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튿날이다. 아츰을 마치고 권연(卷煙) 한 개를 피워 문 나는 이리저리 마당을 거닐 때였다."편지 받으오." 하는 소리를 듣자 누런 복장이 얼른하며 하얀 네모난 종이가 중문 앞에 떨어진다.그것은 엽서형 서양 봉투였다. 매우 이상하다 하는 듯이 나는 겉봉을 앞뒤로 뒤치며 한참 보고 있었다.그러다 사방을 둘러보기가 무섭게 얼른 호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또 꺼내었다.또 넣으려다 말고 손에 움켜쥔 채 어찌 할 줄 모르는 것처럼 왔다갔다하였다.문득 미친 듯이 건넌방으로 뛰어들어 왔다. 그것은 춘심의 편지일다!앞장엔 한 자 한 획 틀림없이 우리 집 번지와 나의 이름을 적었고,그 뒷장엔 '다옥정(茶屋町) ○○번지 김소정( 金小汀)으로부터’라고 쓰이었다.나는 번개같이 봉투 윗머리를 찢었다. 안에서 그림 엽서 한 장이 나온다.굽이치는 물결 모양으로 검누른 머리를 좌우로 구불구불 늘어뜨리고,바람에 나부끼는 듯한 얄따란 한 오리 벼 자최가 아른아른하게 감긴 풍염한 두 팔과 앞가슴을 눈같이 드러내었는데,장미꽃 한 송이를 시름없이 든 손으로 턱을 고이고 눈물이 도는 듯한 추파에 님 생각이 어린 금발 미인의 그림이었다.그리고 이쁘게 언문 반초(諺文半草)를 날린 그 사연은 아주 간단하였다.항용이면 수신자의 주소 씨명을 쓸 자리 한복판에 두 줄로 '아모리 기다려도 아니 오시기로 두어 자 적사오니 속 보시지 마시압.’이라 하였고 그 밑칸 글월은 이러하였다.
보고 싶어 홍응. 왜 오시지 않습니까?기다리는 제 마음 행여나 아실는지?지정일변 아시겠소?어찌하면 좋을까요?
이 때의 기쁨이야 무에라 할는지!가슴에 무슨 경기구(輕氣球) 같은 것이 있어 나를 위로위로 치슬러 올리는 듯하였다.길길이 뛰고 싶었다. 날고 싶었다. 모든 사람에게 이 기쁨을 말하고 싶었다.종로 네 거리에 뛰어나가오는 사람 가는 사람에게 춘심이가 나에게 편지한 것을 알려도 주고 싶었다.밀장을 화닥닥 열었다. 무슨 큰 일이나 난 듯이 안방에 있는 안해를 소리쳐 불렀다. "이것을 좀 보아요. 이것을!" 안해가 방에 들어도 서기 전에 무슨 경급한 일을 말하는 사람 모양으로나 의 소리는 헐떡거렸다."춘심이가 나에게 편지를 했구려. 편지를!" 하고, 왼 얼굴이 웃음에 무너졌다.
그 날 해 지기가 바쁘게 나는 정서(情書) 준 이를 찾아 나섰다.안 해는 일부러 저녁을 일찍이 걷어치고 또 청하는 대로 술조차 받아 주었다.나는 무념 무상으로 거의 달음박질하듯 걸음을 재게 하였다. 발이 공중으로 날며 땅에 닿지도 않았다.그 집 골목에 휙 들어서자 갑자기 걸음이 누 그러지며 가슴이 방망이질하였다.'예까지 와 가지고’하고, 하마터면 뒤로 돌 발자욱을 앞으로 콱 내디디었다.중문턱을 넘으매 머리는 모든 의식을 잃었다는듯이 힝하였다."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마츰 마당에 있던 금심은 나를 보자 반갑게 인사하였다."너의 형 있니?""잠깐 어데 나갔습니다." 하다가 나의 꼴이 애처로웠던지,"지금 곧 올 것입니다. 올라가셔요." 라고 말을 뒤붙였다. 그의 말마따나 얼마 아니 되어 춘심이가 돌아는 왔다.하건만 그의 태도는 의외이었다. 방문을 열고는 아랫목 보료 위에 엉성하게 앉은 나를 보고시답잖게 다만, "오셨어요?" 란 한 마디를 던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대면도 하기 싫어하는 것처럼 경 대 앞에 착 돌아앉는다.한 번도 못 본 사람에게 하듯 서름서름하다.그 날 밤일은 고사하고 편지한 것조차 씻은 듯이 잊은 것 같다."오늘밤에 해동관(海東館)으로 부르지 않았어요?" 분지(粉紙)로써 얼굴을 요모조모 골고루 닦으며 나를 돌아도 아니 보고 그는 이렇게 묻는다."아니. ""그러면 누구일까?…… 새로 한 시에 수유를 받았는데……. 나는 ' 나리’라고.""나는 그런 일이 없는걸." 요리점에서 호기 있게 불러보지 못하고 제 집으로 온 것이 구구한 듯도 싶었다. 창피도 하였다.바늘방석에나 앉은 듯이 무릎을 누일락 세울락 하며 팔을 짚어도 보고 떼어도 보았다.왜 왔던고 후회까지 하였다. 고만 갈까 도 싶었다. 그러나 이 답답한 상태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경대를 살짝 떠난 그는 나의 코밑에 바싹 다가앉았다.나는 또 그 말할 수 없는 매력있는 향기를 느끼었다."왜 오시지 않았어요?흥." 하고, 한숨을 휘 쉬더니 나의 눈 속을 물끄더미 들여다보며,"편지 보셨어요?""응.""그 날 밤새도록 기다리니 어데 와야지." 춘심은 말을 이었다."그러면 그렇지,무슨 두드러진 정이 있어 이 못난이를 찾을라고?기다리는 년이 미친년이지……. 잠 못 잔 것이 어떻게 앵한지 몰랐어요." 하고, 이 매정한 놈아 하는 것처럼 눈을 깔아 메친다."워낙 술이 취해서 여기 온다는 것이 친우들에게 끌리어 집으로 간 모양이야.아츰에 잠이 깨고야 알았어.""그저께 날 밤에 유일관에 갔다가 집에 오니 오셨다겠지요.놀음에 왜 갔던고 싶었습니다. 오늘은 오시려니 하고 어제는 아모 데도 아니 갔지요. 거짓말?이 금심이한테 물어보셔요?거짓말인가……. 그래 생각다 못 해서 편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릿집에 갈 적마다 나를 만날 줄 알고 남 모르게 기뻐하던 것과 진답지 않은 딴 사람만 있고 그리운 내 얼굴을 못 볼 제 얼마나 상 심하였으며 얼마나 흥미 삭연(興味索然) 하던 것을 하소연하였다."속없는 사나이도 다 많지." 춘심은 또 다시 말을 이었다."수(誰)야 모(某)야 다 앉은 자리 정 가는 곳은 한 곳뿐이라, 이런 소리를 하지 않겠습니까?그러면 저희들끼리 네니 내니 하겠지요.무슨 아리 알심이나 있는 듯이 눈을 끔벅끔벅하며 남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겠지요. 하하 하하……. 정 가는 곳은 이 곳뿐인데." 하고 나의 등을 가볍게 뚜드렸다."춘심 아씨 모시러 왔습니다." 꺽세인 차부의 목소리가 우리의 정담을 깨뜨렸다."어데서 왔는가?""해동관에서 왔어요." 춘심의 눈썹은 보일 듯 말 듯 찌푸리었다. 무엇을 한참 생각하더니 큰소리로,"거기 있게, 지금 갈 터이니." 라고 일렀다."술잔 값이나 주어 보내지." 나는 대담스럽게 이런 말을 하였다. 그만치 춘심을 보내기 싫었다."그럴 수 있어요?미리 수유 받은 것이 되어서 그럴 수도 없고……." 하면서 나의 손을 꼭 쥔다.""어쩌면 좋아!" 라고 안타깝게 속살거리고는 몸을 나에게 쓸어 붙이었다……."…… 무슨 탈을 하고 나 곧 올 터이니 기다리겠습니까?""그리 쉽게 올 수 있을라구.""집안에 우환이 있다 하고서 인사나 하고 선걸음에 돌아올 테야.기다리고 계셔요.""글쎄.""글쎄가 아니라 꼭 기다리셔요.""기다리지.""꼭 기다리셔요, 꼭 .아홉 점 안으로는 기어이 올 터이니…….""그래, 아홉 점까지만 기다리지.""가시면 일후(日後)봐도 말도 안 할 테야. ""아홉 점만 지나면 간다."
7
한번 간 춘심은 돌아올 줄 몰랐다. 바람이 문을 찌걱거리게 할 적마다 몇번을 오는가 오는가 하였는지 모르리라.나는 누울락 앉을락 하였다. 일어서 거닐기도 하였다. 마디고 마딘 시간이건만 아홉 점이 지났다. 열 점이지 났다……. 온갖 의혹이 괴여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의 말과 속이 같을진대 여태껏 아니 올 리 없으리라.그 정 맺힌 눈치도 그 안타까운 몸짓도 모두 허위 이 런가 가식이런가.나의 생각이란 염두에도 없고 어느 유야랑(유야랑)과 안기고 안으며 뺨도 비비고 입도 맞추면서 덧없이 깊어 가는 밤을 한( 恨) 하는지 누가 알리요!그런 줄 모르고 눈이 멀뚱멀뚱하게 오기를 고대하는 나야말로 숙맥(菽麥)일다!천치일다!내가 여기서 그의 돌아옴을 기다리는 모양으로 그는 거기서 나의 감을 기다리고 아니 있는지 누가 증명하랴!암만해도 오늘 낮 새로 한 점에 놀음 수유를 받으면서 잘 수유조차 아울러 받았을 것 같다.그렇지 않으면 처음 볼 때 왜 냉연하였으랴!냉연함은 충동이었고 나종의 꿀을 담아 붓는 듯한 언사와 표정은 지은 솜씨일다!"해동관에서 나를 부르지 않았어요?" 한 것은 노골적으로 나를 욕보이는 수작이었다. 격퇴하는 칼날이었다."쾌씸한 것 같으니 "나는 속으로 부르짖고,있지도 않은 위약자(違約者)를 노려나 보는 듯이 미닫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조그만 더 기다리십시오. 곧 올 것인데……. 지금 열 점 아닙니까?반시( 半時) 만 더 기다려요." 곁에 있던 금심은 따라 일어나 나의 앞을 막으며 간청하였다.그와 나는 벌써 꽤 친숙하게 되었다."고만 갈 테야,아홉 점까지 기다리란 것을 열 점까지 기다렸으면 무던하지." 하고 나는 그의 팔을 가볍게 잡아 앞으로 밀치었다."안 되어요. 안 되어요. 가시다니. 꼭 못 가시게 하라던데……." 하고 금심은 응석하는 듯이 뒤에 매어 달리며 모자를 벗기려고 애를 쓴다."밤 새도록 아니 올걸 뭐." 나는 모자를 한 손으로 단단히 붙잡고 웃으며 이런 말을 하였다."안 오기는 왜 안 와요. 두고 보시오. 곧 아니 오는가. 가시면 제가 야단을 맞아요." 하고 애원하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잠깐만 더 기다려요. 십분만, 오 분만……네?네?" 나는 돌아다보고 빙그레 웃으며,"그래, 너의 형이 나를 꼭 잡으라 하던?" 하고 물어 보았다."꼭 못 가시게 하라고…….""정말?""정말이고 말고요.""가 볼일이 있는데……." 입으론 이런 말을 하였지만 이미 갈 뜻은 없었다. 춘심이가 진정으로 나의 기다림을 바랐거니, 어찌 그의 뜻을 저버리랴!"볼일이 무슨 볼일입니까?" 금심은 나의 마음을 알아챈 듯이 중얼거리자 민속하게 나의 모자를 벗겨 들었다.그가 개가(凱歌)를 부르며 웃고 쓰러지자 나도 빙그레 주저앉았다.춘심은 새로 두 점이 넘어 돌아왔다.그때껏 나는 견딜성 있게도 거기 있었나니 그렁저렁 열두 점이 넘고 새로 한 점이 넘으매 기다린 것이 아까워도 갈 수 없었음이다.치맛자락의 사르륵 소리를 듣자 나는 짐짓 한 잠 이나든 것같이 눈이 감았다.밀장은 소리 없이 열리었다. 사람의 넋을 사르는 듯한,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는 듯한 향내가 떠돌았다. 저도 모를 사이에 나는 깊이 호흡을 하고있었다.그리고 무슨 강렬한 광선에 쏘일 때처럼 감은 눈이 환하며 눈꺼풀이 부신 듯이 떨리었다."아이고, 아니 갔구먼!" 하는 속살거림이 들리었다. 그 음향 가운데는 무한한 감사와 무한한 환희 가품 겨 있었다.감은 눈으로도 가만가만히 다가드는 그의 외씨 같은 발을 볼수 있었다.그는 금심을 고이 깨워 일으키자 가는 소리로 물었다."주무시나?""주무시긴 누가 주무셔요?왜 인제야 와요?" 금심의 잠꼬대 같은 소리가 대답을 하였다. 나는 눈을 떴다. 춘심은 벌써 내 곁에 앉아 있었다."미안한 말을, 어찌 다 할는지." 그는 말을 꺼내었다."암만 오려니 어데 사람을 놓아야지요.손님도 안면 있는 이 같으면 사정도 보건만 아는 이란 단지 하나뿐이고 모두 모르는 분이겠지요.집에 일이 있다니 사람을 놓습니까, 몸이 아프다니 사람을 놓습니까.하다하다 못 해 배가 아프다고 엉구럭을 부리니까 영신환이랑 인단이랑 들여오라겠지요.속이 상해서 죽을 뻔하였습니다. 오죽이 지루하셨겠습니까?" 하다가 문득 금심을 향 하며,"왜 자리를 아니 깔아 드렸니?좀 편안히 주무시게나 하지." 하고는,"나는 가신 줄 알았어요.이 못난이를 웬걸 기다리실라고 하였어요. 이런 줄은 모르고 오죽 괘씸히 생각하셨겠나 하였어요.밤을 새워도 편지로 사과나 할까 하였어요. 그런데 와 보니……." 하고 기쁨을 못 이기는 듯이 말끝을 웃음으로 마치었다. 나는 부시시 일어나 앉았다.그러나 선잠을 깬 사람같이 말 한 마디 할수 없었다.그 열렸다 닫혔다 하는 입술과 그럴 적마다 화판(花瓣)이 벌어지며 진주 같은 화심(花心)이 나타나는 모양으로 반짝반짝 드러나는 하얀 이빨과 찡그렸다 폈다 하는 그린 듯한 눈썹과 그 밑에서 흐리다가 빛나다 가하는 까만 눈을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금침은 펼쳐졌다. 하건만 나는 화석이기나 한 것같이 망연자실하고 있었다.어째 무시무시한 증(症)이 들었다. 이불 속이 곧 지옥인 듯이 들어갈 정이 없었다.고만 집으로 갔으면 하였다."고만 자십시다. 매우 곤하실 터인데……." 저편도 아주 감개무량한 듯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앉아 있다가 슬픈 음성으로 침묵을 깨뜨렸다."응. ""어린애 모양으로 '응’……." 하고 춘심은 소리쳐 웃으며 별안간 나를 부둥켜 안는다.나는 마녀에게나 덮 친 듯이 머리끝이 쭈뼛하였다. 둘이 그림자는 이불 안으로 사라졌다.나는 우들우들 떨면서 두 번 아니오리라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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