. 그러자 뒤미처 불덩이 같은 의분(?)이 치받혀 올랐다. 묻지 않아 안해의 소위( 所爲) 인 줄 알 겨를도 없이 알았다. 지난 날의 모든 현숙으로 할지라도 이 악행을 기울(補) 수 없었다. 아니다. 착하다고 믿었던 때문에 더욱 용서 할수 없었다. 이 잔인한 학살자?를 찾아 원수를 갚으려고 나는 맹렬히 문을 차고 나왔다. 범죄자는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마루에서 무엇을 치우고 있었다.나는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독독(毒毒)하게 소리를 질렀다."그것이 무슨 짓이야?무슨 고약한 짓이야?천하 못된 것 같으니……." 그는 나를 어이없이 쳐다보다가 같이 성을 내며,"무엇이요?그까짓 년의 사진 좀 뜯으면 어때요?야단칠 일도 퍽도 없는가보다." 그가 이렇게 들이대기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분노는 비등하였다. 나는 성을 어찌할 줄 몰라 침을 부글부글 흘리며 더듬거렸다."무엇이 어쩌고 어째?뜯으면 어떠냐?""어때요?그런 개 같은 년……." 저편도 씨근씨근거렸다. 포르족족해진 입술이 바르르 떨고 있다. 허파가 벌컥 뒤집히는 듯하였다. 숨이 칵 막힘을 느끼자 문득 때 아닌 눈물이 핑그르르 눈초리에 넘치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은 까닭이다!이 날이 때까지 나의 사랑하는 안해가 이런 계집일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 한 까닭이다. 아아 나는 어찌할까?"몰랐다. 몰랐다. 그런 계집인 줄은 참말 몰랐다. 왜 춘심이가 개 같은 년이야!너보담 몇 곱이 나을지 모르지. 그의 사진을 왜 뜯어?그 사진을 왜 뜯어?둘도 없는 나의 애인이다. 이 세상에서 참으로 나를 사랑하는 이는 오즉 그 하나뿐이다!참 착한 여자다!어진 여자다!말이 기생이지 참말 지상 선녀일다. 왜 내가 그에게 아니 갔던고?왜 아니 갔던고?나는 가련 다. 나는 가련다. 그에게로 나는 가련다." 나는 흥분에 겨워 시나 읊조리는 어조로 눈물 소리를 떨었다."가지. 누가 못 가게 하나?아주 끌려 덮어졌구먼!" 안해는 어디까지 냉랭하였다. 나는 집을 뛰어나왔다. 미친 듯이 춘심에게도 달렸다. 문간에서 금심을 만났다. 그는 조금도 반기는 빛이 없었다."형 있니?""어제 살림 들어갔어요." 하고 금심은 입을 삐죽하고 고만 안으로 사라졌다. 남겨 놓은 그 한 마디 말은 비수같이 나의 심장을 찔렀다. 이 때야말로 어안이 벙벙하였다.한동안 화석 된 듯이 우두머니 서 있었다. 하늘도 무너지고 땅도 꺼지는 듯하였다. 눈앞이 캄캄하였다. 하 건만,"흥, 살림을 들어갔다!" 라고 소근거리고 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집 잃은 어린애나 같이 속으로 울며불며 거리로 거리로 방황하였다.그러다 하릴없이 집으로 돌아왔건만 집에서는 또 얼마나 무서운 사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안해는 요강에 걸터앉아 왼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 차마 볼 수 없어 새 빨갛게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그 눈에서는 고뇌를 못 이기는 눈물이 그렁그렁 하였다.나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병독은 벌써 그의 순결한 몸을 범한 것이다. 오늘 청결하느라고 힘에 넘치는 극렬한 일을 한 까닭에 그 증세가 돌발 한 것이다!춘심의 사진을 처음 볼 때에 웃고만 있던 그로서 그것을 찢게 된 신산한 심리야 어떠하였으랴!그의 태중에는 지금 새로운 생명이 움직이고 있다. 이 결과가 어찌 될까?싸늘한 전율에 나는 전신을 떨었다. 찡그린 두 얼굴은 서로 뚫을 듯이 마주 보고 있었다. 육체를 점점이 씹어 들어가는 모진 독균의 거취를 살피려는 것처럼.그리고 나는 독한 벌레에게 뜯어 먹히면서 몸부림을 치는, 어린 생명의 악착한 비명을 분명히 들은 듯싶었다……. (완결, 1922. 2.) (『개벽』,1922. 1. ~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